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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제대로 말하지 못할까?”
“아까 마차가 왔습니다. 황궁으로 오라는 전언을 받으시고, 비비안과 함께 떠나셨어요.”
칼립소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말도 안 돼.’
불길한 예감이 머리에 스쳤다.
요하스 자작 쪽이 수상하다고 여겼으나, 이런 어리석은 일을 벌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어느 방향으로 떠났지?”
“그, 그게…… 황, 궁으로. 그러니까 저 쪽이요.”
한시가 급했다.
칼립소는 말을 힘껏 달렸다.
아까 보았던 이브뱀이 떠올랐다.
‘만약 히르타인까지 불러들인 거라면?’
칼립소는 황급히 친위대를 불러 모았다.
긴급 병력을 투입하여 로하스관 주변을 모조리 뒤졌다.
‘진작에 엘레나 주변에 호위대를 붙여놓는 건데.’
뒤늦은 후회는 소용없었다.
친위대에 있는 사냥개들을 풀어 엘레나의 옷가지를 가지고, 근처 산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찾지 못한 채 어느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대로 못 찾는다면?’
심장이 툭 떨어졌다.
컹컹컹,
사냥개가 사납게 짖는 소리를 들으며, 칼립소는 마구 뛰었다.
몇 몇의 히르타인들이 붙잡힌 것이다.
“폐하, 여기로 오십시오!”
친위대의 부름에 칼립소가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럴 수가…….’
칼립소는 눈앞의 광경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엘레나가 쓰러져 있고, 하얀 드레스는 피로 범벅되어 있었다.
“엘레나. 엘레나!”
서둘러 맥박을 확인해보니 다행히 숨이 붙어 있었다.
“먼저 궁으로 가서 베르나르에게 대기하라고 일러.”
친위대원을 먼저 궁으로 보낸 후, 칼립소는 살벌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노한 칼립소의 몸은 한 마리의 맹수였다.
칼립소의 검은 눈에 보이는 대로 히르타인들을 가차 없이 베었다.
피를 뒤집어쓴 칼립소의 모습은 전쟁의 신이라 불리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칼립소는 그중 우두머리인 요타의 목 끝에 칼을 겨눴다.
“이놈만 살려 둬.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니.”
대원들에게 뒷일을 맡긴 채, 칼립소는 엘레나를 안고 정신없이 말을 달렸다.
‘제발…….’
아직 몸의 온기가 느껴졌다.
미세하지만 숨소리도 느껴졌다.
칼립소가 엘레나와 함께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환하게 밝은 후였다.
칼립소는 엘레나를 안아 들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계속해서 피가 배어나오는지 안고 있는 칼립소의 팔에도 따뜻한 피가 묻었다.
“베르나르!”
다급한 칼립소의 음성에 대기하고 있던 베르나르 의원이 당장 달려왔다.
“어떻게든 살려내, 안 그럼 네가 죽을 거야.”
무시무시한 말에 베르나르는 엘레나의 몸을 차례로 살폈다.
하얀 드레스에 번진 핏자국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팔에 스친 칼자국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복부의 자상이었다.
베르나르는 떨리는 손으로 침상에 눕힌 엘레나의 드레스를 칼로 찢었다.
상처 부위를 소독하자, 벌컥 나오는 피를 베르나르가 다시 동여맸다.
“어때?”
“상처가…… 심하십니다.”
“상처가 심한 건 이미 알아. 살려내라고!”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 가지고는 안 돼. 무조건 결과를 만들어 내.”
칼립소의 말은 살기를 띠었다.
베르나르는 그 때부터 온갖 약을 엘레나의 몸에 퍼부었다.
하지만 출혈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어때?”
“지……혈이 잘 되지 않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이대로는…….”
베르나르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이대로면 가망이 없었다.
베르나르는 죽음을 감지했다.
무거운 분위기를 눈치챈 칼립소는 심각한 표정으로 엘레나의 상태를 지켜봤다.
‘제발, 엘레나…….’
엘레나의 얼굴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푸를 정도로 하얀색을 띠었다.
좀처럼 지혈이 안 되는 통에 엘레나의 몸에서 점점 피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칼립소는 떨리는 손으로 엘레나를 얼굴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쓸데없이 사냥에 가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에 엘레나에게 치유력만이라도 있었다면.
칼립소는 후회로 자신의 심장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칼립소의 떨리는 손이 입술에 닿았을 때, 엘레나가 가느다란 숨을 내뱉었다.
“카, 칼.”
“엘레나! 정신이 들어?”
“……나…….”
“엘레나!”
엘레나는 숨이 찬 지 겨우 말을 이었다.
“……나, 당신이…… 불러서 간 거예요.”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괜찮은 거야? 정신이 들어?”
칼립소가 엘레나의 손을 잡았다.
“가이아의…… 전언을 받은 게 아니라…….”
엘레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칼립소를 봤다.
“보름이라…….”
빌어먹을.
칼립소는 자신이 또 한 번 원망스러웠다.
“힘들게 말하지 마. 엘레나, 되도록 힘을 아껴야 해.”
“칼…….”
칼립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기…… 기다렸……어요.”
“알아.”
안다고.
칼립소는 목이 메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이 자꾸 엘레나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칼립소는 불안함으로 심장이 조여왔다.
말을 할 때마다 엘레나의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엘레나, 제발…… 힘을 아껴. 나중에, 당신이 나으면 무슨 말이든 들어줄게. 그러니 제발…….”
“…….”
엘레나의 손이 칼립소의 얼굴에 닿았다.
그러다 툭. 엘레나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칼립소는 놀라서 베르나르 의원의 얼굴을 보았다.
침통한 표정의 의원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엘레나!”
칼립소가 엘레나의 어깨를 흔들었다.
칼립소의 힘에 따라 휘청이는 어깨에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엘레나에게 달려들었다.
“엘레나! 정신 차려!”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절대, 안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거세게 흔들어도 엘레나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베르나르,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뭐든지 해봐야 할 거 아니야!”
칼립소의 노성에도 베르나르는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칼립소는 사나운 기세로 엘레나를 흔들었다.
“엘레나, 당신이 눈을 뜨지 않으면 가이아 제국과 전쟁을 할 거야. 아무것도 안 남기고 싹 부셔버릴 거야. 완전히 망가뜨릴 거라고.”
칼립소는 저주를 퍼붓듯 절규했다.
“그러니, 망할. 눈을 뜨라고.”
붉은 눈에 광기를 띤 칼립소를 보며 데릭은 후회했다.
지금 폐하는 제정신이 아니다.
엘레나 님이 죽고 난 이후의 폐하를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엘레나 님을 보호할걸.’
정부로 취급하고 버리는 존재로 만들기에는 칼립소에게 엘레나의 존재는 너무 컸다.
차라리 인정하고, 곁에 두시게 하고 제 사람으로 만들게 했어야 했다.
어떤 쪽이든 노리는 곳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어야 했다.
“엘레나! 눈을 떠!”
칼립소의 절규에도 축 늘어진 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참을 울부짖던 칼립소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뒤늦은 후회였다.
고작, 밤을 보내지 못할까 봐. 함께 있지 못할까 봐.
엘레나에게 가지 않았다.
그 벌로 그녀를 영원히 잃는 건가.
칼립소의 등줄기에는 섬뜩한 식은땀이 흘렀다.
‘치유력만 있었더라도…….’
이 몸의 피를 전부 뽑아내 그녀에게 줄 수만 있다면.
그러다 칼립소가 무언가 깨달은 듯 멈췄다.
“검을 가져와.”
데릭은 차마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다.
폐하는 제정신이 아니시다.
이대로 목숨을 끊는 것은……. 아니면 베르나르를 처형하시려고?
앞에 있던 베르나르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었다.
“폐하!”
“황제 폐하, 고정하소서!”
좌중의 모두가 엎드려 간곡히 읍소했다.
데릭이 선뜻 움직이지 않자, 칼립소가 직접 친위대의 대장에게 다가가 검을 빼 들었다.
칼립소가 검을 높게 치켜들자, 모두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칼립소의 검이 향한 곳은 자기 자신이었다.
“으악!”
옆에 놀란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칼립소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들고 엘레나에게로 갔다.
“입술을 벌려.”
베르나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 칼립소는 남은 한 손으로 엘레나의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피가 흐르는 자신의 팔을 입술에 대었다.
뚝뚝.
“폐하, 이런 방법은…….”
“닥쳐!”
살기 어린 칼립소의 명에 베르나르 의원은 입을 다물었다.
뚝. 뚝.
칼립소의 팔에서는 붉은 선혈이 계속 흘렀다.
“일어나. 엘레나, 제발.”
경건한 의식을 행하는 것 같아 좌중은 쥐죽은 듯 지켜만 봤다.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칼립소의 간절한 바람이 통한 걸까.
엘레나의 입술이 미약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레나!”
쿨럭.
엘레나가 입술 사이로 숨을 토했다.
엘레나! 정신이 들어?”
놀란 칼립소가 엘레나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분명 숨이 흘러나왔다.
“베르나르, 천을 가져와.”
하얀 천을 가져오자, 칼립소는 엘레나의 입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피를 그릇에 담아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분명 변화가 있었다.
밤새도록 칼립소는 엘레나의 곁을 지키며, 그녀가 숨을 내쉴 때마다 조금씩 피를 떨어뜨렸다.
칼립소의 이런 행동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동이 터올 무렵,
파르르 떨리며, 엘레나의 속눈썹이 움직였다.
보랏빛 눈동자에는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폐하! 엘레나 님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베르나르가 믿어지지 않는 듯 소리쳤다.
“엘레나!”
칼립소의 목소리에 엘레나가 시선을 돌리더니, 눈을 깜빡였다.
“엘레나, 정신이 들어?”
“……어떻게……”
“정말 다행이야. 엘레나, 이제 괜찮을 거야.”
칼립소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폐하, 상처를 치료하셔야 합니다!”
베르나르가 달려들자, 칼립소는 팔을 뿌리치며, 엄중한 어조로 명했다.
“엘레나부터 먼저 치료해.”
“네, 알겠습니다.”
베르나르가 엘레나를 치료하고, 다른 의원이 그의 상처를 보려 달려왔으나, 칼립소에게 내쳐졌다.
칼립소의 시선은 오직 엘레나에게만 박혀있었다.
베르나르의 처치로 엘레나는 다행히 호흡을 되찾았다. 무엇보다 상처가 지혈이 되어갔다.
칼립소의 피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엘레나의 상태가 안정되자, 베르나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엘레나 님은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이제 남은 건 안정뿐입니다.”
“그래.”
“이제, 폐하의 상처를 봐 드리겠습니다.”
칼립소는 대꾸도 않고 엘레나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폐하, 송구하지만 팔을…….”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