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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에서는 혼인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신전에 다녀온 엘리자베스는 굳은 얼굴로 혼인식 준비를 지휘했다. 조금씩 건강을 회복한 베리우스 황제 역시 안토니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가이아 제국은 드디어 신탁의 계시가 이루어진다며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황녀 전하, 하를 공작가에서 예물을 보냈습니다.”
이자벨이 보석함을 들고, 엘레나 앞으로 나왔다.
엘레나는 무감한 표정으로 보석함을 열어 훑어보았다.
연꽃의 모양대로 다이아몬드를 수놓은 메달부터 160개의 정교한 꽃잎으로 이루어진 금 목걸이와 황가의 문양에 따라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를 수놓은 팔찌가 보였다.
압권은 보름달의 형상대로 빼곡하게 다이아몬드를 채워놓은 목걸이와 엘레나의 눈빛을 본떠 만든 자수정 팔찌였다.
그 외에도 공고하게 매듭지은 리본 모양으로 부부간의 믿음을 뜻하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있었다.
쭉 살펴보던 엘레나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를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목걸이와 반지는 어디 있지?”
가장 중요한 예물이 빠져 있었다.
“그건, 혼인식날 보내주신다고 합니다.”
엘레나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유가 뭐지?”
“보관한 지 오래되어 세팅을 따로 맡기었다고 합니다. 최상의 상태로 복구하는데 시일이 소요된다고 하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괜찮으니 당장 보내라고 다시 전갈을 보내.”
“네, 알겠습니다. 다른 것들은 한번 해 보시겠어요?”
“아니, 그냥 거기 둬.”
“네, 알겠습니다.”
하를 공작 부인은 안토니안이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고이 보관해두었을 반지와 목걸이를 지금까지 손질도 하지 않았다니 무언가 수상했다.
이자벨이 나간 후, 엘레나는 필릭스에게 다시 긴밀한 지시를 내렸다.
* * *
탕탕탕.
아까부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데이지는 일어날 힘이 없었다.
탕탕탕!
좀 더 다급한 소리가 계속됐다.
“으…….”
할 수 없이 데이지는 숙취로 무거운 머리를 붙잡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 세요?”
-데이지!
“고모님!”
데이지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데이지, 아가. 이를 어쩌니.”
마들렌 고모는 데이지를 꼭 안았다.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데이지는 세바스찬의 누나인 마들렌을 엄마처럼 의지하고 살았다.
“왜…… 그러세요?”
갑작스런 고모의 방문에 데이지는 뭔가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흑흑, 불쌍한 내 아가.”
“무슨 일인데요?”
“너희 아버지가…….”
데이지는 마들렌의 품을 벗어났다.
“아버지 사업이 많이 안 좋아요?”
“…….”
마들렌 고모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무슨 일인데요?”
“세바스찬이…….”
“아버지가 왜요?”
“흑흑, 이렇게 어린 딸을 두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세바스찬이 세상을 떠났어…….”
“네?”
데이지는 멍한 눈으로 마들렌 고모를 봤다.
도무지 고모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니요……?”
“어젯밤, 여관에서 스스로…….”
마들렌 고모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아무리 사업이 힘들어도 이렇게 예쁜 딸아이가 있는데, 어찌 그리 험한 생각을…….”
“아버지가 뭘 하셨다는 거예요!”
데이지는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목을 맸단다.”
털썩.
다리가 풀린 데이지는 그만 마룻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데이지! 괜찮니?”
마들렌이 급하게 몸을 낮춰 데이지를 부축했다.
“왜, 왜! 그러신 거예요?”
“사업이 너무 어려웠나 봐.”
“사업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셨다고요?”
말이 안 된다.
사업이 어려운 건 이해가 갔다.
히르타인들과 사이가 틀어진 후, 이 저택도 비워줘야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걸로 목숨을 끊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세바스찬과 데이지에겐 희망이 있었다.
안토니안이 황제에 오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일이었다.
‘뭔가 잘못됐어!’
데이지는 심장이 울컥거렸다.
“내가, 내가 확인해봐야겠어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데이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다가 문득 거울을 봤다.
아버지에게 그런 일이 생겼는데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니, 새삼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데이지는 황급히 세수를 하고, 재빨리 머리를 만졌다.
옷장을 열고, 검은색의 외출복을 꺼내 입었다. 서두르다보니 반지가 레이스에 걸렸다.
‘맞다.’
데이지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뺐다. 사람들을 많이 만날 텐데 하를 가문의 반지와 목걸이를 한 채로 만날 수는 없었다.
반지와 목걸이를 뺀 데이지는 잠시 고민했다.
함부로 아무 곳에나 둘 수 없었다.
데이지는 침대 바닥 밑의 비밀금고를 꺼냈다. 안쪽에 깊숙이 숨겨놓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
투웅.
‘무슨 소리지?’
데이지의 몸이 긴장됐다.
‘벌써 집을 비워주라고 찾아왔나?’
데이지는 고모가 걱정되어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고모님!”
데이지가 계단을 막 내려가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
“악! 고모님!”
웬 사내들이 마들렌 고모를 둘러싸 있었고, 고모는 축 늘어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저택은 비워 줄 거래도!”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검을 들었다.
“데이지 양이지요?”
“……!”
이전에 빚을 받으러 왔던 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들에겐 뭔가 기품이 느껴졌다.
동시에 위험한 분위기도 한층 짙어졌다.
“빨리 처리해. 괜한 사람 더 희생자로 만들지 말고.”
데이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막 뒤돌아 도망치려는 순간, 한 사내에 의해 손이 잡혔다.
“이거 놔!”
뿌리치려고 해도 강력한 악력에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손이 잡힌 채 하나하나 손가락이 펴졌다.
“대장님, 반지가 없습니다.”
“뭐?”
대장이라고 불린 사내가 검을 들고 데이지 앞으로 갔다.
“반지와 목걸이는 어디 있지?”
“너희들! ……누가 보낸 자들이냐?”
“그건, 알아서 뭐 하게? 하를 가문의 반지랑 목걸이는 어디다 뒀지?”
“…….”
데이지는 입을 꼭 다물었다.
“말을 안 하시겠다? 일단, 집 안을 뒤져라.”
“네!”
그들의 대장인 카몬의 신호에 의해 사내들이 온 집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데이지는 멍한 눈으로 사내들의 행보를 지켜봤다.
“너희들, 하를 공작님이 보낸 거지?”
“미천한 입으로 공작님을 언급하지 마. 감히 평민 주제에 주제도 모르고 공작가를 넘봐?”
카몬 대장이 칼 같은 눈빛으로 쏘아보자, 데이지의 몸이 덜덜 떨렸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거길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어.’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도?
데이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들의 짓이 틀림없어.’
우당탕탕.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며 사내들이 내려왔다.
“찾았냐?”
“죄송합니다.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뭐? 제대로 찾지 못해?”
카몬의 성난 소리에 사내들은 다시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카펫이 뒤집어 지고, 온갖 그릇이며, 책장이 엎어졌다.
카몬은 떨고 있는 데이지 앞으로 가서 다그쳤다.
“살고 싶으면, 반지랑 목걸이를 어디다 뒀는지 말해!”
“…….”
데이지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냥 이대로 죽고 싶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칼집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데이지의 목 끝에 칼을 댔다.
“셋 셀 동안 바른대로 말해. 말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거다.”
목 끝에 닿는 칼날의 느낌이 섬뜩했다.
“하나.”
데이지는 마른침을 삼켰다.
“둘.”
목끝을 겨눈 칼에 힘이 들어갔다.
데이지는 눈을 꼭 감았다.
“…….”
“끝까지 말하지 않겠다는 거냐? 죽어도?”
그 말은, 말하면 목숨을 잃는다는 말과 같았다.
“…….”
데이지는 입을 꼭 다물고 죽을 각오로 버텼다.
“독한 년!”
카몬 대장은 데이지의 목에 칼을 치웠다.
“어디, 언제까지 말 안 하고 버틸 수 있을까?”
카몬 대장은 눈을 번득였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여유로웠던 그의 얼굴은 초조하게 변했다.
그동안 집 안을 온통 뒤집어 놓았으나, 목걸이와 반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
또한 돌처럼 꽉 닫힌 데이지의 입 역시 열 수 없었다.
“이대로 계속 버티면 너만 손해야. 지금이라도 말하면 목숨은 살려주마.”
“……제발, 안토니안을 불러줘요. 그러면 이야기할게요.”
카몬은 한숨을 쉬더니 어디론가 연락했다.
결국 그날 밤, 안토니안이 수도 저택에 찾아왔다.
“안토니안!”
안토니안의 얼굴을 본 데이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모두들 나가!”
안토니안의 명령에 사내들은 모두 방 밖으로 나갔다.
데이지와 둘만 남게 되자, 안토니안은 다정하게 데이지의 얼굴을 살폈다.
“데이지, 고생이 많았지? 이런 꼴까지 당하는지는 몰랐어.”
“안토니안! 너무 무서웠어요.”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나는…… 괜찮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알아, 어떻게 그런 일이…….”
“하를 공작님이 그러신 거예요?”
“아니야! 그런 건.”
안토니안은 강하게 부정했다.
“아버님 일은 어떻게 된 건지 내가 더 알아볼게.”
“고, 마워요. 그리고 고모님은…….”
“고모님?”
“어제 쓰러져서 정신을 잃으셨어요.”
“걱정 마, 고모님도 내가 보살펴 줄게.”
“안토니안……. 너무 고마워요. 그럼 나랑 고모님을 여기서 빨리 내보내 주세요. 일단 고향에 고모님 집에 돌아가 있을게요.”
“알았어. 그런데 먼저.”
안토니안은 데이지의 손을 잡았다.
“반지와 목걸이가 어디 있는지 말해줘.”
“네?”
데이지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반지와 목걸이 어디 있냐고.”
“안토니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일단 나랑 고모님을 여기서 내보내줘요. 너무 무서워요.”
“데이지, 이제 내가 왔으니까 안전해. 그리고 이들을 돌려보내기 위해서도 반지와 목걸이가 필요해.”
데이지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안토니안을 봤다.
“혼인식에 필요해서 그래. 잠깐만 빌리는 거야. 예물로 쓴 다음, 어차피 다시 돌려줄 거야. 그건 이해할 수 있잖아?”
“안토니안, 난…… 지금 너무 무서워요. 일단, 저 사람들 없는 곳으로,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알아, 내가 안전한 은신처를 마련할게.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목걸이와 반지를 줘야 해. 알려줄 수 있지?”
“…….”
“데이지, 날 못 믿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