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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셀 수도 없이 많나 봐? 그렇게나 고고한 척을 하더니.”
“함부로 말하지 마.”
엘레나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무리 더러운 소문이 돌아도 안 믿었어. 엘레나, 너처럼 자존심이 강한 여자가 그럴 리가 없으니까.”
안토니안의 눈에 경멸이 스쳤다.
“베리우스 황제께서 위독하시니, 널 데리고 가서 하루빨리 혼인식을 올리려고 했어. 그게 황제 폐하의 마지막 소원이시자, 우리 둘이 지켜야 할 신탁의 계시니까. 그런데 이런 반응이라니 실망이야.”
“실망이란 말을 함부로 담지 마. 처음부터 양국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든 건 너야.”
“아, 드하야 즙 사건?”
안토니안이 거만하게 웃었다.
“적국의 황제를 독살하려는 게 뭐가 나빠?”
“협상을 하러 온 사람이었어. 제대로 된 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고.”
“그래서 넌 그놈을 살려준 거고?”
“……!”
“이자벨이 그러더군. 네가 그날 손가락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안토니안이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넌 고귀한 가이아의 피를 야만족에게 흘려 넣었어. 그래서 그놈을 살렸지. 가이아 제국을 망친 건 바로 너야!”
“칼립소 황제가 그때 죽었다면, 가이아 제국에 평화가 왔을까?”
엘레나는 냉정한 눈으로 안토니안을 봤다.
“아마도 가이아 제국은 더 짓밟혔겠지.”
“그건……!”
“드하야 즙으로 나를 속이더니, 이번에도 똑같은 실수를 하라는 거야?”
“그래서, 지금 안 따라가겠다고? 엘레나, 넌 선택의 여지가 없어. 너와 내가 이렇게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칼립소 황제가 용서할 것 같아?”
안토니안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드하야 즙 때랑 똑같아. 엘레나, 넌 이미 빠져나갈 수 없어.”
처음부터 안토니안의 목적은 하나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카토 공작과 긴밀히 연락했다.
어떻게든 엘레나를 데리고 가이아 제국으로 가야 했다.
그 길은 카토 공작이 책임지고 봐주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다. 엘레나를 데리고 가서 신전 앞에서 혼인식만 올린다면, 그다음엔 그녀가 어떻게 되든지 알 바가 아니었다.
‘혼인식만 올리면 네 필요는 끝이야.’
혼인식 이후에는 신탁의 계시대로 자신이 황위에 오를 수 있다.
그 후에 엘레나는 다시 케이타 제국으로 보내버리고, 데이지와 함께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었다.
“엘레나.”
안토니안은 얼굴을 바꾸어, 살살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 말싸움하고 가이아 제국으로 가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베리우스 황제 폐하가 위독하시다니까.”
안토니안이 엘레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자, 엘레나.”
“이거 놔.”
“엘레나, 강제로 데려가길 원해?”
“너 따위가?”
엘레나의 눈이 사나워졌다.
“더 이상는 못 들어주겠군.”
음산한 목소리가 통로 안을 울렸다.
안토니안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는 순간, 벽 뒤로 칼립소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이 어떻게!”
안토니안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 손, 놔”
칼립소가 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너무 놀라 나머지 안토니안의 손은 여전히 엘레나의 손을 잡은 채로 굳어있었다.
“아까부터 말귀를 못 알아듣지? 놓으라고 했을 텐데.”
칼립소가 손을 뻗으려 하자, 엘레나가 먼저 안토니안을 내동댕이쳤다.
“이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해요.”
칼립소의 눈에 감탄의 빛이 스쳤다.
“그래, 그 정도는 돼야 내 여자지.”
칼립소가 싱긋 웃자, 바닥에 나동그라진 안토니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둘이 정분이 났어, 엘레나! 부끄럽지도 않아?”
“아니, 잘못 알았어. 아직도 나 혼자 열렬히 구애하는 중이거든.”
칼립소가 안토니안의 멱살을 잡았다.
한 손에 번쩍 들린 안토니안의 다리가 허공에 동동 떴다.
“내가 너였다면, 엘레나를 이리 대우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거 놔.”
“어릴 때부터 정혼자라.”
칼립소의 눈이 질투로 번뜩였다.
“황금 같은 기회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어.”
“이거……, 놓으래두!”
안토니안이 팔을 허우적대며 바동거렸다.
“벗어나 보든가.”
암만 발버둥 쳐봐야 꿈쩍도 안 했다.
오히려 끌어당기는 힘이 더 강해져 안토니안의 목을 더욱 조여올 뿐이다.
“후회할 거야.”
칼립소가 손에 쥔 안토니안을 바짝 끌어당겼다.
“아니, 절대. 난 엘레나와의 일 말고는 평생 후회한 적이 없어.”
“내가 아무 준비 없이 여기에 왔을 줄 알아?”
안토니안의 입매가 비틀렸다.
“지금 당장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다들 나와!”
그런데 이상했다.
안토니안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조용했다.
툭.
칼립소가 안토니안을 내동댕이치듯 던졌다.
“누구를 부른 거야?”
칼립소가 묻자, 안토니안이 당황한 모습으로 신전 뒤를 마구 찾아 헤맸다.
“나오라고! 어서!”
안토니안의 절실한 외침에도 뒤는 조용했다.
“아, 혹시 히르타인들을 말하는 건가?”
안토니안이 창백한 얼굴로 돌아봤다.
“그렇게 애타게 찾으니 불러주지. 다들 나와.”
칼립소의 명에 히르타인들이 우르르 나와 칼립소의 주변에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너희들……!”
“한 번 당한 일을 또 당할 수는 없지.”
안토니안은 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카토 공작과 이상한 일을 벌였더군. 도무지 한번 말하면 알아듣지를 못해. 쯧쯧.”
칼립소가 엘레나를 돌아봤다.
“엘레나, 안토니안은 일단 감금시키겠소.”
안토니안의 표정이 흙빛으로 변했다.
“다만 안토니안은 가이아 제국 사람이니 당신에게 책임을 맡기겠소. 참고로 카토 공작은 케이타 제국의 법에 의해 처형할 예정이오.”
“알았어요.”
엘레나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 살려줘…….”
안토니안이 비굴하게 소리쳤다.
“끌고 가.”
칼립소의 명에 히르타인이 안토니안을 끌고 갔다.
올 때는 자신을 따르던 히르타인의 손바닥을 뒤집는 듯한 행동에 안토니안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히르타인이 안토니안의 팔을 양쪽에서 잡았다.
“이놈들이! 나한테 그만큼 받아먹고, 감히 배신을 해? 이거 놓지 못해?”
몇 번 발버둥 쳐봤지만, 그들의 강한 손에 이끌려 질질 끌려갔다.
안토니안이 끌려가자, 신전의 비밀공간에는 칼립소와 엘레나, 단둘만 남았다.
칼립소는 숨을 가다듬는 엘레나를 돌아봤다.
“괜찮아?”
“좀 놀라서 그래요. 그런데 안토니안이 이런 일을 꾸미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카토 공작을 추적하다가 알게 됐소.”
칼립소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그보다 오늘 들은 이야기들이 놀라웠다.
“우리가 이야기할 게 많은 것 같은데, 나가겠소?”
“그래요.”
신전을 나가는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칼립소는 밖으로 나가며 잠시 생각을 더듬었다.
* * *
며칠 전.
데릭이 급하게 칼립소를 찾았다.
“폐하.”
“무슨 일이지?”
데릭은 칼립소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왜 그러는 거야?”
칼립소는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저럴 때의 데릭은 꼭 무슨 문젯거리를 들고 오곤 했다.
“폐하, 엘레나 님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칼립소는 데릭을 차가운 시선으로 봤다.
데릭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엘레나의 일이라면 칼립소가 얼마나 민감해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기에 가능한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 역시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르엘에게서 가이아의 신녀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말해.”
칼립소는 미간을 좁히며 데릭을 내려봤다.
“가이아의 대신녀가 엘레나 님에게 ‘검은 구름을 제거하라’로 말했습니다.”
“검은 구름이라…….”
“신탁의 계시를 해석한 것에 따르면, ‘검은 구름’은 폐하를 가리킵니다. 폐하, 부디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칼립소가 무겁게 시선을 들었다.
“엘레나가 짐을 죽이기라도 한다는 거야?”
“폐하, 이건 대수롭지 않게 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확실한 것이 밝혀질 때까지 당분간 엘레나 님을 멀리하셔야 합니다.”
“데릭.”
“네, 폐하.”
“왜 우리까지 신탁의 계시에 얽매어야 하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문제의 본질을 봐.”
“네?”
데릭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칼립소를 올려봤다.
“가이아의 대신녀가 그런 말을 전했다면, 가이아 제국에서 짐을 죽이고 싶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누구를 제일 먼저 의심해야 할까?”
“그야, 당연히 엘레나 님에게 말을 전했으니 엘레나 님을 의심해야 되지 않을까요?”
“틀렸어.”
“네?”
“제일 의심 가는 쪽은 안토니안과 카토지. 이미 전력이 있잖아. 당연히 그들은 엘레나가 날 죽이려는 시도를 하는 게 좋겠지. 죽여도 좋고, 실패해도 좋을 거야. 아니 의심만 받아도 좋고.”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데릭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군요. 엘레나님이 내쳐진다면, 카토는 폐하의 신뢰를 찾을 테고, 안토니안은 황위를 얻기 쉬워질 테니까요.”
“맞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데릭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안토니안과 카토의 움직임을 살펴봐.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
“알겠습니다. 폐하. 그런데…….”
데릭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엘레나 님이 움직이시려 할 수도 있습니다. 당분간은 조심하시는 것이 어떠실까요?”
데릭의 말을 듣는 순간, 칼립소는 엘레나의 손에 죽는 상상을 해 봤다.
그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만약 그녀가 원한다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마음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데릭, 내 여자도 못 믿으면, 천하를 다스릴 자격이 없지.”
“폐하, 부디 선황제님을 생각해 좀 더 주의를 기울여주소서.”
데릭이 이마를 땅에 댔다.
칼립소의 아버지인 산체스 황제는 정부의 손에 죽었다.
“난 아버지와 달라.”
칼립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엘레나도 테미와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