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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89화 (8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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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아닌 축객령에 안토니안이 화들짝 놀랐다.

두 번째 서신은 황궁에서 엘레나에게 보내는 사적인 서신이나, 첫 번째 서신은 공식적인 문서였다.

“아니면 더 전할 말이라도 있나?”

“서신에 있는 가이아 제국과의 무역 문제나 해상 통로 문제도 함께 의논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긴밀히 드릴 말씀도 …….”

살벌한 칼립소의 눈초리에 안토니안은 말을 흐렸다.

“그건 가이아 제국에서 다음 사신을 보낼 때 의논하도록 하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앞으로 가이아 제국과의 문제는 엘레나가 처리할 거야. 하지만, 그 대상자가 자네일 수는 없잖아?”

안토니안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폐하, 전 공식적인 사신으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거야. 돌아가. 적절치 않은 사신이 왔으니.”

안토니안은 구원을 바라는 것처럼 엘레나를 봤으나, 엘레나는 그의 시선을 차갑게 외면했다.

제대로 된 대책도 없이 온 안토니안 때문에 오늘 세운 계획이 다 어그러졌다.

‘어떻게 감히 사신으로 올 생각을 했지?’

알고는 있었지만 앞뒤 재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사달이 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랬다가는 양국의 관계가 위태로워질 테니까.

냉담한 분위기에서 오직 안토니안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기……. 케이타 제국에서는 사신에게 연회도 베풀지 않습니까?”

“사신도 사신 나름이지. 우리가 함께 연회를 즐길 사이는 아니지.”

“천하를 호령하는 케이타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속이 너무 좁으신 게 아니십니까?”

끝까지 빈정대는 안토니안에게 칼립소가 엄중히 말했다.

“그랬다면 목을 쳤겠지.”

추상같은 말과 함께 붉은 눈이 번뜩였다.

“…….”

안토니안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으로 꽂히는 눈빛이 칼날 같았다.

친위대원들은 검을 잡고, 언제든지 칼립소의 명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제야 안토니안은 본인의 위치를 자각했다.

황제를 독살했던 전력이 있는 자를 저들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호기롭게 올 자리가 아니었다.

한순간 칼립소의 변덕에 따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자리였다.

“쥐 죽은 듯이 있다 돌아가. 사신으로 왔으니 목숨은 보장해 줄 테니.”

“알……겠습니다.”

안토니안은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하고 몸을 깊이 숙인 채 물러났다.

‘목숨을 보장해준다.’

이건 칼립소의 최대한의 배려였다.

이 명이 없었더라면, 안토니안은 황궁 밖을 나가기 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안토니안이 나가자, 엘레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안토니안이 올 줄은 예상 못 했어요.”

엘레나는 가이아 제국의 처신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 다만, 안토니안에게는 제대로 된 사신 대접을 해 줄 수는 없어. 이건 단지 사적인 문제만은 아니야.”

“알아요.”

그래서 엘레나는 화가 났다.

칼립소가 아니라 가이아 제국에게.

‘안토니안이 사신으로 오는 것을 저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엘레나는 침통했다.

가이아 제국을 위한 많은 제안을 준비해 왔으나, 제대로 된 협의는 해보지도 못했다.

원래라면 사신과 함께 연회도 같이 즐기면서 가이아 제국과 케이타 제국 간의 관계를 공고히 하려 했다.

이것저것 가이아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관계 진전을 위해 준비한 것도 많았다.

양국의 관계가 점차 나아진다면, 최종적으로 지난번 작성했던 불평등 협약을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안토니안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망가졌다.

“곧 정무 회의가 있을 예정이라, 회의에 참석해야 해.”

“난, 로하스관으로 돌아갈게요.”

“그래,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 다음번 사신이 올 때 제대로 된 협상을 해도 늦지 않으니.”

다정한 칼립소의 말에도 엘레나의 얼굴은 가라앉았다.

“알았어요.”

엘레나는 애써 웃으며 황궁을 나갔다.

오늘 사신을 맞이할 때, 엘레나에게는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자신이 첫 외교에 나서는 자리인 만큼 책임감도 막중했고, 자신이 이곳에서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기에 유난히 허탈했다.

안토니안은 아마 오늘 중으로 돌아갈 것이다.

안토니안이 돌아가면 다른 사신을 보낼 테니 그 때까지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는 로하스관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아몬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녀님.”

아몬이 엘레나를 보자, 바로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아몬, 무슨 일이지?”

“전에 말씀드린 신전의 구조적인 문제 말입니다.”

“그건 잘 해결되었다고 하지 않았어?”

엘레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게, 그때는 그랬는데.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가자.”

심란한 마음에 좀 눕고 싶었으나, 신전 건축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 일이 더 급했다.

엘레나는 아몬을 따라 신전 건축 현장으로 갔다.

엘레나가 로하스관에서 나서자, 제랄드 역시 뒤에서 그녀를 따랐다.

아몬은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몬, 어디가 문제라는 거야?”

“황녀님.”

아몬이 잠시 몸을 낮췄다.

“실은 아무래도 비밀통로에 문제가 생긴 거 같습니다. 그런데, 함부로 공개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몬이 엘레나의 뒤에 있는 제랄드를 흘낏 봤다.

“알았어.”

엘레나가 제랄드에게 손짓했다.

“제랄드.”

“네, 엘레나 님.”

“여기서 기다려.”

“하지만, 엘레나님. 폐하께서 빈틈없이 경호하라고 하셨습니다.”

“날 감시하라고 하신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기다려. 이곳은 함부로 공개할 수 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제랄드가 입구에 서 있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몬, 들어가자.”

“네, 황녀님.”

엘레나가 아몬의 뒤를 따랐다.

비밀 통로에 들어서자, 엘레나는 주변을 살펴봤다.

“아몬, 뭐가 문제라는 거야?”

비밀 통로에 말소리가 울리자, 한쪽 기둥 뒤에서 안토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레나.”

“안토니안?”

엘레나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안토니안을 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까는 우리가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잖아. 그래서 아몬에게 부탁했어.”

“아몬!”

엘레나는 황급히 아몬을 찾았으나, 아몬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안토니안의 말을 아몬은 거역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엘레나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안토니안을 바라봤다.

“안토니안, 왜 또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는 거야?”

“엘레나, 왜 화를 내는 거야?”

“지금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왜 쓸데없이 분쟁 거리를 만드는 거야?”

엘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잖아. 칼립소 황제가 너와 이야기할 틈을 주지 않으니.”

“됐어. 난 돌아갈게.”

“엘레나, 아직 용건은 시작도 안 했어.”

“그럼, 빨리 말해.”

안토니안이 엘레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엘레나, 내가 반갑지 않아?”

“용건이나 말해.”

“엘레나,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 너와 내가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엘레나의 성난 눈길을 느낀 안토니안은 손을 들었다.

“알았어. 엘레나, 용건부터 말할게. 일단 너를 이곳에서 빼내려고 노력하고 있어. 칼립소 황제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지금 나랑 같이 탈출하자.”

“뭐……?”

“밀입국 절차는 마련해 놨어. 뒤따라오는 이들은 히르타인들이 막을 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건 협정 위반이야. 자칫하면 전쟁까지 갈 수 있는 사안이라고.”

“그 땐, 다시 돌아가면 되잖아.”

“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도 이렇게 급하게 일을 추진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다는 거야?”

엘레나는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화를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렇게 답답한데 어떻게 안토니안과 혼인을 생각했는지 지난 날이 후회됐다.

하지만 안토니안의 다음 말에 엘레나는 경악했다.

“베리우스 황제 폐하께서 위독하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엘레나는 뜻밖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거짓말이지? 서신에도 그런 말은 없었잖아.”

“엘레나, 날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야? 떠나기 전 갑자기 생긴 일이야. 그래서 이렇게 급하게 연락을 취한 거야. 황후 폐하도 널 데려오라고 하시고.”

안토니안은 한숨을 쉬었다.

“말도 안 돼…….”

“이프테리아 병이야. 지금은 의식이 없으신 상태고.”

“……뭐라고?”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에 엘레나가 굳었다.

“그러니까 가이아 제국으로 돌아가야 해.”

엘레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혹시나 안토니안이 거짓을 전했길 바랐으나, 아무리 안토니안이라도 이런 일을 거짓으로 전할 리가 없었다.

“맹세할 수 있어?”

“엘레나, 신전에 대고 맹세해. 그러니까 함께 떠나자.”

“먼저 칼립소 황제에게 말해야 해.”

“착각하지 마, 엘레나. 그가 너를 보내줄 것 같아?”

안토니안이 비아냥댔다.

“여차하면, 내 목도 친다는 사람이야.”

“이건 사안이 달라.”

“그러다 안 보내주면?”

이전의 칼립소라면 그럴 것이다.

엘레나가 가이아 제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만 꺼내도 잡아먹을 듯 노려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왠지 아바마마가 위독하시다는 것을 알면, 저보다 더 걱정해줄 것 같은 믿음이 들었다.

“보내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그럴 사람이 아니야?”

안토니안이 입매를 비열하게 올렸다.

“엘레나, 적국의 황제가 그렇게 좋아?”

“뭐?”

“아까도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도 되는 듯이. 정부로 팔려 가더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안토니안, 말이 심하잖아.”

“내가 이 말만큼은 죽어도 안 해야지 싶었는데 도저히 궁금해서 말이야. 솔직히 말해 봐. 둘이 몇 번이나 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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