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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95화 (9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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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에 앉아 기다리면서, 데이지는 하를 공작가의 규모와 기품에 감탄했다.

제복을 입은 하녀들마저도 기품있어 보여, 자신을 쏘아보는 눈빛마저 비웃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데이지는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속에서는 커다란 희망이 부풀었다.

황녀의 약혼자이기에 안토니안이 가이아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대단한 귀족의 자제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직접 보니 대저택의 규모도 상상 이상이었다.

‘곧 내가 이곳의 안주인이 될 거야.’

데이지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안주인이 되면 자신을 이상하게 보았던 하녀들을 모조리 해고할 테다.

아까부터 슬글슬금 자신에게 이상한 시선을 던지는 하녀들이 죄다 미웠다.

이제 안토니안이 오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봐주기만 한다면 모두 자신 앞에 무릎을 꿇릴 것이다.

“공작님께서 오십니다.”

어거스트 집사의 말에 데이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를 공작은 자신 앞에 고개를 숙인 데이지를 내려보았다.

“누구지?”

“저는…….”

“누가 너더러 답하라 했느냐?”

하를 공작의 차가운 목소리에 데이지는 얼음처럼 굳었다.

“안토니안 님을 찾아온 손님입니다.”

어거스트 집사가 답하자, 하를 공작은 그제야 데이지에게 칼날 같은 시선을 던졌다.

“안토니안과 무슨 사이지?”

“저희는……. 그게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제법 당돌하구나. 어느 가문의 영애지?”

“아버지께서는 상업에 종사하십니다.”

“어느 가문이라 물었거늘…….”

“가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선대 가문에도 귀족의 피가 없어?”

“저희는…… 선대부터 상업에 종사하시어…….”

“뼛속까지 평민이구나.”

데이지는 숨이 턱 막혔다.

하를 공작의 눈이 가늘게 좁혔다.

“그런데도 잘도 내 집에 발을 들였어.”

데이지는 손가락에 끼었던 반지를 내보였다.

“토니가 이걸…….”

“토니?”

“아니, 안토니안이 이걸 저에게 주었습니다.”

반지를 본 하를 공작의 안색이 변했다.

“그 놈이 미쳤군. 감히 이걸 너에게 줬단 말이냐!”

그 때, 응접실 문을 벌컥 열면서 안토니안이 황급히 들어왔다.

“데이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안토니안이 데이지를 보고 당황하며 손을 끌었다.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안토니안이 데이지를 다그치는 동안 하를 공작이 그에게 다가갔다.

쫙.

하를 공작의 손이 안토니안의 뺨을 갈겼다.

“못난 놈 같으니라고!”

“아버지!”

“네 어미의 반지를 저런 미천한 애한테 주다니. 정신 나간 놈!”

“…….”

“그동안은 혼인 전에 하고 싶은 것 좀 해 봐야지 하고 두고 봤다. 그런데 이런 버러지 같은 거를 집 안까지 들어오게 만들어?”

하를 공작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데이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소박하고 순수했던 안토니안과는 영 딴판이었다.

데이지는 바싹 긴장했다.

“곧 있으면 황녀님과 혼인식을 올릴 놈이 잘하는 짓이야. 걱정하지 말라며?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다짐할 때는 언제더니, 쯧쯧.”

“걱정 마십시오. 혼인식은 제대로 올릴 것입니다.”

“그럼, 저 여자는 정부로 두겠다는 거냐?”

하를 공작은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엘레나 역시 케이타 제국의 정부로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기가 막혀서…….”

하를 공작은 머리에 손을 얹었다.

“혼인식 전에 문제없게 처리해 놔. 반지와 목걸이는 다시 제자리로 가져오고.”

냉정한 하를 공작의 말에 데이지는 얼음이 되었다.

하를 공작이 나가자, 응접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토니…….”

“데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

“집이…… 담보가 잡혔어요. 사흘 후면 나가야 해요. 집에 서 쫓겨나면 토니도 날 못 찾잖아요. 일단 집만이라도 해결해줘요. 그럼, 혼인식 후까지 얌전히 기다릴게요.”

“담보가 잡혔다고?”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요. 어음도 밀려들고 있고…….”

“젠장!”

안토니안이 벌컥 소리를 지르자, 데이지는 깜짝 놀랐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해결하라는 거야?”

“토니, 일단 집에 잡힌 담보만이라도 풀어줘요. 그럼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연락도 도통 없고, 아버지도 토니 도움만 기다리시고…….”

“그런 돈이 내게 어디 있어!”

생각 외의 반응에 데이지는 당황했다.

안토니안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사실, 요근래 데이지에 대한 마음이 변하려는 찰나였다.

첫 여자이기에 데이지에 대한 마음이 애틋했다. 하지만 케이타 제국에서 돌아온 이후 베리우스의 총애를 받자, 여기저기서 은밀한 유혹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한 황제가 되면 수많은 여인들을 품에 안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미리 어머니의 반지와 목걸이를 주었던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게다가 히르타인들의 배신으로 이제는 세바스찬의 도움마저 필요치 않게 되자, 데이지는 더욱 귀찮은 존재가 되어 갔다.

“토니,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여기 저택에 있는 것만 몇 개 팔아도 아버지가 빚진 거는 갚겠어요.”

“뭐? 그런 천박한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안토니안이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천박하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말하는 게 그렇잖아. 여기 있는 거는 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것들이야. 너희 집에 있는 거와 같은 줄 알아? 그런 걸 팔라고 하다니.”

그의 거친 언사에 데이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알았어요. 내가 실언했어요. 그 말은 미안해요.”

그러나 안토니안은 좀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돌아갈게요. 가서 혼인식 올릴 때까진 조용히 있을게요.”

데이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시기를 잘못 찾아온 것 같았다.

‘그래,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잖아. 내가 너무 성급했어.’

안토니안 역시 혼인식을 앞두고 불안했을 거다. 급한 마음에 하를 공작가에 무작정 찾아온 것이 잘못이다.

데이지는 애써 애교 있는 웃음을 보였다.

“너무 화내지 말아요. 빚쟁이들은 찾아오고 집은 비워줘야 해서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거니까.”

데이지의 부드러운 말에도 안토니안은 얼굴근육을 풀지 않은 채 딱딱하게 말했다.

“반지와 목걸이는 풀어놓고, 가.”

“토니.”

“그렇게 부르지도 말고. 어서!”

“……이건, 안 돼요.”

“뭐?”

안토니안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이걸 보면서 기다리고 싶어서 그래요. 조용히 있는다고 했잖아요.”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와 목걸이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는 평민인 데이지도 잘 알았다.

데이지는 반지 낀 손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세바스찬 사업이 어렵다며! 그거까지 팔아먹을까 봐 그래.”

비열한 말투에 데이지는 소름이 돋았다.

“절대 그런 일 없어요. 안토니안,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알잖아요. 그러니까 날 믿어요.”

데이지의 말에 안토니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때가 되면 다시 돌려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풀어놔.”

“싫……어요.”

데이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지.”

안토니안이 성큼 앞으로 다가가 데이지의 손을 잡았다.

“이거 빼.”

“안토니안, 누구보다 당신이 황제가 되기를 바라는 건 나예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나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당신의 비밀도 지켜줬잖아요.”

데이지는 다른 손으로 안토니안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움찔하며 안토니안의 동작이 멈췄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데이지는 안토니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계속 비밀을 지키고 싶으면, 반지와 목걸이는 놔둬요. 아버님께는 당신이 적당한 핑계를 대면 되잖아요.”

안토니안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혼인식이 끝나면 날 데리러 와요. 그동안은 고향에 가 있을 테니까요.”

데이지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안토니안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데이지가 나가자, 하를 공작은 안토니안을 불렀다.

“어떻게 처리했어?”

“혼인식은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그 때까지는 조용히 있을 거예요.”

“반지와 목걸이는?”

“그건…….”

“돌려받지 못했어?”

“한 번 준 겁니다. 사내가 돼서 어떻게 다시 달라고 합니까?”

“뭐? 정말 그 애한테 마음이라도 내어준 거냐?”

“즉위식을 치르면, 정부 몇 명 정도야 둘 수 있잖아요.”

하를 공작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녀석. 혼인식까지 가만히 있겠다는 말은 어떻게 믿어?”

“네?”

“애초에 그럴 아이였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반지와 목걸이만이라도 다시 찾아와. 혼인식 전에 예물을 보내야 될 거 아니야?”

“그런 건 대충 둘러대도 되잖아요. 엘레나는 별로 상관하지도 않을 거예요.”

“뭐? 그게 말이 돼?”

“사실은…….”

안토니안은 머뭇댔다.

“뭐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게야?”

“……데이지가 제 비밀을 알고 있어요.”

안토니안의 말에 하를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그 비밀이라는 게 네 머리카락 이야기는 아니겠지?”

“…….”

“왜 답이 없어?”

“여길 떠나가 있는 동안 염색해 준 사람이 데이지예요.”

하를 공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또 누가 알고 있어?”

“그게…….”

“어서 말하지 못해?”

“……세바스찬도 알고 있어요.”

“한심한 놈. 다른 사람은?”

“두 사람 말고는 없어요.”

하를 공작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넌, 이만 나가 봐라. 그 애에 대해선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

“아버지? 어떤 처리를 말씀하시는 건지…….”

“그 입을 영원히 다물게 해야지.”

“아버지! 그냥 두세요. 데이지는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믿어?”

“입을 열어서 좋을 게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황제가 되어야 데이지도 데려올 수 있고요.”

“한심하다 한심하다 했더니. 황제가 되어서도 저런 천한 아이에게 끌려다닐 셈이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혼자 여길 찾아온 배포를 봐라. 네 비밀을 쥐고 있는 한, 널 계속 흔들 거야.”

안토니안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넌 아무 일 없이 혼인식만 준비해. 뒤처리는 알아서 해줄 테니.”

하를 공작은 단호하게 말했다.

* * *

데이지는 허탈한 걸음으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사내들이 휩쓸고 간 저택은 엉망진창인 채 그대로였다.

한 명 남은 하녀마저 그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아.”

데이지는 허탈해져 주저앉았다.

‘어떻게 하지?’

안토니안의 차가운 눈빛이 생각났다.

‘마음이 변한 걸까?’

만약 마음이 변한 거라면, 황제가 된 이후에는 날 데리러 올까?

마음이 미친 듯이 불안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데이지는 주방으로 가서 럼주를 꺼냈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었다.

술을 잔뜩 마신 후에야 데이지는 겨우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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