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실제로 가이아 제국에서는 평화를 원하는 쪽도 많았다.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무역의 길이 열리자, 예술 활동은 활발해졌고, 상인들의 주머니도 풍성해졌다.
그동안 갇혀 있었던 가이아 제국의 문물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게 된 것이다. 덕분에 그동안 만년 적자에 시달렸던 국고는 풍부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언니의 안부였다. 그렇기에 안토니안의 행동도 막을 수 없었다.
“아리엘,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약혼자인 필립이 아리엘의 서재에 들어섰다.
아리엘은 엘레나가 케이타 제국으로 간 이후 제 1황녀 역할을 대신 수행하고 있었다.
몸이 약한 엘리자베스는 자리에 눕다시피 했고, 결국 일 처리를 할 사람은 아리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아리엘은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해나갔다.
“괜찮아요. 언니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죠.”
필립은 아리엘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말없이 아리엘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건강에 신경 써요, 아리엘. 건강 역시 할 일 중 하나예요.”
“고마워요.”
“식사를 부실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필립은 간단한 스프 그릇을 다시 건넸다.
“좀 더 들어요. 안다르 의원이 이 이상 무리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너무 지나친 걱정이에요. 그보다 필립, 아무래도 안토니안이 석연치 않아요. 히르타인들을 데려온 것도 그렇고…….”
“내가 좀 알아볼 테니, 너무 염려 말아요.”
“부탁해요. 뭔가를 꾸미고 있지 않은지 염려돼요.”
아리엘은 황궁에서 마주쳤던 안토니안의 모습을 떠올렸다.
“예전과 달리 좀 변했어요. 아니, 꽤 많이요. 하를 가로 들어가지 않고 수도 저택에 묵는 것도 이상하고요.”
아리엘이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중얼댔다.
“천천히 알아봅시다.”
필립은 아리엘을 다독였다.
* * *
아리엘의 말대로 안토니안은 예전과 많이 바뀌었다.
친위대의 대장을 맡은 안토니안은 직속 책임자를 자신의 사람으로 바꾸는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개편된 인사에는 세바스찬이 추천한 인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안토니안은 세바스찬이 마련한 수도저택에 머물렀다.
하를 공작이 집 안으로 돌아오라고 안달하였으나, 가볍게 무시했다.
지금까지 규율에 묶여서 하고 싶은 것을 억눌렀던 삶은 재미가 없었다.
세바스찬이 마련해 준 저택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특히 데이지와 함께 생활하는 것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토니.”
안토니안이 저택에 들어오자, 데이지는 팔짝팔짝 뛰어와 안토니안의 품에 안겼다.
세바스찬이 마련해 준 저택에서 데이지는 안토니안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가 둘을 인정하면서 데이지는 훨씬 대담해졌다.
일을 돌봐주는 하녀는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히르타인이라 말이 새어 나갈 일도 없었다.
“힘들었죠?”
“아니, 우리 애기가 힘들었지.”
안토니안은 애교 있게 웃는 데이지를 끌어안았다.
“오늘 맛있는 거를 준비해 두었어요. 같이 먹고, 같이 씻어요.”
“같이?”
“아이, 참.”
데이지가 얼굴을 붉히자, 안토니안은 그녀를 번쩍 안았다.
“먼저 씻는 거부터 하고 싶은데? 같. 이.”
안토니안이 그녀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세바스찬이 제공한 저택은 화려하고 큰 욕실이 일품이었다.
특히 이럴 때는.
“토니.”
안토니안은 뜨거운 입술을 데이지의 목덜미에 댔다.
“토니, 나 버리지 않을 거죠?”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어떻게 널 버려?”
“케이타 제국에서 황녀님을 데려올 거잖아요. 그러면 혼인식도 올릴 테고…….”
“데이지, 나한텐 너뿐이야.”
세바스찬의 입술이 아래로 향했다.
“나도요. 토니.”
“엘레나는 황위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인 거 알잖아.”
“그래도, 가끔 불안해요.”
데이지가 얼굴을 내려 안토니안과 눈을 마주쳤다.
“어제도 악몽을 꿨어요. 황녀님이 날 처형시키는 꿈이요.”
“엘레나는 그렇게 못해.”
“하지만 황녀님이시잖아요.”
“걱정 마,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엘레나는 허수아비가 될 거야. 그러니 데이지, 넌 나만 믿어.”
안토니안은 더 이상 데이지가 말을 하지 못하게 입술을 덮쳤다.
* * *
저녁 무렵, 칼립소는 신전 건축 현장으로 갔다.
미리 소식을 전하지 않은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신전은 기초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것 같았다.
칼립소는 따라오는 시종도 모두 물린 채로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그가 찾는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은빛으로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보이자, 저절로 뒤를 쫓아갔다.
엘레나는 설계도면을 들고 아몬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 있던 인부들이 칼립소를 보고 절을 하려고 하자, 칼립소가 입술에 손을 댔다.
방해하지 말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설계도면을 보는 엘레나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아몬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활짝 웃기도 했다.
‘저런 표정도 있었나?’
칼립소는 엘레나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칼립소의 시선을 먼저 눈치챈 것은 아몬이었다.
“폐하.”
아몬이 무릎을 꿇자, 엘레나가 뒤를 돌았다.
칼립소를 본 엘레나의 얼굴에는 아까의 편안한 표정이 사라지고 딱딱한 긴장이 보였다.
“엘레나.”
“폐하.”
엘레나가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보름 이후, 처음이었다.
둘 사이에 살짝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일은 다 끝났소?”
마침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던 참이었다.
“거의요. 좀 둘러 볼래요?”
“그러지.”
칼립소의 말에 엘레나는 신전 안을 안내했다.
내부의 공간도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다.
“이쪽은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에요. 그리고 안에는 비밀 통로를 만들었어요.”
“신전에 왜 비밀 통로를 만들지?”
“위급한 일에 사용하기 위해서예요.”
칼립소는 지난번 가이아 제국을 침략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아마 신전의 비밀 통로를 이용해 빠져나갔었지.
“또한 이곳은 은신처가 되기도 해요. 신녀들을 보호하는 곳이죠.”
신전의 비밀 통로를 따라가니 비밀스러운 분위기의 방이 나타났다.
“이곳에 있으면 아무도 몰라요.”
“그렇군.”
칼립소가 주변을 둘러봤다.
아몬의 설계대로 신전은 독특한 모양을 띠고 있었다. 예산을 아끼지 말고 투입한 결과 예술적인 자태가 고급스럽게 배어 나왔다.
“아름다운 방이군. 아무도 모른다니, 이곳에선 온갖 일이 다 일어나겠군.”
“무슨 일이요?”
“가령, 비밀 연애라든가.”
“여긴 신성한 곳이에요.”
엘레나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농담이요.”
칼립소가 살짝 웃었다.
“어느 정도 본 거 같은데, 이정도로 마무리하고 이 근처에서 식사나 같이 할까?”
“밖에서요?”
“싫으면, 로하스관으로 가고.”
“아니에요. 좋아요.”
엘레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곳에 온 뒤로 밖에서 식사한 적은 없었다.
케이타 제국의 식당도 궁금하고, 어떤 분위기일지도 기대가 됐다.
“그럼, 가지.”
칼립소가 신전 밖으로 움직이자, 대기하던 시종들이 따라왔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황제의 음식점 방문은 자연스러웠다.
칼립소의 당부대로 손님 몇몇도 그대로인 채, 주인은 안쪽 자리로 칼립소와 엘레나를 안내했다.
적당히 사생활이 보장되면서도 완전히 밀실은 아니라 풍경과 사람들은 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요리사가 직접 나와 장황하게 메뉴를 설명한 후, 하나하나 내오기 시작했다.
옥수수, 양파, 귀리 등이 잔뜩 담긴 샐러드와 병아리콩을 각종 향신료에 튀겨 만든 요리가 나왔다.
향신료에 재워 구운 커다란 돼지와 함께 여러 빛깔의 소스도 곁들여 나왔다.
“이 식당은 이 요리가 유명하다는군.”
칼립소가 말하는 건 부드럽고 폭신한 느와쟈였다.
꿀에 버무린 느와쟈를 엘레나에게 건넸다.
엘레나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느와쟈를 한 입 먹었다.
“맛있어요.”
촉촉한 빵 같은 식감에 사이사이에 꿀과 꽃향이 배어 나왔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달콤한 맛에 엘레나의 얼굴도 풀어졌다.
“다행이군. 맛있어해서.”
음식이 맛있으니 둘의 분위기도 부드러워졌다.
“신전 건축은 잘 되는 것 같던데.”
“아몬이 잘하고 있어요. 가이아의 건축가들도 전력을 다하고 있고요.”
일 이야기를 하니 엘레나의 눈빛이 반짝였다.
“요새 가이아인들이 만든 물품들이 인기가 많더군.”
“예상보다 더 좋게 봐주는 거 같아요.”
“무역도 많이 늘었고.”
“그 점은 폐하께 감사해요.”
“별말을 다 하는군.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지.”
식사 내내 부드러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는 동안 엘레나는 칼립소의 시선이 머문 곳을 봤다.
아까부터 칼립소는 종종 그곳을 보곤했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자식을 먹이고 있었다.
칼립소의 눈빛에는 부러움 비슷한 감정이 스쳐 갔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지.’
어쩐지 칼립소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일어날까요?”
차라리 오만한 얼굴이 낫지, 칼립소의 쓸쓸한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거리에 나오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둘은 로하스관까지 나란히 걸었다.
하지만 로하스관 안으로 들어오자, 또다시 어색해졌다. 식사 때 좋았던 분위기는 잠깐이었다.
‘삭’의 밤이 다가올수록 엘레나는 왠지 불편했다.
분명 같이 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뭔가 의식을 치르듯 꼭 해내야 한다는 것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이전까지 칼립소와의 잠자리는 기대되고 설렜다. 하지만 지난 두 번의 보름의 밤이 그 기억을 망쳤다.
특히 이전의 마지막 보름날 밤이 자꾸 떠올랐다. 무력하게 붙들려 울기만 했던 자신을 생각하면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엘레나의 시선이 방황하자, 칼립소가 입을 열었다.
“와인이라도 한잔할까?”
“좋아요.”
술기운이라도 빌리면 좀 더 편해질까.
‘삭’의 밤을 꼭 보내야 한다면 차라리 취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와인은 취하는 속도가 느렸다.
“와인보다는 럼이 좋겠어요.”
엘레나는 비비안에게 럼을 가져오라고 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