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으……. 엘레나.’
칼립소는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 흥분상태로 놔둔 채로 가다니.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얇은 손수건 위의 어른거리는 상태로는 방 안을 샅샅이 볼 수 없었다.
묶인 손을 풀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참았다.
잠시 후,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엘레나가 돌아왔다.
“어디를 갔다 온 거야?”
“잠깐이라고 했잖아요.”
칼립소가 목에 힘을 주며 최대한 머리를 들어 올리자, 엘레나의 입술이 내려왔다.
‘아…….’
수없이 책하려던 말이 사라졌다.
엘레나의 입 안에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했다.
허겁지겁 달려들어 입술을 핥고 안을 탐했다.
그녀의 입 안의 얼음이 빠르게 녹도록.
“조급하게 굴지 마요. 아직 밤은 한참 남았으니까.”
엘레나의 손이 칼립소를 밀었다.
칼립소가 다시 눕자, 엘레나가 위로 묶인 손을 쓰다듬었다.
“아프진 않아요?”
“아픈 건 그쪽이 아니야.”
빳빳이 일어선 아래쪽의 사정은 급한 수준을 넘어섰다.
엘레나는 마치 자비로운 천사처럼 매듭이 묶인 그의 손목을 쓰다듬어주었다.
상처를 살피는 듯했지만, 실상은 헐거워진 매듭을 더 꽉 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칼립소는 이미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할 수 있게 할 참이었으니.
엘레나가 충분히 그의 몸을 탐색할 때까지, 칼립소는 기다렸다. 아니 기다리려 했다.
얼음을 문 채로 엘레나가 아래로 내려올 때까진.
“젠장…….”
투툭.
참을 수 없는 감각에 침대가 출렁거렸다.
“참아요.”
절정을 느끼려는 칼립소의 몸짓을 막았다.
“으읏…….”
엘레나가 끊임없이 다른 곳을 자극했다.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엘레나의 행동에 칼립소가 몸부림쳤다.
“제발…….”
“그렇게 좋아요?”
엘레나의 숨이 느껴지자, 칼립소는 더욱 흥분했다.
조금만 더.
간절한 쾌감이 너무 그리웠다.
“으흣.”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죽끈이 끊어졌지만, 칼립소의 끝까지 손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동시에 엘레나는 멀어졌다.
“엘레나, 날 죽일 셈이야?”
엘레나가 고개를 들고 칼립소를 봤다.
“그럴 리가요.”
끝까지 손을 내리지 않고 이를 악무는 칼립소를 보며, 엘레나는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손수건을 치웠다.
정염에 물든 붉은 눈동자 안에는 자신의 모습이 오롯이 각인되어 있었다, 엘레나는 칼립소의 손에 있던 목도리를 치웠다.
“이젠, 같이 놀아요.”
봉인에서 풀린 것처럼 칼립소가 일어섰다.
“엘레나.”
자세가 순식간에 뒤집히면서 엘레나가 칼립소의 밑에 눕혀졌다.
“나의, 엘레나.”
엘레나가 잠시 방심한 사이 샤오르의 매듭이 풀렸다.
순식간에 샤오르는 엘레나의 발밑으로 사라졌다.
“이제, 제대로 놀아볼까?”
입술이 느릿하게 맞붙었다.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야하게 젖은 소리와 함께 혀가 얽혔다.
칼립소의 손이 엘레나의 몸을 훑었다.
혼자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감각이 서로를 지배했다.
“좋아, 요.”
엘레나가 칼립소의 목을 안았다.
그 한마디가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미치겠네.”
기다렸던 절정은 순식간이었다.
기다렸던 시간이 길었던 것만큼 강렬한 쾌감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렸던 만큼 절정은 달콤했고, 또 아쉬웠다.
“한 번 더, 할래요?”
“안 그래도 그럴 거야.”
“칼…….”
엘레나는 칼립소를 꽉 껴안았다.
달빛이 사라진 삭의 밤.
열락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 * *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오후, 먼저 눈을 뜬 것은 엘레나였다.
“…….”
격렬한 지난 밤 때문에 이불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몸이 온통 따스한 열기에 감싸있었다.
등 뒤에서 칼립소가 자신을 온전히 껴안은 채로 잠든 것이다.
“음…….”
나른한 숨소리가 뒷목을 간질였다.
살며시 그를 밀어내자, 칭얼대듯 그의 이마가 목덜미에 닿았다.
어깨가 움찔대자, 응석을 부리듯 더 비벼댔다.
엘레나가 일어나려 하자, 팔의 힘이 더 강해졌고, 그것을 무시하고 일어나려 하자, 굵은 다리에 다시 감겼다.
“더 자지 왜.”
반쯤 잠긴 목소리였다.
“해가…… 중천이에요.”
‘삭’의 밤이 지나고, 낮이 왔다.
“그게 뭐.”
머리는 여전히 엘레나의 목덜미에 붙어 있는 채, 웅얼댔다.
덕분에 그의 입술 움직임과 숨결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좋은 냄새가 나.”
늘 엘레나에게선 달콤한 냄새가 났다. 특히, 이렇게 밤을 보낸 다음에는 더욱.
달달한 과일향 같기도 하고, 상큼한 꽃향 같기도 하고.
분명한 것은 내내 맡고 싶다는 거였다.
“무슨 생각을 해?”
엘레나가 한참을 말없이 있자, 칼립소가 얼굴을 떼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냥, 꿈만 같아서요.”
엘레나는 작게 속삭였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칼립소와 있는 시간은 꿈만 같았다.
가끔 너무 좋아서 현실을 잊는다.
다음 보름이 지나면 이런 날도 끝나겠지.
“따뜻하고 좋아요.”
엘레나가 뒤를 돌았다.
마주 보자, 서로의 눈빛이 얽혔다.
“이제…… 일어날까요?”
“아니.”
“……왜요?”
“좋다면서.”
칼립소가 엘레나를 꼭 끌어안았다.
너른 가슴팍에 엘레나의 머리가 묻혔다.
한참 동안 꼭 끌어안은 칼립소가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숨소리에 따라 가슴팍의 파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시 후, 엘레나를 꽉 껴안았던 팔을 느슨해졌다.
“배고플 테니, 아침은 함께 먹지.”
“아니에요.”
“왜?”
못마땅한 듯 올라간 눈썹을 엘레나가 쓰다듬었다.
“아침 아니라, 점심이라고요. 점심, 같이 들어요.”
엘레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카토 공작은 찌푸린 표정으로 요하스 자작의 살롱에 앉아 있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술판이 점차 지겨워졌다.
지금도 화려한 안주와 술, 여인들이 있지만 카토 공작의 마음 한쪽 구석에는 다른 불안이 존재했다.
최근 화가의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위치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케이타 제국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매김 하지 못한다면 뒤처질 것이다. 아니, 이미 뒤처지고 있는 줄도 모른다.
그동안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가문들이 연일 가이아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하시던 대로 전쟁이나 하실 것이지, 쯧.’
칼립소가 전쟁에 몰두할 때는 정복지에서 착취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약탈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반응하였으나, 그 이후의 처신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그로 인해 카토 공작을 비롯하여, 요하스 자작 등 많은 귀족들이 독점적 이득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문화개방정책으로 모든 것이 녹록지 않아졌다.
시작은 신전 건축부터였다.
이전에는 당연히 요하스 자작이 맡는 것이었고, 암암리에 생기는 이익은 다 돌아갈 자리가 있었다.
그것을 공모로 뒤집으면서 시장에 변화가 생겼다.
자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미술품 경매에서 독점적 위치를 누리면서 수많은 자산을 미술품으로 은닉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이아 화가들이 등장하면서 미술 업계의 판도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엘레나 때문이었다.
황제도 처음에는 각 부처 귀족들에게 가이아에서 온 예술가와 건축가의 관리를 맡기지 않았는가.
여우에게 빠져 국정을 운영하니 이런 꼴이 일어난 것이다.
카토 공작은 흥분한 목소리로 성토했다.
“언제까지 술판만 벌일 셈이오? 요하스 자작, 이대로 두고 보기만 할 거요?”
“카토 공작님, 그렇지 않아도 대책 마련 중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다 요망한 여우 한 마리 때문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니 여우부터 처리를 해야죠.”
“그 뒷감당은 어찌 하려고?”
카토 공작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엘레나가 문제라는 것을 알아도 칼립소가 아끼는 정부였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더 큰 화를 당할지 몰랐다.
“그러니까 잘 엮어야지요.”
“어떻게 말이지?”
“지금 가이아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좌중이 조용해지며, 요하스 자작의 말에 집중했다.
“사실, 얼마 전 가이아 제국에 은밀히 첩자를 보냈습니다. 그 요망한 여우의 약혼자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더군요.”
“무슨 일을 말인가?”
“히르타인을 가이아 제국에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히르타인을?”
카토 공작은 눈썹을 찌푸렸다.
“고고한 척은 있는 대로 하더니, 미쳤군.”
히르타인은 케이타인들도 꺼리는 족속이었다.
금전이라면, 제 어미는 물론 딸이나 형제까지 팔아먹는 족속들이었다.
‘그런 놈들과 손을 잡다니. 쯧, 가이아 제국도 망해가는군.’
“우리한테는 잘된 일이죠.”
“뭐가 말이지?”
“히르타인들을 이용해서 안토니안을 움직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히르타인 몇몇을 매수했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하는 자들이니까요.”
“그래서?”
카토 공작이 흥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안토니안이 친위대 대장을 맡고 있더라고요. 히르타인을 이용해 은빛 여우를 구해낼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마침 잘되지 않았습니까? 도망치다 죽었다면, 그 누가 뭐라하겠습니까?”
“아하.”
카토 공작은 무릎을 쳤다.
“조만간 좋은 그림이 완성될 것 같습니다.”
요하스 자작의 말에 카토 공작이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가이아인들은 엘레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만약, 엘레나가 없어진다면 그들은 구심점을 잃게 될 것이고, 황제 역시 지금까지처럼 가이아 문화 우대 정책을 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도 예전의 권력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카토 공작은 미소를 띠며 요하스 자작과 건배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