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83화 (83/100)

83

케이타 제국은 근래에 드물게 평화로웠다.

칼립소가 이렇게 전쟁을 쉰 적은 없었다.

덕분에 케이타 제국에는 평화가 계속되었고, 문화 개방 정책에 따라, 문화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지만, 칼립소의 심기는 그렇게 편치 않았다.

엘레나의 회복이 끝났다.

베르나르 의원도 더이상 치료할 것이 없으니, 이제 평상시 생활을 하면 된다고 했다.

단 하나, 이상한 건 엘레나였다.

몸이 회복되었으니, 당연히 로하스관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엘레나는 계속 황궁에 머물렀다.

엘레나가 황궁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매일 밤, 엘레나는 칼립소와 함께 자기를 원했다.

「폐하랑 자면 잠이 잘 와요.」

엘레나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자, 칼립소는 다른 생각으로 난감해졌다.

엘레나가 사경을 헤멜 때는 분명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엘레나를 살려주소서.

살려만 주신다면, 다시는 엘레나를 탐하지 않겠습니다.

세 번의 밤의 족쇄가 아니었거든 보름에 그렇게 어긋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이제 치유력도 제자리를 찾았으니 다시는 그런 위험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엘레나의 몸이 낫자, 점점 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말캉한 몸이 자신의 품을 파고들 때면, 이전처럼 토닥이며 재워주기가 힘들었다.

‘안 돼.’

만약, 또다시 그녀와 자게 되고, 치유력을 뺏는 일이 생긴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를 잃을 위기는 한 번이면 족했다.

때문에 오늘도 칼립소는 밤늦게까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았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업무처리 속도에 데릭만 신이 났다.

답답한 칼립소의 속도 모른 채 데릭은 한 무더기의 일감을 칼립소에게 넘겨주었다.

오늘도 자정에 가깝게 일을 마치고 칼립소는 침실로 들어갔다.

자고 있는 엘레나를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하루의 피로를 녹여줄 만큼.

칼립소는 머리맡 창가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싸여 곤히 잠든 엘레나의 얼굴을 봤다.

은은한 달빛에 은색의 머리카락이 빛났다.

그동안 열심히 먹이고, 재운 보람으로 뺨에는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한참을 바라보던 칼립소는 붉은 입술에서 시선을 멈췄다.

저 안이 얼마나 달콤한지 칼립소는 알고 있었다.

‘살짝만 대어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시작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과 그 정도는 괜찮지 않냐는 마음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으.’

결국 본능이 이겼다.

엘레나가 깊게 잠들었다는 점. 그동안 많이 참은 자신에게 이 정도는 허락해도 되었다는 점. 굿나잇 키스 정도는 친척 사이에도 하는 인사라는 점. 그리고 이후는 절대로 탐하지 않겠다는 다짐 등등.

칼립소의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말캉한 입술이 칼립소의 입술에 스쳤다.

미치겠다.

조금만 더.

달콤한 물을 맛본 입술은 쉽게 물러서질 못했다.

욕심이 결국 앞섰다.

칼립소는 혀끝을 내어 엘레나의 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스쳤다.

‘아…….’

어린 새가 어미 새가 주는 먹이를 찾듯, 칼립소가 엘레나의 입술을 빨았다.

칼립소의 머리 조그마한 구석에는 이것은 이미 굿나잇 키스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거센 본능은 이성을 압도했다.

한 번 터진 욕망의 둑은 쉽게 자제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흐음…….”

엘레나의 손이 무언가를 찾는 듯 들렸다.

화들짝 놀란 칼립소는 서둘러 침대 곁을 한 걸음 물러났다.

몇 번 허공을 헤맨 엘레나의 팔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색색.

다행히, 아직 깨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정신을 차린 칼립소는 몇 번 얼굴을 문지른 후에 목욕실로 갔다.

찬물을 뒤집어써도 아래의 욕망은 쉽게 죽지 않았다.

칼립소는 본능적으로 아래를 쓱 문질렀다.

얼마 만에 하는 위로인 줄 모른다.

문지르자마자, 절정은 급하게 왔다.

‘엘레나.’

한차례의 쾌락을 맛본 후, 칼립소는 다시 세차게 찬물을 뒤집어썼다.

‘휴우.’

간단한 접촉도 안 되는구나.

칼립소는 또 다른 절망에 휩싸였다.

* * *

아침에 일어난 엘레나는 허전한 얼굴로 옆자리를 봤다.

‘없다.’

언제부터인가 칼립소는 그녀와 함께 자지 않았다.

엘레나는 살짝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착각인가.’

말캉한 입술이 살짝 젖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밤새 꾼 꿈을 떠올렸다.

난잡하게 뒹굴던 몸이 눈앞에 스쳐 갔다.

‘미쳤나 봐.’

엘레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내 마음을 진정시킨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레나 님, 일어나셨어요?”

엘레나가 침실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본 비비안이 반갑게 다가왔다.

“폐하는 어디 계시지?”

“집무실에 계세요.”

“그래.”

엘레나는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두드리고 집무실 문을 열자, 책상에 엎드린 칼립소가 보였다.

‘여기서 잔 건가?’

엘레나는 칼립소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칼립소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엘레나.”

“밤새 여기서 일한 거예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이것저것 챙길 것도 있고.”

칼립소의 눈이 방황했다.

“지금이라도 침실에 가서 편히 잘래요?”

“아니야, 이제 깼어.”

“아침은 아직 안 먹었죠?”

“그렇지.”

“같이 할래요?”

그제야 칼립소가 눈을 들어 엘레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지.”

칼립소가 먼저 앞으로 나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플 때는 칼립소가 옆에서 간호도 해주며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몸이 회복되고 나서는 오히려 함께 있는 일이 적었다.

황제의 업무가 바쁜 것은 당연히 이해하는 일이지만, 왠지 칼립소가 자신을 피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식사를 같이하는 거 같아요.”

칼립소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너무 늦게 자는 거 아니에요? 어젯밤에도 새벽에야 잠깐 들어온 거 같던데…….”

엘레나가 말을 흐리자, 칼립소의 나이프가 잠시 멈췄다.

“깼, 었어?”

“잠결이라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금방 나갔어요?”

“요사이 일이 많아서.”

칼립소가 시선을 피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참, 이제 로하스관으로 돌아가도 좋소.”

“그렇지 않아도 돌아갈 생각이에요.”

“언제?”

자신이 돌아가라고 말했으면서도 칼립소는 못마땅한 기운을 숨기지 못했다.

“내일은 돌아가려고요.”

“……그래.”

칼립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 때는 호위대가 함께 갈 거야.”

엘레나가 다칠 때부터 생각했던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황실에 있었으니 굳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로하스관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호위대는 필요 없어요.”

엘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내 몸 하나는 내가 방어할 수 있어요. 이제 치유력도 회복했으니까 더욱 그렇고요.”

“당신 실력을 의심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감시하기 위해서 그러는 건 더더욱 아니고. 단지 또 다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야.”

칼립소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엘레나가 아무리 거부한다고 해도 호위대 건은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또다시 그런 위기가 닥치는 일만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으니까.

“그럼, 부탁이 있어요.”

“뭔데?”

“가이아 제국과 연락을 할 수 있게 해 줘요.”

안토니안이 보내온 전언이 마음에 걸렸다.

지난번에는 돌려보냈다지만, 한 번 이런 식으로 온 연락이 또 다른 형태로 올 수 있다.

그 때도 외면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그러기 전에 칼립소가 허락해 주길 바랐다.

칼립소의 눈이 엘레나의 얼굴에 한참동안 머물렀다.

“그러도록 해.”

“정말이에요?”

“당신을 믿으니까.”

“신뢰에 보답할게요. 케이타 제국에 해가 되는 행동은 안 해요.”

엘레나는 활짝 웃었다.

당장 내일에는 카트리전부터 가 볼 생각이었다.

엘레나가 웃으며 식사를 하는 모습을 칼립소는 물끄러미 지켜봤다.

‘내일은 떠나는구나.’

로하스관으로 간다고 못 보는 것도 아닌데 마음 한구석이 서운했다.

게다가 자신이 먼저 제안했으면서도 그랬다.

또다시 모순적인 생각에 칼립소는 힘없이 웃었다.

칼립소가 픽 웃으며 빵을 뜯는 모습을 엘레나가 바라봤다.

‘간다고 하니 속이 시원한가 봐.’

그런 게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엘레나는 괜히 삐뚤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 칼립소는 지나치게 신사적이었다.

이대로는 아쉬웠다. 상당히.

“그럼, 오늘이 마지막 밤인데……. 오늘도 일이 늦게 끝나요?”

“아마도.”

찻잔을 든 바람에 칼립소의 표정이 가려졌다.

“아쉽네요. 마지막 밤은 함께 보내고 싶었는데.”

찻잔을 든 채 칼립소의 동작이 멈췄다.

찻잔 위로 붉은 눈이 기묘하게 일렁였다.

탁.

찻잔이 다소 거칠게 놓여졌다.

“내가, 자신이 없어.”

“무슨…… 자신이요?”

“그냥 재워주기만은 못할 거 같다고.”

갑자기 엘레나가 소녀같이 웃었다.

“왜 웃지?”

칼립소가 험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딴에는 진지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는데 비웃다니.

“자……, 잠깐만요.”

한참을 웃던 엘레나가 겨우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칼립소를 봤다.

“그건 나도 자신 없어요.”

“뭐?”

“같이 밤을 보내자고 했잖아요.”

“하지만…….”

칼립소가 말을 삼켰다.

“몸은 다 나았어요.”

“그건 알아. 아픈 사람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바닥은 아니니까.”

“생각을…… 하긴 했어요?”

멋쩍어진 칼립소는 찻잔을 벌컥 들이켰다.

뜨거운 차에 입천장을 델 뻔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동그랗게 뜬 보랏빛 눈동자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웃음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난 또 당신이 나한테 흥미가 없어졌나 했지요.”

“그럴 리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칼립소가 일축했다.

“그동안 자제한 이유는 그런 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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