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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테미는 지독하게 못생겼거든.”
단순히 외모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테미는 정원에 있는 풀들을 짓밟았으며, 흙을 싫어했다.
수많은 사치품을 요구했고, 은빛 여우인 사라타도 치장을 위해서 잔인하게 죽였다.
오히려 더 많은 사라타를 잡지 못해 혈안이 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흔하던 사라타가 그렇게 귀하게 된 것은 테미 때문이었다.
은빛 여우 목도리와 보석으로 온갖 치장을 다 하였으나, 테미의 아름다움은 엘레나의 발끝만도 못 따라갔다.
진짜 아름다움은 겉모습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데릭은 카토 공작과 안토니안의 공모 사실을 밝혀냈다.
거기에는 금전만 더 주면 금방 편을 바꾸는 히르타인의 공이 컸다.
적당한 협박과 보상으로 히르타인은 기꺼이 안토니안을 배신했다.
* * *
신전에서 나올 무렵 짙게 깔리기 시작했던 어둠은 황궁에 도착하자, 거의 밤으로 변했다.
둘은 천천히 황궁의 정원을 걸었다.
한참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두 사람은 걸음을 맞추고, 호흡을 맞추고, 손을 통해 온기를 나눴다.
“잠깐 앉을까요?”
생각이 정리된 듯 엘레나가 칼립소에 말했다.
정원에 있는 장막에 둘은 함께 들어갔다.
어두운 장막 안에서 칼립소는 촛불을 켰다.
빛이 장막 안을 비추자, 제법 고즈넉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뭐 좀 가져오라고 할까?”
“아니에요. 둘만 있고 싶어요.”
“그래.”
의자에 앉고서도 엘레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먼저, 고마워.”
“뭐……가요?”
“날 살려줘서.”
칼립소의 목소리가 진중하게 울렸다.
“들……었어요?”
칼립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지?”
칼립소가 부드럽게 물었다.
“적국의 황제를 살려줬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요.”
“적국의 황제라, 그럼, 왜 살려준 건데?”
그건 엘레나에게도 의문이었다.
당시에는 칼립소를 살려야겠다는 본능만 있었다.
앞뒤 재고 가릴 정신이 없었다.
“당신이 죽으면, 케이타 제국의 군사가 가이아 제국에 더 보복을 할 테니까요.”
엘레나는 뒤늦게 자신이 생각한 명분을 말했다.
“그것도 이유가 되겠지.”
칼립소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진작 알았다면, 당신을 그런 식으로 데려오진 않았어. 거기다 드하야 즙 사건도 그놈이 마음대로 한 거잖아. 어쩐지 그 일은 당신답지 않았어.”
칼립소는 낮게 중얼거렸다.
“못난 자식 같으니라고.”
생각 같아서는 안토니안의 사지를 갈가리 찢어 사라타의 먹이로 내던져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했다.
진실을 알려 하지 않고 온갖 굴욕을 주면서 ‘정부’로 끌고 온 건 자신이었다.
거기서부터 관계가 꼬이지 않았을까.
칼립소는 손을 이마에 댔다.
차마 엘레나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미, 안해.”
참담한 어조로 칼립소가 말하자, 엘레나는 놀랐다.
이 거대하고 오만한 사내가 자신에게 사과를 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진심으로 사과할게.”
“그런 말 말아요. 몰랐잖아요.”
“그건 핑계가 되지 않지. 엘레나, 이번 일은 평생을 걸쳐 갚아줄게. 맹세해.”
칼립소의 붉은 눈이 진중하게 빛났다.
“기억해 둘게요.”
“그래. 꼭 기억해. 그럼, 그때 나한테 치유력이 온 거였군.”
“……맞아요.”
피를 흘려주었을 때, 치유력도 함께 흘러갔다.
칼립소가 가만히 엘레나를 봤다.
“어쨌든 당신과 나는 피를 나눈 셈이군.”
칼립소가 묘한 눈길로 엘레나를 보자,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어요. 하나만 빼고요.”
“그게 뭐지?”
칼립소는 엘레나의 말에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이제 날 가이아 제국으로 돌려보내 줘요.”
엘레나는 결연하게 말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그걸 끝내려면, 자신이 가이아 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
칼립소는 모든 피가 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거 같았다.
“엘레나, 다른 부탁은 뭐든 괜찮아. 그것만은 내가 들어줄 수가 없어.”
“사라타도 풀어줬잖아요.”
“감히 사라타 따위를 당신한테 어떻게 대?”
“아바마마께서 위독하세요. 안토니안이라 해도 그런걸 거짓으로 말했을 리가 없어요.”
“…….”
엘레나의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말에 칼립소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한참의 침묵 끝에 칼립소가 입술을 열었다
“보내주면, 돌아올 건가?”
엘레나의 답이 선뜻 돌아오지 않았다.
“난 가이아의 황녀예요.”
“엘레나.”
“오해가 풀렸다면 케이타 제국의 정부로 계속 살 수는 없어요.”
엘레나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단호했다.
그런 엘레나를 칼립소는 진지한 눈빛으로 봤다.
“내가 당신을 황후로 올려준다면, 받아들이겠소?”
“……그럴 수는 없잖아요.”
“내가 그러겠다면,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어.”
어떤 반대가 있어도, 관철할 생각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사 황위를 걸 일이 있더라도 기꺼이 행할 것이다.
엘레나만 받아들여 준다면.
칼립소가 무게 있는 시선을 던졌지만, 엘레나는 아무 말도 없었다.
“두 번째 청혼이야. 받아주겠소?”
칼립소는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었다.
엘레나는 눈을 감았다.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칼립소가 집요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잠시 후,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칼립소와 정면으로 시선을 맞췄다.
“아까 그랬잖아요. 평생을 걸쳐 갚는다고. 돌아가고 싶어요. 가이아 제국으로.”
“재고의 여지도 없나?”
칼립소는 슬픈 어조로 물었다.
“…….”
“그래도 조금이라도 고민을 했으니, 이전보단 나아졌다고 해야 할까.”
칼립소가 허탈한 눈으로 엘레나를 살폈다.
좀처럼 눈을 맞추지 않는 엘레나의 시선 주변을 뱅뱅 맴돌았다.
“……알았소.”
칼립소가 진중하게 말했다.
“보내주지.”
“……고마워요.”
엘레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허탈해하는 칼립소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마에서 점점 입술을 내렸다.
톡톡.
무릎을 꿇은 칼립소와 키를 맞추며, 두드리는 입술에도 칼립소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칼립소는 눈을 감은 채 안간힘을 쓰고 움직이지 않으며 버텼다.
엘레나는 칼립소의 눈 주변을 쓰다듬었다.
“칼립소, 눈을 떠봐요.”
간절한 엘레나의 말에 칼립소가 눈을 떴다.
“당신은 눈이 참 아름다워요.”
“거짓말.”
피로 번진 눈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진심이에요.”
“그러면 떠나지 마.”
“칼……그럴 순 없어요.”
톡톡 두드리던 입술이 멀어지고,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요.”
칼리소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멀어진다.
엘레나의 입술이 멀어지고, 몸이 멀어진다.
칼립소는 이를 악물었다.
아까도 팔을 올려 그녀를 안고, 입술을 겹치려는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지금 입술을 맞추면, 그녀를 놔줄 자신이 없었다.
장막의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간다.
이대로 보내면, 그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칼립소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막을 나서는 그녀의 손을 잡고, 허리를 안고, 그대로 입술을 내렸다.
“엘레나!”
거친 혀가 입 안을 헤집으며 숨결을 빼앗았다. 살과 살이 얽히는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허리를 두른 칼립소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엘레나의 혀의 움직임을 그대로 쫓다가 삼킬 듯 잡아챘다.
엘레나는 손이 저절로 칼립소의 목을 감았다.
애달픈 마음에 그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입 안을 훑고, 혀를 빨아들였다.
그러자 폭압적인 입맞춤은 점차 부드러워졌다. 너무 부드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었으면.’
서로의 숨결이 달콤하게 오고 갔다.
부드럽고 애달픈 입맞춤은 갈급하게 서로를 원했다.
닿고 싶은 열망이 그대로 입에서 몸으로 전달됐다.
먼저 입술을 물린 건, 칼립소였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를 올려보자, 붉은 눈이 집어삼킬 듯이 엘레나를 응시했다.
“가려면, 지금 가. 더 있으면 보내줄 자신이 없으니.”
엘레나의 발걸음이 한 걸음 물러났다.
“잘 가, 엘레나.”
잘 가라고 말하는 칼립소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나도, 고마웠소.”
하고 싶은 말이 태산같이 많았지만, 엘레나는 입을 닫았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영영 떠나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엘레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앞만 보고 걸었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촉촉한 물기가 눈에 가득해 시야를 방해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동요 없이 걸었다.
허리는 꼿꼿하게, 고개는 들고.
가이아의 황녀로서 위엄을 갖추며, 앞으로 나갔다.
* * *
가이아 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화려했다.
칼립소의 지시로 각종 귀한 보물을 잔뜩 실은 마차가 수없이 뒤따랐다.
하지만 칼립소는 엘레나가 가는 길에 끝까지 나와보지 않았다.
하루를 꼬박 달린 끝에 엘레나는 가이아 제국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가이아 제국의 황궁에 도착하자, 낯선 느낌이 들었다.
늘 꿈꿔왔던 가이아 제국이었는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언니!”
엘레나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리엘이 반갑게 뛰어나갔다.
“아리엘.”
엘레나는 아리엘을 꼭 껴안았다.
“그동안 잘 지냈니?”
“그럼요. 언니는요? 괜찮은 거예요?”
“그럼, 괜찮지. 어마마마는?”
“그게…….”
아리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마마마는, 아바마마 곁에 계셔요.”
“아바마마께서 많이 안 좋으신 거야?”
안토니안의 말을 듣고 걱정은 했지만, 이렇게 밖에도 못 나오실 정도인 줄은 몰랐다.
“네…….”
생략된 말에서 엘레나는 불안함을 느꼈다.
“며칠째 어마마마께서 곁을 지키고 계세요.”
엘레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침실 옆에서 엘레나가 기다리고 있자, 문을 열고 지친 기색의 엘리자베스가 나왔다.
“어마마마,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엘레나…….”
엘리자베스는 엘레나를 보자마자 꼭 껴안았다.
떨리는 엘리자베스의 몸이 엘레나에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울지 마세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가, 너는, 괜찮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