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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엘레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칼립소를 해칠 수는 없었다.
생사의 경계를 넘으면서, 칼립소의 존재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가 자신의 피를 떨어뜨렸던 순간, 절규하던 그의 모습, 따뜻하게 보살펴주던 순간 등 그 모든 순간들을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아파할 때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며 엘레나의 마음은 움직였다.
‘차라리 제1황녀가 아니었다면…….’
엘레나는 자신의 생각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엘레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가이아 제국, 나는 신탁의 계시를 받은 가이아의 제1황녀야. 그러니까 내가 돌아갈 곳은…….’
똑똑.
엘레나의 상념을 방해한 것은 비비안의 노크 소리였다.
“엘레나 님, 폐하께서 오셨어요.”
“그래?”
저도 모르게 반갑게 일어난 엘레나는 현관으로 뛰다시피 나갔다.
“엘레나.”
“연락도 없이 어떻게 왔어요?”
“이걸 보여주려고.”
칼립소가 눈짓을 하자, 시종이 금으로 된 우리를 엘레나 앞에 놓았다.
그 안에는 은빛 사라타가 누워있었다.
“은빛 사라타네요.”
엘레나는 신기한 눈빛으로 사라타를 봤다.
“예뻐요.”
엘레나가 손을 뻗어 사라타의 털을 쓰다듬으려 했다.
크르릉.
사라타가 털을 세우더니 엘레나의 손을 경계했다.
확 펼쳐진 꼬리가 반짝이며 빛났다.
“꼬리가 세 개네요.”
“털이 풍성해서 목도리로 만들면 괜찮을 거야.”
“이 예쁜 아이를 목도리로 만들라고요?”
엘레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칼립소를 봤다.
“그러라고 잡아온 건데?”
“날 위해서 잡아온 거면, 그냥 나한테 줘요.”
“뭐 하려고?”
“키워보려고요.”
“길들이기 힘들 텐데. 야생에서 자라는 종이라.”
“그래도 이렇게 예쁜 아이를 목도리로 만들 수는 없어요. 한번 해 볼게요.”
“원하는 대로.”
칼립소가 우리를 건넸다.
엘레나는 키를 낮춰 사라타와 눈을 맞추었다.
사라타의 금안은 오묘했다.
“난 널 해지치 않아.”
엘레나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사라타가 천천히 세운 털을 가지런히 했다.
“이리 와.”
하지만 엘레나의 손짓에도 사라타는 다가오지 않았다. 세 개의 꼬리를 모아 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먹을 것을 좀 줘야겠어요. 사라타는 뭘 좋아해요?”
“라인멜로를 주로 먹지.”
“아, 달콤한 걸 좋아하나 봐요. 그거라면 주방에 있을 거예요.”
엘레나의 말에 비비안이 서둘러 주방에서 라인멜로를 가져왔다.
싱싱한 라인멜로를 껍질까지 까서 대령했으나, 사라타는 잔뜩 경계를 품고 다가오지 않았다.
결국 엘레나는 라인멜로를 접시에 담아 우리 안쪽에 넣어주었다.
“며칠은 두고 봐야겠어요.”
“당신을 닮았어.”
“나를요?”
칼립소는 사라타를 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굶었거든. 배가 고파 죽겠어도, 마음을 열지 않으면 입도 안 대는 것 봐.”
굴 속에 숨은 사라타를 본 순간 엘레나가 떠올랐다.
특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고고한 모습이 엘레나와 비슷했다.
발각된 사라타에겐 굴복하려는 기색따위는 없었다. 털을 빳빳이 세우며,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이 엘레나를 연상시켰다.
그래서 그날 엘레나에게 갔는지도 모른다.
“저녁이나 같이할까?”
“그래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엘레나를 보며 칼립소는 생각했다.
‘엘레나의 마음은 열린 걸까.’
몸을 합치고 있을 때는, 꼭 자신의 품에 있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이면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게 가끔 미칠 듯 불안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엘레나와 칼립소는 정원을 거닐었다.
해가 진 정원에는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조만간 가이아 제국에서 사신이 오기로 했어.”
“그래요? 그럼, 서신에도 답신을 받을 수 있겠네요.”
자신의 안부를 알린 만큼 부모님의 안부가 궁금했다.
“이번 사신은 당신도 함께 맞겠소?”
“정말이요?”
“더이상 가이아 제국과의 접촉을 막지 않는다고 했잖아.”
칼립소가 지그시 엘레나를 바라봤다.
“앞으로 가이아 제국과의 외교는 당신이 주도해주었으면 해.”
“고마워요.”
“말로만?”
칼립소의 입술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볼에 닿았다가 귓불을 살짝 물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참고로 오늘도 보름은 아니야.”
살짝 어둠이 내린 하늘에는 하얀 반달이 떠 있었다.
“보름 아닌 날에 함께 밤을 보내는 게 훨씬 마음에 들어.”
“날들이 더 많아서요?”
“당연하지.”
칼립소의 눈이 붉은 노을처럼 타올랐다.
“이만, 들어갈까?”
“좋아요.”
어둑하게 내리는 길을 칼립소와 함께 걸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침실 앞에서 엘레나가 멈췄다.
“먼저 씻을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칼립소가 엘레나의 어깨를 잡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
단호한 말에 칼립소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정 그렇다면, 오늘은 내가 당신의 시중을 들어주지.”
“사양하겠어요.”
“사양하지 마십시오, 황녀 전하.”
칼립소가 정중하게 말하며,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녀’라는 말에 엘레나의 몸이 살짝 긴장했다.
칼립소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 후, 기사처럼 그녀를 안았다.
“잘 모시겠습니다. 전하. 믿고 맡겨 주십시오.”
욕실 의자에 엘레나를 앉혀놓고 칼립소는 매듭을 푸는데 온 정성을 쏟았다.
“가이아의 드레스는 매듭이 많아.”
“시종은 감히 불평하지 않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전하.”
칼립소는 하나하나 정성껏 매듭을 풀었다.
평소 성정 같으면, 이렇게 시간이 걸리면 찢을 법도 하지만, 칼립소는 커다란 손으로 제법 세심하게 매듭을 풀었다.
이내 목선에 있는 매듭이 풀리면서 달처럼 흰 등이 드러났다.
“내가 좋아하는 곳이군.”
칼립소가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달콤한 향이 진동했다.
어느새 드레스는 욕실 바닥에 떨어졌다.
칼립소는 섬세한 손길로 거품을 내어 그녀의 등 선을 어루만졌다.
“간지러워요.”
엘레나가 몸을 움츠렸다.
“안 돼. 여기도 씻어야 하는걸.”
씻는 것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찰박찰박하던 물이 사방으로 튀자, 칼립소가 몸을 일으켰다.
“나도 벗는 게 좋겠어.”
칼립소의 튜닉이 물에 젖어 근육선이 드러났다.
걸친 옷을 한 번에 벗어낸 칼립소가 욕탕에 함께 들어갔다.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면서 이미 아래에는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였다.
칼립소는 엘레나를 뒤로 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타월 대신 촘촘히 다가가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며, 어깨선으로 향했다.
잘게 입을 맞추며, 물기도 하면서 붉은 흔적을 새겼다.
“내일이면 이 흔적도 없어질 테지.”
아무리 정성껏 자국을 남겨도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아서 좋다가도,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에 불만을 느꼈다.
칼립소의 입술이 등에서 물러졌다.
더 뜨거운 게 필요했다.
칼립소는 엘레나의 고개를 돌려 입술을 빨고 깊숙이 혀를 넣었다.
목욕의 영향인 듯, 그녀의 입 안도 평소보다 뜨거웠다.
격렬하게 서로의 혀가 얽히자, 그녀는 다리 사이에도 열기가 피어올랐다.
왠지 간지러운 느낌에 다리를 꼬자, 물이 가볍게 출렁였다.
“이런.”
파동을 느낀 칼립소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손을 넣었다.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하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은 건드리지 않고 주변을 뱅뱅 돌았다.
“칼…….”
엘레나가 몸을 뒤틀며 자세를 돌렸다.
애가 타는 감각이 더한 자극을 원했다.
“이젠, 내가 해 줄게요.”
첨벙.
욕실의 물이 크게 출렁댔다.
“으.”
칼립소의 신음이 욕실 가득 울렸다.
“엘레나, 침실로 가자.”
칼립소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여기는 좁아.”
촤르륵.
칼립소가 엘레나를 번쩍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뚝뚝.
물이 떨어지는 몸을 칼립소가 커다란 타월로 닦았다.
그리고는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 깊게 입을 맞췄다.
둘은 잠시라도 서로 떨어진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아직 덜 마른 몸이지만, 금세 서로가 다시 얽혔다.
큰 손이 엘레나의 가는 허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느리게 움직이는 만큼 감각은 더 선명했다.
입술이 아래로 내려오자, 엘레나의 양팔이 어깨에 걸쳐졌다.
쾌감으로 흐려진 보랏빛 눈이 칼립소의 뒤를 봤다. 반쪽짜리 달이 하늘에 걸렸다.
칼립소의 손이 움직이고, 쾌락으로 정신이 마비되는 와중에 반달이 구름에 잠기기 시작했다.
쾌락이 착실하게 쌓일수록 달이 구름에 더 잠기고 만다.
“안돼…….”
“쉬이……. 괜찮아.”
칼립소의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젠장.’
미치도록 좋았다.
칼립소는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날 봐.”
엘레나의 시선이 자신을 피하자, 가끔 느끼던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은 함께 몸을 겹치는 동안에는 사라졌었는데, 오늘은 함께 몸을 섞는 동안에도 불안함이 심해졌다.
마치 이대로 엘레나가 사라질 것 같은 기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칼립소는 잔뜩 흥분된 얼굴로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놓칠 수 없어.’
칼립소의 움직임에 따라, 숨넘어갈 듯 교성을 지르면서도, 엘레나의 눈빛은 칼립소를 향하지 않았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칼립소는 엘레나의 시선을 차지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엘레나, 날 보래도.”
그제야 엘레나의 눈이 칼립소와 마주쳤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엘레나의 시선을 차단했다.
「검은 구름을 제거하세요.」
엘레나가 두 팔을 뻗어 칼립소의 목을 감쌌다.
“그래, 날 보라고.”
엘레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