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88화 (88/100)

88

“으읏.”

그 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

엘레나의 머리에서 전율이 일어났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탁.

엘레나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엘레나의 긴장이 풀리자, 칼립소가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엘레나의 몸도 함께 박자를 탔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온 사방에 울렸댔다. 잔뜩 고조된 흥분은 끝도 없이 치고 올라갔다.

마침내 절정의 순간,

전신에 퍼지는 짜릿한 쾌감에 엘레나의 발가락이 움찔거리며 빳빳하게 굳었다.

“하아…….”

모든 것을 쏟아낸 양, 자신의 위로 푹 쓰러진 칼립소의 검은 머리카락을 엘레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쓰다듬었다.

* * *

아침이 환하게 밝았다.

엘레나는 자신의 곁에 고요하게 잠든 칼립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엘레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지난밤은 격렬했지만, 몸은 이상할 정도로 개운했다.

침실에서 내려간 엘레나는 사라타의 우리 앞에 앉았다.

기척을 냈으나, 사라타는 잠시 눈을 떴다 감았을 뿐, 한쪽 구석에서 웅크리며 일어나지도 않았다.

“사라타.”

가만히 불러봐도 사라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접시에 있는 라인멜로는 아직 입도 대지 않은 채였다.

‘고집하고는.’

천천히 살피는 엘레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사라타가 슬쩍 눈을 떴다.

금빛의 오묘한 눈동자가 시선을 마주치더니, 다시 감겼다.

“사라타, 조금만 먹어 봐.”

그릇을 들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갔지만, 사라타에게는 반응이 없었다.

꼬리를 탁 치며, 거부의 의사를 밝힐 뿐이었다.

“목마르지도 않아?”

물그릇을 앞에 둬도 사라타에겐 별 반응이 없었다.

그 때 칼립소의 팔이 엘레나의 등 뒤에서 포근하게 감쌌다.

“뭐 하고 있어?”

“먹이를 먹지 않아서요.”

“길들이기 쉽지 않다니까.”

엘레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사라타를 봤다.

“사라타는 나한테 주는 거죠?”

“그럼.”

“그럼, 내 마음대로 해도 되죠?”

“그래, 지금이라도 목도리를 만들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고.”

“그게 아니라, 풀어주고 싶어서요.”

“풀어준다고?”

칼립소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길들인다며.”

“길들여질 것 같지 않아요. 그럴 바엔 풀어주고 싶어요.”

“꼬리가 세 개 있는 사라타는 귀한 거야.”

“알아요.”

엘레나가 그녀의 손으로 칼립소의 뺨을 감싸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고맙고요.”

“하긴, 죽이지 않을 바에야 풀어주는 게 낫지. 하지만 풀어주면 다시는 가지지 못할 수도 있어.”

“그건, 각오해야죠.”

“내가 당신을 어떻게 이기겠어. 마음대로 해. 어차피 당신 거니까.”

“같이 풀어주러 갈래요?”

“그러지.”

칼립소가 우리를 번쩍 들었다.

크르릉.

사라타가 경계하듯 일어섰다.

“사라타, 널 풀어 줄 거야.”

말을 알아들었는지, 사라타는 잠시 시선을 맞추더니 다시 꼬리를 모으고 한쪽 구석에 웅크렸다.

아침의 산길은 상쾌했다.

푸르른 풀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여기쯤이면 될까요?”

엘레나의 말에 칼립소가 우리를 내려놓았다.

엘레나가 문을 열었다.

“사라타, 잘 가.”

문이 열리는 것을 봤으면서도 사라타는 선뜻 일어서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그런가 봐요.”

엘레나는 라인멜로 그릇을 우리 앞에다 뒀다.

“일단 놔두면, 제 살길을 찾아갈 거야.”

“그래요.”

엘레나는 사라타를 한 번 응시하더니, 칼립소와 팔짱을 꼈다.

산길을 한 바퀴 돌고 오자, 사라타는 우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앞에 두었던, 라인멜로가 담긴 그릇도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 * *

르엘은 거의 매일 캐서린을 찾아갔다.

명목상은 캐서린의 건강을 살핀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캐서린이 보고 싶었다.

좋은 것을 보면, 캐서린이 생각났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 캐서린에게 먹이고 싶었다.

그의 정성 덕인지 다행히 캐서린의 건강도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물론, 거기에는 대신녀의 연락이 끊긴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캐서린, 하루에 세 번, 식사 후에 먹어요.”

오늘도 르엘은 약초를 달인 물을 캐서린에게 권했다.

“르엘, 고마워요. 덕분에 이제 많이 괜찮아졌어요.”

“그럴 때일수록 더 건강에 주의해야 해요. 대신녀님은 여전히 자주 연락하시나요?”

“아니에요.”

르엘이 캐서린의 손을 다독였다.

“사실, 일전에 황녀님이 다녀가신 이후에는 연락이 없으세요. 앞으로는 정식으로 외교 사신을 통해 연락하실 거라고 하더라고요.”

“다행이네요.”

르엘이 활짝 웃었다.

대신녀의 연락이 올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기에 소식이 더 반가웠다.

“이상한 일이긴 해요. 전에 갑자기 전언이 끊겨서 조만간 또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연락이 갑자기 끊겨요?”

“네, 마지막 연락을 받았을 때, 갑자기 끊겼어요. 엘레나 님이 막 부르셨는데도요. 사실 그때 중요한 말씀을 하시고 계셨거든요.”

“…….”

르엘은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더 이상 캐서린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르엘의 속도 모르고 캐서린은 계속 말을 이었다.

“대신녀님이 검은 구름을 제거하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좀…… 무서워요.”

캐서린은 몸을 떨었다.

“검은 구름을요?”

“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황녀님은 물론 가이아 제국이 다 멸망한다고 했어요. 검은 구름은…….”

캐서린은 입술을 다물었다.

검은 구름은 케이타 제국의 황제를 가리킨다.

르엘도 침묵을 유지했다.

“저기…… 르엘?”

캐서린이 떨리는 손으로 르엘을 잡았다.

“이번 이야기도 꼭 비밀로 해줘요. 알았죠?”

“당연하죠. 캐서린. 그런데 신탁의 계시는 뭐예요?”

캐서린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건, 엘레나 님이 태어나셨을 때 받은 계시예요. 신탁의 계시는 받는 것은 정말 귀한 일이거든요. 엘레나 님과 안토니안 님이 혼인해서 안토니안 님이 황위에 오르면, 계시가 이루어지고 가이아 제국은 번영하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검은 구름은…….”

“그걸 방해하는 것이죠…….”

차마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검은 구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뻔했다.

“르엘 님. 비밀을 지켜주세요. 이 사실이 알려지면, 엘레나 님은…….”

처형당할지도 몰랐다.

캐서린은 손을 떨었다.

“르엘, 절대 말하지 말아요. 알겠죠?”

“걱정 말아요. 캐서린.”

르엘의 손은 캐서린의 손을 다정하게 감쌌지만, 푸른 눈은 뭔가를 생각하듯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아침 해가 로하스관에 찬란하게 비쳤다.

오늘은 가이아의 사신이 오는 날이다.

엘레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단장을 했다.

가이아의 드레스로 갈아입고 가이아와 협정할 서류들을 준비했다.

첫 외교적 만남에 엘레나의 가슴은 들떴다.

엘레나는 가이아의 사신이 오는 시간보다 일찍 황궁으로 입궁했다.

황궁에 도착하니, 엘레나는 내빈실로 안내됐다.

곧이어 정무 회의를 마치고 칼립소가 대신들과 함께 내빈실로 들어왔다.

“엘레나, 오늘따라 더 아름답군. 물론 평소에도 아름다웠지만.”

“처음 외교 사절을 맞는 거라 신경을 좀 썼어요.”

“이리 와.”

오만한 말투와는 다르게 칼립소는 주인을 모시는 기사처럼 정중하게 엘레나를 에스코트했다.

그런 칼립소의 태도에 대신들은 모두 예를 표했다.

“이쪽으로 앉지.”

칼립소는 자신의 바로 옆자리를 그녀에게 내주었다.

자리 배치만 보아도 칼립소가 엘레나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잘 보여주었다. 공식적인 선포는 안 했지만, 칼립소의 태도는 황후 이상이었다.

“폐하, 가이아 제국의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들라 해라.”

칼립소의 명에 따라 가이아 제국의 사신이 들어왔다.

하지만 사신의 얼굴을 본 엘레나의 얼굴은 경직됐다.

가이아 제국의 사신으로 등장한 이는 바로 안토니안이었다.

“황제 폐하, 가이아의 사신이 인사드립니다.”

제법 정중한 자세로 안토니안이 인사를 올렸다.

칼립소는 인사를 받았으나, 불쾌한 낯빛을 숨기지 않았다.

“가이아 제국의 외교도 맡고 있는 줄을 몰랐군.”

“일전에 염려를 끼친 일 때문에 사과드리고 싶어 일부러 사신으로 청했습니다.”

“염려를 끼친 일?”

칼립소의 눈썹이 휙 올라가자, 옆에 서 있던 친위대들이 경계의 자세를 갖췄다.

안토니안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부디 지난 일은 잊으시고 너그러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일단은, 알겠네.”

칼립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하자, 친위대원들도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자 안토니안도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이 자리에 반가운 얼굴이 있어서 한결 마음이 편하군요.”

안토니안은 엘레나와 시선을 맞췄다. 하지만 미소를 보내는 안토니안과 달리 엘레나의 시선은 냉랭했다.

“그럼, 가이아 제국의 서신을 전하겠습니다. 먼저 가이아 제국의 왕께서는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하고 계십니다.”

안토니안은 가이아의 황제를 ‘왕’으로 낮추어 부르며, 그간의 안부를 전했다.

“케이타 제국의 황제 폐하께 가이아의 서신을 전하겠습니다. 또한 엘레나에게 전하는 개인적인 서신도 있습니다.”

안토니안이 두 개의 서신을 내밀자, 칼립소가 받아서 보지도 않고, 엘레나에게 먼저 건넸다.

엘레나는 자신에게 온 서신을 먼저 펼쳐 읽었다.

[내 딸아, 잘 지내니? 타국에서 고생이 많구나. 일전에 서신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겠구나…….]

엘리자베스의 서신을 확인한 엘레나는 마음이 울컥했다.

떨리는 엘레나의 손을 칼립소가 잡아 주었다.

그 모습을 안토니안은 묘하게 바라봤다.

칼립소와 나란히 앉아있는 엘레나를 보면서 안토니안의 마음에는 분노가 올라왔다.

‘가증스럽게도 적국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었구나.’

안토니안은 분노의 눈길을 보내다가 칼립소의 시선에 흠칫 놀라 눈을 내렸다.

“안토니안, 서신을 전달했으면 돌아가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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