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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안이 데이지와 즐거운 저녁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요사이 안토니안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다. 친위대의 대장을 맡으면서 베리우스 황제의 총애가 깊어졌다.
부쩍 쇠약해진 베리우스는 안토니안을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토니, 나는 언제까지 외출을 못 하는 거죠? 이제 너무 답답해요.”
저녁을 잔뜩 먹은 데이지는 투덜대며 말했다.
안토니안과 수도에 와서 같이 사는 것은 좋으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데이지는 집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숨어있어야 했다. 자유롭게 살던 데이지에게는 갑갑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밤이라도 몰래 나가면 안 돼요?”
안토니안은 그런 데이지가 안쓰럽다는 듯 꼭 껴안았다.
“조금만 참아. 친위대 대장이 된 이후로, 경계하는 시선이 많아졌어.”
“힝.”
데이지가 애교 어린 목소리로 칭얼거리자, 안토니안은 보석함을 건넸다.
“대신, 선물을 준비했어.”
“이게 뭐예요?”
데이지가 보석함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열어 봐.”
최근들어 데이지가 우울해하는 것이 안토니안도 마음에 걸렸다.
엘레나와 혼인하고 황제에 오르기 위해서는 아직도 긴 세월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지쳐서는 곤란했다.
“세상에!”
보석함을 열어본 데이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어머니 유품이야. 내 아내가 될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어.”
데이지는 안토니안을 꽉 껴안았다.
보석함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금강석으로 된 반지와 목걸이가 세트로 들어있었다.
그 자체로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보석이었지만, 데이지가 감명받은 것은 거기에 새겨진 하를 가문의 인장 때문이었다.
“데이지, 하를 가문의 안주인은 너야.”
“토니……!”
데이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보석함을 바라봤다.
이것을 준다는 것은 안토니안이 자신을 단순히 연애 대상으로만 본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답답한 것도 그렇지만 황녀님이 돌아오시면 자신이 버림받을 것 같은 불안감에 더 우울했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돈이 많고, 안토니안을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평민인 자신과 공작의 후계자인 안토니안은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데이지, 날 위해서 견뎌줄 수 있지?”
“그럼요.”
데이지는 울먹이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내가 황제가 될 때까지만 기다려줘.”
“알았어요. 사랑해요, 토니.”
안토니안은 데이지를 끌어안았다.
둘이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하인이 다가와 세바스찬의 방문을 알렸다.
세바스찬이 들어와 둘을 보더니, 안토니안만 따로 서재로 불렀다.
“무슨 일이시죠?”
수도로 온 이후, 세바스찬을 대하는 안토니안의 자세는 많이 달라졌다. 세바스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이지가 안토니안의 연인이 되고, 안토니안이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자, 점점 만만하게 여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선도 제대로 못 맞출 대단한 신분이었지만, 지금의 안토니안은 간혹 멍청해 보이기까지 했다.
“안토니안 님, 케이타 제국의 귀족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케이타 제국과요?”
“케이타 제국 내에서도 엘레나 님에 대한 반발 세력이 많습니다. 이런 말씀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엘레나 님과 케이타 황제는 꽤 뜨거운 사이인 거 같습니다.”
안토니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방금 자신도 데이지와 시간을 보내고 왔지만, 엘레나가 그러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정부로 끌려가더니…… 결국…….’
안토니안은 은근히 열이 올랐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엘레나님은 데려와야 하지 않습니까? 황위를 위해서도요.”
“그렇죠.”
“다행히 케이타 제국의 귀족들과 연합하면, 전쟁 없이도 쉽게 엘레나 님을 빼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국혼만 치르면 되지 않습니까?”
세바스찬의 말에 안토니안의 눈빛이 빛났다.
“설마 케이타 제국의 정부로 있었던 분을 계속 곁에 두실 건 아니죠?”
“당연하죠.”
안토니안의 눈빛에 통쾌함이 어렸다.
‘그래, 신탁의 계시만 지킨다면.’
엘레나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죠?”
“먼저, 안토니안 님의 친필 전언이 필요합니다.”
세바스찬의 말에 안토니안은 집중했다.
그날, 둘은 밤새도록 서재에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 * *
‘삭’의 밤 이후에도 칼립소와 엘레나는 종종 만났다.
어느 때는 신전을 시찰하는 엘레나의 모습을 잠깐 보기만 하고 가기도 하고, 어느 때는 같이 식사를 했다.
함께 현재 정책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고, 때로는 소소한 잡담을 하기도 했지만, 둘의 관계는 선을 넘는 법이 없었다.
오늘도 둘은 한가로이 로하스관의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엘레나를 만날 때면 칼립소는 호위대를 완전히 물렸다.
오늘 엘레나가 입은 드레스는 심플한 하얀 드레스로, 허리에는 황금색의 띠를 두르고 있었다.
활동하기 편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시선을 끄는 면이 있었다.
‘아마도 엘레나가 입어서 그런 거겠지.’
엘레나는 기분이 좋을 때는 입가가 슬쩍 올라간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살짝 눈썹을 올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돌릴 때가 있다.
이해가 안 갈 때는 코를 찡긋하고, 뭔가 마음에 안 들 때는 귀를 만진다.
기다란 속눈썹에 가려진 보랏빛 눈동자는 관심 있는 주제엔 투명한 자수정 빛깔로 반짝이고, 생각에 잠길 때면 짙은 사파이어빛이 드러난다.
“뭘 그렇게 봐요?”
“아름다워서.”
살짝 당황하는 엘레나의 표정을 보고 칼립소가 덧붙였다.
“가이아의 드레스가.”
“아, 이거 최근에 들어온 거예요. 가이아에서는 평상시에는 이렇게 가볍게 입어요.”
직접적인 외모 칭찬에는 어색한 표정을 짓지만, 가이아 제국에 관한 칭찬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칼립소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요 며칠 엘레나를 관찰하며 얻게 된 몇 가지 사항이었다.
“상황에 맞게 입으니 확실히 편리한 점이 있어.”
“그렇죠? 여기 와서 놀란 점이 그거였어요. 여성들이 모두 샤오르만 입는다는 거예요. 물론 샤오르도 아름다워요. 하지만 활동하기 불편한 점도 있어요.”
“맞는 말이야.”
칼립소도 동의했다.
크리스가 다양한 의복을 제작하는 바람에 요즘에는 칼립소도 여러 가지 의복을 상황에 맞춰 입게 되었고, 꽤 효과가 좋았다.
언젠가부터 황제가 케이타 제국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었다.
“여성들에게 좀 답답한 구석이 있지. 그런 점에선 가이아는 꽤 진보적인 것 같아. 황녀인데도 어릴 때부터 검을 들게 한 걸 보면.”
“꼭 그렇지는 않아요. 가이아에서 황녀는 황제가 되지 못하잖아요. 선택권이 없지요. 검을 드는 것도 제 고집이었어요.”
“의견을 받아준 걸 보면 평소에 모범적인 아이였나보군.”
“정 반대였어요. 황녀 수업도 제대로 안 받고 매일 도망쳐다녀서 시녀들이 고생이 많았죠. 어릴 때, 엄청난 개구장이였거든요.”
“당신이?”
어깨를 으쓱이던 칼립소가 슬며시 웃었다.
“생각해보니, 그랬을 거 같네.”
“그리고 치유력이 있으니까, 어느 정도 안심한 면도 있고요. 아마 그렇지 않았으면 허락받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군.”
치유력의 이야기에 반갑지 않은 정적이 흘렀다.
“이만 일어나 보겠소.”
“벌써요?”
엘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입을 막았다.
“원한다면 더 있을까?”
칼립소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정이 있는 건 아니에요?”
“대련장에 가려고 하는데, 그냥 있어도 상관없소.”
최근 들어 다시 피가 끓었다.
잠깐씩 엘레나를 보는 것은 좋지만, 답답함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처럼.
“대련장에 갈 거예요?”
엘레나의 눈이 자수정처럼 빛났다.
“관심 있소?”
“검을 써본 지 너무 오래돼서요. 몸도 근질거리고요.”
칼립소가 슬며시 웃었다.
“그럼, 같이 해볼까?”
“여기서요?”
“말을 타고 나가서 야외에서 해도 좋고.”
“난 검이 없어요.”
“내 것을 빌려주지.”
“좋아요. 잠깐만 기다려요.”
반색하는 엘레나의 반응에 칼립소는 잔잔히 웃었다.
잠시 후, 승마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온 엘레나의 두 뺨은 기대감으로 붉어져 있었다. 둘은 함께 말을 타고 언덕을 넘었다.
언덕을 넘어 평지에 다다르자, 칼립소는 말을 세웠다.
“여기가 적당할 거 같은데?”
칼립소가 펄쩍 뛰어내리자, 엘레나도 함께 내렸다.
“좋아요.”
엘레나는 기대감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검으로 맞붙어 본 경험으로 칼립소와의 대련이 얼마나 기분 좋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 시작할까.”
엘레나는 바로 움직이지 않고 신중하게 칼립소의 모습을 응시했다.
아무런 방비 없이 느긋해 보였지만, 실상 그에게 빈틈을 찾기란 어려웠다.
긴장과 흥분의 탐색이 시작됐다.
서로의 호흡이 맞아 들어진 찰라, 엘레나가 먼저 균형을 깼다.
민첩하게 땅을 딛고 나온 엘레나는 바로 칼립소를 공격했다.
칼립소 역시 빠르게 대응했으나, 방어 위주였다.
엘레나는 칼립소가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을 들어 빠르게 공격하자, 점점 칼립소도 수세에 몰렸다.
쨍.
여러 선으로 휘둘러지는 검을 칼립소도 간발의 차로 막아냈다.
두 개의 검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오고 갔다.
“봐주지 말아요. 다칠 수 있으니.”
칼립소가 방심한 틈을 타, 어깨 쪽을 깊숙이 파고들자, 칼립소의 옷이 찢겨 나갔다.
“다음번엔 정말 찌를 거예요.”
진지하게 임하라는 엘레나의 말에 칼립소의 검기가 바뀌었다.
아까보다 더 격렬하게 검이 부딪혔다.
칼립소가 목을 겨냥하자, 엘레나가 허리를 유연하게 꺾으면서 그의 복부로 칼을 겨눴지만, 칼립소도 그걸 쳐냈다.
검이 부딪히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두 사람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