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84화 (8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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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슨 이유예요?”

“함께 밤을 보내면, 다시 치유력이 내게 오는 건 아니야?”

“아…….”

엘레나의 마음속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날, 걱정한 거였구나.

엘레나는 다정한 눈빛으로 칼립소와 시선을 맞췄다.

“그건 아니에요. 함께 잔다고 치유력이 다시 가진 않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보름도 아니잖아요.”

애초에 옮겨간 것은 ‘피’ 때문이었으니, 이것은 ‘피의 언약’에 관한 문제였다.

신탁의 계시를 모르는 칼립소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가이아인이 아닌 칼립소에게 신탁의 계시에 대해 말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칼립소는 엘레나가 먼저 피를 주었다는 것을 몰랐다.

“어떻게 확신하지?”

“그냥…… 알아요.”

“그냥?”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 칼립소를 보면서 엘레나는 무언가 그가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한 것을 느꼈다.

“처음 치유력이 당신에게 간 건 함께 밤을 보내서가 아니었잖아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 함께 자야 된다고 했잖소. 그러면…… 반대의 가능성도 있는 거 아닌가?”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조금 더 설명하면, 신탁의 계시에 관련된 거예요.”

“신탁의 계시?”

“자세한 건 이야기할 수 없어요. 가이아 황족 일가가 아닌 자에게는 계시의 내용에 대해 말할 수가 없거든요.”

“……안토니안은 알겠지?”

“정혼자니까 당연히 알지요.”

칼립소의 입술이 불퉁하게 나왔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일찍 올 거예요?”

칼립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 그게 왜 굳이 오늘 밤이어야 하지?”

“그야……. 당연히.”

칼립소가 순식간에 눈앞에 왔다.

“더이상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입술을 내리는 칼립소를 보며 엘레나가 다급히 말했다.

“여, 여기서요?”

그 말은 칼립소의 입 안으로 그대로 삼켜졌다.

뜨거운 엘레나의 안에서 칼립소는 전율했다.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

어젯밤, 살짝 맛본 입술은 더한 갈증을 불러일으켰고, 엘레나의 제안은 간신히 막아놨던 둑을 무너뜨렸다.

“하학.”

엘레나의 호흡이 벅차도록 칼립소는 갈급하게 그녀의 안을 탐했다.

아무리 맛봐도 부족했다.

“아직도 안 돼?”

잠시 입술을 물리다가 잘게 입을 맞추며, 칼립소가 물었다.

‘진짜, 여기서?’

열기에 취해있던 엘레나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환한 대낮이었다.

늦은 아침 후, 시중을 들러 시종들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멍해진 눈으로, 옷자락을 헤치고 들어오는 칼립소의 손을 봤다.

“침실로 들어가서…….”

“걱정 마, 거기서도 할 거야.”

“여기선 시종들이 볼 수도 있잖아요.”

“감히? 누가.”

허벅지 사이로 칼립소의 손이 파고들었다.

동시에 더욱 깊게 입을 맞췄다.

엘레나의 몸도 함께 달아올랐다.

정말 상관없을까.

아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칼…….”

엘레나가 울림 가득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짜릿한 전율이 칼립소의 등줄기를 스쳤다.

동시에 딱딱해진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집중할 수가 없어요.”

“그래?.”

“그러니까, 들어가서 해요. 느긋하게.”

달콤한 엘레나의 말에 칼립소의 입가가 쓱 올라갔다.

느긋하게.

이 말이 상당히 마음에 든 칼립소는 엘레나는 번쩍 안았다.

성큼성큼 급한 발걸음으로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뛰어가지 않은 것은 마지막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랄까.

문이 닫히고, 침실 안에는 둘만 남았다.

매일 밤 그녀를 보면서 욕망했지만, 삼켜야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칼립소는 시트 위로 엘레나를 눕혔다.

“이 순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칼립소의 손이 매듭을 풀었다.

마침 오늘 엘레나는 샤오르를 입었다.

“옷 선택이 좋네.”

“왠지 끌리더라고요.”

매듭 하나에 옷이 풀어졌다.

순식간에 도자기 같은 하얀 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너무 신기해.”

칼립소가 하얀 살결에 입을 맞추었다.

“어떻게 이렇게 흔적이 하나도 안 남았지?”

“치유력을 찾았으니까요.”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았다.

상처 자국에서 샘솟던 피가 아직도 생생했다.

매듭을 한 번 더 풀자, 스르르 옷 전체가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이곳에.”

칼립소의 입술이 엘레나의 배에 닿았다.

칼자국처럼 길게 칼립소의 혀가 스쳐 갔다.

“피가 엄청 났었는데.”

지금도 생생하다.

피가 공포로 다가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간 입술이 피를 빨아내듯 강하게 흡입했다.

“아흣.”

그렇게 칼립소의 입술과 손이 엘레나의 몸을 은근하게 연주하자, 서서히 본능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천천히 시작된 연주는 강해졌다, 다시 부드러워졌다.

칼립소의 연주에 맞춰 엘레나의 허리가 작게 들렸다가 다시 떨어졌다.

연주는 점점 격렬해졌다.

젖은 호흡이 침실 안을 가득 채우자, 넘치는 감각에 엘레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이제……. 그냥…….”

“느긋하게 즐기자며.”

여유 있는 척했지만, 칼립소의 상태도 만만치 않았다.

아래가 이제는 뻐근하다 못해 딱딱할 정도였다.

“칼.”

엘레나의 손이 칼립소의 단단한 어깨에 닿다가 미끄러졌다.

떨어진 손 대신 칼립소가 엘레나의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게 했다.

“꽉 잡아.”

칼립소의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쾌락으로 흐려진 엘레나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조금만 더. 엘레나, 같이 가.”

박자에 맞춰 움직이자, 쾌감이 착실히 쌓여 눈앞에서 춤을 추었다.

보랏빛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고, 칼립소의 허리가 움직여질 때마다 은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칼.”

칼립소의 등 근육이 바짝 수축했다.

뇌를 강타하는 강렬한 쾌감에 둘은 동시에 전율했다.

완벽한 합일.

마치 하나가 된 양 둘은 서로를 꼭 안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 * *

캐서린은 요즘 몸이 예전과 달라짐을 느꼈다.

너무 자주 피곤했다.

어제도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었고, 오늘도 그랬다.

엘레나의 발길이 끊긴 지도 오래였다.

그에 비해 대신녀의 전언은 잦았다. 대신녀의 전언을 받는 일 또한 체력소모가 많은 일이었다.

“으”

캐서린은 몸을 웅크렸다.

배 속에 뭉친 기가 부르르 떨리면서 열로 들어찼다.

대신녀의 호출이 시작된 것이다.

캐서린은 힘들게 몸을 일으켜 손바닥을 펼쳤다.

손바닥 위에 구슬이 나타남과 동시에 캐서린의 이마에 땀이 배어 나왔다.

-캐서린.

“대신녀님.”

-황녀님의 소식은 아직이시냐?

대신녀는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레나를 둘러쌌던 검은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네, 죄송합니다.”

기가 흐트러져 캐서린의 거울이 희미해져 갔다.

-캐서린! 정신 차려!

대신녀의 외침에 깜짝 놀란 캐서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신녀님……. 아무래도 이렇게 자주 연락하는 것은 힘듭니다. 황녀님이 오시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뚝.

캐서린은 자신쪽에서 먼저 대신녀와의 연락을 끊었다.

그러자, 구슬의 기운이 흐트러지고 고통이 잠잠해졌다.

캐서린은 침대에 다시 누웠다.

대신녀님의 연락을 멋대로 끊었으니, 나중에 돌아가면 혼나겠지.

하지만, 별 필요도 없는 연락을 왜 이렇게 많이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단전에서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마 화가 난 대신녀가 끊임없이 연락을 해오고 있는 탓이다.

그걸 알면서도 캐서린은 연락을 외면했다.

‘제발, 나를 그냥 둬.’

자신을 괴롭힌다고 황녀님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캐서린 님. 캐서린 님?

르엘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있는 캐서린을 본 르엘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날이 갈수록 캐서린은 쇠약해져 갔다.

“캐서린. 이것 좀 먹어봐요.”

“좀, 나중에요.”

“그렇게 자꾸 음식을 먹지 않으면 더 힘이 없어요. 나를 봐서라도 조금만 들어요.”

르엘이 간절히 말했다.

지난번, 캐서린에게 ‘세 번의 밤’에 대해 듣고, 형에게 말한 이후, 르엘은 캐서린에게 죄책감과 함께 사랑의 감정이 더 깊어졌다.

그 사건 이후에 엘레나도 이곳에 출입을 하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대신녀의 닦달을 받는 것 같았다.

캐서린은 르엘이 가져온 수프를 한 숟가락 들었다.

“맛있네요.”

르엘에게 있어서 캐서린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한 편의 소설 같았다. 어릴 때부터 일을 시작한 캐서린은 지금도 집안을 이끌고 있었다. 신녀가 된 것부터 가족을 위해서였고, 지금도 가족을 위하는 마음이 유별났다.

반면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고생이라고는 하나도 모르게 살아왔지만, 늘 형과 비교되어 가족들에게 불평불만을 해왔다.

그런 르엘에게 캐서린은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좀 더 먹어요.”

“속에서 받지 않아요.”

“대신녀님이 계속 연락을 하시나요?”

“네.”

캐서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곳에 와서 황녀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접촉할 수 없었다.

원래 활발한 성격이기에 고립된 상황이 더욱 괴로웠다. 더구나 체력도 엉망이 된 지금은 바깥출입은 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르엘이 고마웠고, 점점 연모의 감정으로 발전했다.

르엘과는 속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는 사이까지 되었다.

답답함은 해소되었지만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엘레나의 방문이 끊긴 시점부터 하나의 불안으로 자리 잡았다.

‘설마, 누군가에게 말한 건 아니겠지?’

르엘과 이야기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져서 생각보다 많은 말을 하게 됐다.

“엘레나 님은 언제 오실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기, 혹시…….”

“왜요?”

“……다른 이에게 제가 말한 것을 전한 건 아니죠?”

“캐서린 님!”

르엘은 보기 드물게 화를 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섭섭합니다!”

“아, 아니에요.”

캐서린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 뜻은 절대 아니에요. 그냥 요사이 몸도 좋지 않고, 엘레나 님도 통 오시지 못하셔셔 걱정이 돼서요.”

대신녀님이 자주 연락을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캐서린의 말에 르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엘레나 님이 못 오시는 이유는……. 큰 부상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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