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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의 검이 엘레나를 공격하자, 낙법을 통해 엘레나가 몸을 땅에 굴려 공격을 피했다.
“괜찮소?”
“얼마든지요.”
툭툭. 흙을 털고 일어나는 엘레나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검을 든 엘레나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색색거리는 숨소리. 땀 흘리는 건강한 살결.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칼립소는 겨우 억눌렀다.
시작을 하면, 멈출 자신이 없었다.
아니, 이런 것 따위 생각하지 않고 그냥 가지고 싶다.
청량한 바람이 칼립소의 뺨을 스쳐 갔다.
그에 비해 진득한 소유욕이 심장에 들끓었다.
그때 엘레나의 일격이 들어왔다.
쨍.
갑작스러운 공격에 방심하고 있던 칼립소의 검이 그대로 날아갔다.
“내가, 졌소.”
“방심은 금물이라고 했잖아요.”
엘레나가 환하게 웃었다.
“졌으니, 무엇을 들어줄까?”
“됐어요. 그냥 즐긴 걸로 충분해요.”
엘레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오랜만에 땀 흘리니까, 기분이 좋아요.”
아이처럼 풀썩 땅에 앉아 눕는 모습이 순수해 보였다.
“옆에 누울래요?”
엘레나가 옆의 땅을 툭툭 쳤다.
“사양하겠소.”
‘지금도 겨우 견디고 있단 말이야. 이 여자야.’ ‘보름’이 되기 전에는 절대 허락하지도 않을 거면서.
하지만 칼립소의 속도 모르고, 엘레나는 계속 권했다.
“같이 누워서 대지의 기운을 받아봐요.”
손바닥을 땅에 대고, 엘레나는 푸른 하늘을 올려봤다.
이렇게 하면 온몸이 이완되면서 기가 차오르는 걸 느낄 수 있다.
“어서요.”
엘레나의 손이 다리를 끌어당기자, 칼립소는 자제하려는 마음도 잊고, 엘레나 옆에 누웠다.
대낮은 숲은 고요했다.
햇빛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바람의 숨결이 세세히 느껴진다.
‘이렇게 땅에 온전히 자신의 몸을 맡긴 적이 얼마나 될까.’
칼립소는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순간, 톡 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닿았다.
“이렇게.”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두터운 손바닥을 간질였다.
그러더니 손등 밑으로 작은 손이 들어왔다.
뒤집혀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래야 더 잘 느낄 수 있어요.”
손바닥이 땅에 닿게 자세를 잡아주고, 멀어지려는 그녀의 손을 칼립소가 잡았다.
“그냥 잡고 있지.”
두 손이 연결된 채로 손바닥이 땅에 닿았다.
그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로, 땅의 기운을 받는 것.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빛. 나무가 뿜는 초록빛의 신선한 향내. 뺨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바람.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엘레나의 말대로 손바닥을 대지에 대니, 뭔가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칼립소는 몸을 이완시키고 잠시 평온함에 젖었다.
의식하지 않았으나, 둘은 동시에 숨을 내쉬고, 동시에 숨을 들이마셨다.
“어때요?”
“……좋아, ……무척.”
단순히 이 느낌을 좋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표현력이 부족한 칼립소로서는 그 말이 최선이었다.
못내 부족함을 느껴 ‘무척’이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역시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나도, 좋아요.”
둘은 한동안 평화로움에 젖었다.
엘레나가 다음 말을 꺼내기 전까진.
“맨몸으로 닿으면, 기분이 더 좋아요.”
그 말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격이었다.
머릿속으로 그림이 상상이 되면서, 칼립소의 아래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젠장.’
실제로 이렇게 맨흙에서 엘레나와 맨몸으로 뒹굴면 얼마나 좋을까.
칼립소는 엘레나를 슬쩍 봤다.
자신의 요동치는 상태에 비해 엘레나의 호흡은 이전과 다름이 없었고, 평화로워 보였다.
같이 호흡하던 둘의 리듬은 깨졌다.
“이쯤 할까요?”
뭔가를 느꼈는지, 엘레나가 먼저 일어났다.
“그러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칼립소는 선뜻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수양을 하고, 몇 번의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야 겨우 일어섰다.
칼립소가 일어나자, 기다리고 있던 엘레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등에 부드럽게 그녀의 손이 닿았다.
“흙이 묻었어요.”
탁탁.
터는 손길이 어깨를 지나, 등을 지나, 허리 아래로 갔다.
탁.
스치는 손길에 칼립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엘레나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혀를 밀어 넣고 싶었다.
칼립소의 입술이 내려가는 순간, 엘레나의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서로가 원했던 순간이었다.
둘의 혀가 얽혀지면서, 입맞춤은 농염하게 익어 들어갔다.
아까 나란히 누웠을 때, 맞아들어갔던 호흡보다 더 뜨겁고 달콤한 호흡이 오갔다.
맞닿은 입술에 호흡이 섞일 때마다 몸에는 전율이 흘렀다.
그 때였다.
히힝~
뭔가에 놀랐는지, 말이 화들짝 뛰어올랐다.
깜짝 놀란 엘레나가 뒤로 물러서자, 칼립소가 빠른 동작으로 검을 꺼내 들어 말 옆에 가더니 그대로 내려쳤다.
뱀이었다.
칼립소의 검에 완전히 두 동강이 나버린 뱀은 몇 번 꿈틀하더니 금세 죽어버렸다.
“이브뱀이군.”
가만히 들여다보던 칼립소가 중얼거렸다.
이브뱀은 독니를 가진 뱀으로 독침의 사정거리가 사람의 팔 길이만큼 나가는 위력이 있는 뱀이었다.
칼립소는 황급히 말의 상태를 살펴봤다.
다행히 독침에 쏘이거나, 이빨에 물린 자국은 없었다.
“이상하군.”
칼립소는 두 동강 난 이브뱀을 살펴보더니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이브뱀은 이곳에서 흔히 나타나지 않는 종이었다.
주로 히르타인이 거주하는 히타르섬에서 서식하는 종이기에 굳이 여기서 발견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한 번 나타난 이브뱀이 한 마리일 리는 없었다.
이브뱀이 나타났다는 것은 주변에 히르타인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로하스관으로 돌아가지. 주변에 이브뱀이 더 있을 수 있어.”
“알았어요.”
칼립소의 말에 엘레나도 서둘러 말에 올랐다.
타박타박.
언덕을 내려가니, 로하스관이 저 멀리서 보였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는 의미였다.
“저기……. 그럼, 다음에 봐요.”
로하스관에 다가서자, 엘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들어가는 것까진 보고.”
칼립소는 엘레나를 로하스관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엘레나가 로하스관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엘레나가 들어간 후에도 칼립소는 한참 동안 로하스관을 떠나지 못했다.
* * *
대신녀는 초조한 걸음으로 신전 내부를 돌아다녔다.
아무래도 불길했다.
벌써 며칠째, 엘레나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대신녀는 엘레나의 별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점점 흐려지는 별이 불길한 예감을 부채질했다.
‘뭔가 잘못됐어.’
검은 구름이 엘레나의 별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대신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캐서린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캐서린!”
‘대신녀님.’
“아직 황녀님에게서는 소식이 없느냐?”
‘네, 대신녀님.’ 뭔가 이상했다.
저번 보름 이후, 분명 자신에게 연락이 왔어야 했다.
“황녀님께 연락 오면 즉시 내게 연락하도록 해라.”
‘네, 대신녀님.’ 캐서린의 연락이 끊겼다.
당연히 내공이 부족한 캐서린에게는 잦은 연락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대신녀는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신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 *
엘레나는 로하스관 서재에서 몇 가지 안을 처리했다.
모두가 물품 확장에 관련된 내용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양국 간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이제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가이아의 물품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 큰 변화는 케이타 제국의 여인들이 샤오르만을 입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샤오르를 입지 않게 되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어깨 매듭 한 번, 허리 매듭 한 번에 옷 전체가 스르르 벗겨지게 되어 있는 샤오르는 여성들의 외부 활동을 어렵게 만들었고 집안 일에 한정해서 일하게 만들었다.
밖에 나오더라도 행동이 조심히 해야했으며, 사내가 동반하지 않으면 외출도 어려웠다.
하지만 가이아의 드레스는 여러 면에서 자유를 가져왔다.
새로운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의 외출이 잦아졌고, 가이아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은 부러움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남편들은 가이아의 드레스를 아내에게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옷차림이 변하면 행동도 변하기 마련이었다.
그동안 얌전하고 내조에만 집중하던 케이타 제국의 여인들도 점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가이아 문화 우대 정책으로 가이아의 예술이나 기술을 배우는 것을 남녀 모두에게 장려했다.
이는 케이타 제국의 큰 변화였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지켜보는 엘레나의 마음도 즐거웠다.
변화는 케이타 제국뿐이 아니었다.
양식과 꾸밈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가이아의 기술들은 실용적인 케이타 제국의 영향을 받아 바뀌어 나갔다. 특히 빨리 상품을 공급하기 위해 가이아인들은 합리적인 방식을 찾기 시작했다.
‘두 나라가 협력을 하면 이렇게 발전할 수 있구나.’
앞으로 양국 간의 협력이 계속된다면, 서로가 무섭게 성장할 것이다.
늦은 밤까지 엘레나의 업무는 계속되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엘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요.”
엘레나가 허락하자, 노아가 서재 문을 열고 천천히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그게…….”
“할 말 있는 거 같은데 말씀하세요.”
노아는 몇 번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실은 얼마 전에 가이아 제국의 배가 케이타 제국의 항구로 들어왔습니다. 저도 그림 수입 건 때문에 그곳에 나갔습니다.”
“네, 알고 있어요. 그림 주문이 많아 바쁘다고 들었어요.”
“다 신경 써주신 덕분입니다.”
가이아 제국의 그림이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미술품이 비싼 값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노아는 또 눈치를 보듯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 안토니안 님의 전언을 받았습니다.”
안토니안의 말이 나오자, 엘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안토니안이요?”
“네.”
“안토니안이 돌아왔나요?”
엘레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자신이 황궁을 떠날 때까지 안토니안은 행방이 묘연했었다.
“얼마 전에 황궁으로 입궁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엘레나는 담담히 말했다.
그동안 칼립소가 가이아 제국과의 소통을 금했기 때문에 본국에 대한 소식에 어두웠다.
“그리고 최근에 친위대 대장으로 임명되셨다고 합니다.”
“친위대의 대장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