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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 동안 엘레나를 보더니 안토니안은 가슴을 펴고, 방 밖으로 나갔다.
안토니안이 저리 자신만만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베리우스 황제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었다.
베리우스 황제의 상태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
마치 유언처럼 ‘안토니안과의 혼인식’을 명해 놓고, 자주 의식을 잃어 설득이 불가능했다. 안토니안은 그 핑계를 대며 혼인식을 서두르고 있었다.
안토니안의 말이 맞았다.
‘신탁의 계시’와 ‘베리우스의 지지’가 있는 한 파혼은 쉽지 않았다.
모두가 ‘붉은 태양’이 안토니안이라고 믿고 있었다. 개중에는 케티아 제국의 정부로 있었던 황녀를 아무런 불만 없이 받아들인다하여 안토니안의 도량을 칭찬하는 무리까지 있었다.
똑똑.
“들어와.”
들어온 이는 아리엘이었다.
“언니, 괜찮아요? 아까 안토니안이 화난 표정으로 여기서 나가던데요.”
아리엘은 엘레나의 표정을 살폈다.
“괜찮아.”
“언니, 혹시 안토니안과 파혼을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리엘이 엘레나에게 다가왔다.
“일부러 들은 건 아니에요. 언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다가…….”
“맞아, 아리엘. 안토니안과는 파혼할 거야.”
“휴우, 다행이에요.”
“뭐가?”
“사실, 황궁에 돌아올 때부터 좀 이상했거든요.”
“이상하다니?”
“황궁으로 처음 돌아오던 날부터 좀 달라졌다고 할까요? 히르타인을 데려온 것부터 그러고요. 수상한 점이 많았어요.”
“자세히 좀 말해봐.”
엘레나는 아리엘의 손을 끌었다.
“언니, 사실……. 안토니안이 황궁에 돌아온 이후 이상해서 제가, 아니 필립하고 같이 안토니안에 대해 좀 조사를 했어요.”
“그래?”
엘레나는 주의 깊게 아리엘의 말을 들었다. 아리엘은 그동안 히르타인들과 같이 지낸 수상한 행적과 안토니안이 수도에 머문 저택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를 공작가로 들어가지 않고, 수도 저택에 머물렀단 말이지?”
“네, 이상하게 여겨서 주위를 관찰했는데, 아직까지 수상한 이는 보이지 않았어요.”
“누가 조사했지?”
“필릭스요. 필립이 지시했어요. 언니도 알 거예요. 친위대에 근무했었거든요.”
“알아, 믿을 만한 자야.”
엘레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을 꺼냈다.
“필릭스를 불러줄래?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들을 가지고 오라고 해.”
“알았어요. 언니.”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볼게. 그동안 고생했어. 아리엘.”
“언니, 앞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시켜주세요.”
“그래, 고마워. 그동안도 너무 애썼고.”
“언니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죠.”
“아리엘…….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얼마나 잘하고 있었는데. 넌…….”
엘레나는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언니, 난……. 언니가 신탁의 계시에 얽매이지 말고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혼인했으면 좋겠어요. 안토니안은 어쩐지……. 꺼림칙해요.”
“그래, 아리엘. 걱정 마.”
엘레나는 아리엘은 토닥이며 안았다.
가이아 제국을 떠날 때는 어린 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제법 커서 의젓한 느낌이 들었다.
아리엘이 나가고, 곧이어 필릭스가 엘레나를 찾았다.
“황녀 전하, 인사드립니다.”
필릭스는 엘레나가 기사로 근무했던 시절, 잘 알던 상급 기사였다.
성실하고 무예가 뛰어나 엘레나 역시 총애했던 자였다.
“필릭스, 그동안 안토니안에 대해 조사했다고 들었어.”
“네, 황녀 전하. 특히 수도 저택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필릭스가 내민 서류를 엘레나는 꼼꼼히 훑었다.
저택에 드나든 사람들의 명단 중 엘레나는 세바스찬에 대해 주목했다.
“필릭스, 세바스찬이란 자가 저택에 자주 드나들었나?”
“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사업상 만남이라고 하면서 드나들었습니다. 세바스찬이 안토니안 님께 히르타인을 연결해드린 것 같습니다.”
엘레나는 미간을 좁혔다.
“세바스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봐. 그리고 저택에 대한 감시도 강화하고.”
“네, 알겠습니다.”
“손이 많이 필요할 거야. 황실 근위대원을 줄 테니, 비밀스럽게 행하도록 해.”
“명, 받들겠습니다.”
필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 * *
한편, 수도의 저택에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데이지는 고함을 질렀다.
웬 사내들이 나타나 구둣발을 신은 채 데이지의 저택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일을 맡아주던 히르타인들이 사라지고, 하녀 한 명 외에 고용인들도 줄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렵다 하니,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당분간 안토니안과 연락도 할 수 없으니 참고 기다리려 했다.
“당장 나가!”
“시끄럽슈, 아가씨.”
“뭐?”
“나갈 사람은 우리가 아니지, 아가씨야 말고 당장 빚을 갚든지, 아니면 나가시든지.”
“그게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이냐면, 당신 아버지 빚이 어마어마하다 이 말이야. 이 집도 담보로 잡힌 지 오래고.”
사내는 느른하게 웃었다.
“뭐, 돈이 아니면 다른 걸로 갚아도 되고.”
사내의 음침한 눈이 데이지의 몸을 훑자, 데이지는 펄쩍 뛰며 방으로 달아났다.
퉁퉁. 쨍그랑.
이리저리 헤집으며 물건들을 뒤엎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악!”
데이지는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그 때 벌컥, 문이 열렸다.
“사흘 후, 다시 찾아올 거요. 그때까진 돈을 마련하거나 집을 비워줘야 할 거요!”
우탕탕탕.
물건들이 엎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구둣발 소리가 비로소 멀어졌다.
데이지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 살폈다.
“어머!”
데이지는 깨진 찻잔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이걸 어떻게 구한 건데!’
안토니안의 취향을 고려해 힘들게 공수한 찻잔이었다.
비단 찻잔뿐이 아니었다.
카펫에는 구둣발 자국이 난무했고, 거실에 걸린 그림 액자도 떨어져 있었다.
데이지는 초조하게 현관 앞을 왔다 갔다 거렸다.
「사흘 후, 다시 찾아올 거요.」
‘사흘 후라고?’ 데이지는 입술 끝을 꽉 깨물었다.
그동안 무슨 수로 돈을 마련하겠는가.
하지만 가만히 있다가 이대로 여기서 쫓겨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쫓겨나면, 안토니안이 나중에 찾으려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닌가.
‘안토니안에게 찾아가야겠어.’
데이지는 반지 낀 손을 꼭 쥐었다.
* * *
하를 공작가의 집사, 어거스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웬 여인이 하를 공작가를 찾아와서 들여보낼 때까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하녀도 없이 홀로 찾아온데다, 심지어 초대장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들여 보내주세요. 전 꼭 안토니안 님을 만나야 합니다.”
“약속을 하셨습니까?”
“데이지라 전하면 알 것입니다.”
“흐음.”
어거스트 집사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데이지를 바라봤다.
“아무나 함부로 들일 수는 없습니다. 차후에 초청장을 가지고 다시 오십시오.”
어거스트 집사가 문을 닫으려 하자, 데이지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걸 보세요!”
데이지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 보였다.
“이걸 어떻게……!”
어거스트 집사는 놀라 데이지의 얼굴을 보았다.
하를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였다.
“흐음……. 일단 들어오시죠.”
한참을 고민하던 어거스트 집사가 문을 열어주고서야 데이지는 하를 공작가에 들어올 수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집사를 따라 정원을 걷던 데이지는 저택의 규모에 놀랐다.
수도에 세바스찬이 마련해 준 저택도 크고 좋았으나, 하를 공작가는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원만 해도 한참을 걸어가야 했는데,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저택의 위용에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어거스트 집사는 데이지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 * *
밤 깊은 시각, 엘리자베스는 남몰래 대신녀를 찾아갔다.
베리우스 황제의 상태는 고비는 넘겼지만, 딱히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 상태였다.
하지만 위중한 고비를 넘긴 건만으로도 엘리자베스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문제는 엘레나의 혼사였다.
엘레나는 ‘파혼’을 선언한 상태였지만 안토니안 쪽은 강행하는 상황이었다.
엘레나의 말을 백번 들어주고 싶으나, 지금 상황에서 파혼을 지지하기도 힘들었다.
그저 엘레나를 위해 혼사를 늦추는 미온적인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
‘대신녀님께서는 답을 주실 거야.’
엘리자베스는 초조한 마음으로 대신녀를 기다렸다.
“황후 폐하.”
드디어 대신녀가 엘리자베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대신녀님.”
“이 밤에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베리우스 황제 폐하께서 위급하게 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엘레나의 일로 왔습니다.”
“음…….”
“혼인식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황후 폐하, 혼인식은 최대한 빨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신녀의 분명한 말에 엘리자베스는 더 걱정이 됐다.
“염려되시는 일이 있습니까?”
“그게…….”
“말씀해 보세요.”
“엘레나는 안토니안과 혼인을 원하지 않습니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대신녀의 태도에 엘리자베스는 긴장했다.
“황후 폐하.”
“네, 대신녀님.”
“황녀님은…… 검은 구름을 제거하지 못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분명히 검은 구름을 제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검은 구름이라면……?”
“아시다시피 당연히 케이타 제국의 황제를 말합니다.”
“네…….”
“황녀님은 검은 구름에 싸여서 판단을 흐리고 계십니다. 돌아오셨지만, 아직 검은 구름의 영향 아래 계십니다. 이럴 때일수록 황후 폐하께서 황녀님의 마음을 바로잡아주어야지요.”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의심을 꺼내놓았다.
“대신녀님, 붉은 태양이 꼭 안토니안이라는 법이 있을까요?”
“당시 붉은 머리를 가진 귀족의 혈통은 안토니안뿐이었습니다. 설마하니 평민의 자식들 중 찾아보시려는 건 아니시지요?”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평민의 자식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그럼, 혼인식을 추진하세요. 베리우스 황제께서 쇠약해 계십니다. 후계를 준비하셔야죠. 게다가 이대로 미적거리다 보면 또다시 황녀님이 케이타 제국에 끌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엘리자베스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다시 케이타 제국 황제의 정부로 끌려갈 수도 있다. 혼인만큼 안전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대신녀님. 우매한 저를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자베스는 후다닥 신전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