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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괜찮으니까요.”
“젊으시다고 방심하지 마시고, 부디 건강을 돌보세요. 많이 상하셨습니다.”
“말씀만도 감사하네요. 그럼, 이건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노아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뒤 물러났다.
비록 황녀라고 부르진 못해도, 그에 걸맞는 예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가이아인들에게 엘레나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케이타 제국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그뿐 아니었다.
케이타 제국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형편이 급속도로 좋아졌다.
문화 정책에 의해 앞으로 케이타 제국에 정착할 수도 있으며, 가이아 제국과 수출 길이 열리면서 새로운 기회를 맞이한 사람들도 많았다.
케이타 제국의 가이아 문화 우대 정책은 여러 분야에서 변화를 나타냈다.
양국 간의 무역은 매우 활발해졌으며 특히 가이아 제국의 액세서리나 의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렇게 좋은 점도 있었으나, 이런 현상을 좋지 않게 보는 이들도 점점 늘어났다.
가이아의 다양한 드레스를 입고 싶어하는 여인들이 늘어나자,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문제는 그 비용을 케이타의 남자들이 치러야 하는 데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흘러가자, 가이아 제국에 대한 불만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느날부터인가 묘한 소문이 거리로부터 흘러나왔다.
‘황제가 여우에게 홀렸다.’
‘가이아에서 온 은빛 여우가 황제를 잡아먹는다.’
‘은빛 여우가 케이타 제국을 멸망시킨다.’
처음에는 소문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아이들의 노래로 전해졌다.
은빛 여우 한 마리,
예쁘다 예쁘다 하여
꼬리를 자르지 못해
천방지축 날뛰어도
예쁘다 귀여워하니
주인의 심장을 파먹네.
겨우 여우 한 마리인데
겨우 여우 한 마리인데
주인이 물려 죽었다네.
거리를 타고 울리는 노랫소리는 민심을 대변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요하스 자작이 있었다.
신전 건축을 뺏긴 요하스 자작은 점점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가이아 건축가들의 기술 전파는 케이타 건축가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은 빠르게 기술을 습득했다.
젊은 건축가들이 늘어나고 합리적인 비용을 여러 건축가들이 제시하자, 요하스 자작이 독점하던 시대가 끝났다.
또한 가이아의 문화가 유행이 되면서 귀족들은 그런 스타일의 건축을 요구하게 되었고, 요하스 자작은 하나둘씩 거래처를 잃었다.
가뜩이나 신전 건축 공모에 탈락하여 자금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다른 공사들까지 빼앗기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원망은 모두 엘레나에게 향했다.
‘고작 정부 주제에.’
어떻게 유혹했는지 태산 같던 황제가 흔들렸다.
흔들린 것뿐인가. 이 정도면 지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년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어.’
다 정해두었던 신전 건축을 뒤집지 않나.
정복한 땅에 불과했던 가이아인들을 대접해주지 않나.
거기다 무역까지 활발하게 허용해주니 가이아의 물품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나라가 망하려고 그러지.’
요하스 자작은 그때부터 은밀히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을 모았다.
전쟁이 계속될 때는 말없이 따랐던 장수들도 평화가 계속되자, 불만을 지니게 된 자도 있었다.
전투에 강한 칼립소를 존경한 만큼 그들은 엘레나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엘레나 때문에 정복 전쟁을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나라가 성장하는 만큼 기회를 잡은 사람들도 있지만, 뒤처지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케이타인들 중 벼락부자들이 생기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도 쌓여갔다.
그걸 이용한 사람이 바로 요하스 자작이었다.
요하스 자작은 자신의 살롱을 제공하여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둘 모았고, 술과 음식을 충분히 베풀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은 자리는 그 규모가 점점 늘어났다.
* * *
로하스관으로 돌아온 엘레나는 다시 바쁘게 지냈다.
“엘레나 님, 간식 좀 드세요.”
서재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엘레나에게 비비안이 갓 구운 쿠키와 차를 가지고 왔다.
“고마워.”
엘레나는 설핏 웃었다.
“엘레나 님, 오늘도 황궁에서 선물이 왔습니다.”
“그래, 창고에 넣어둬.”
“보지도 않으시고요?”
“그래.”
엘레나가 로하스관으로 돌아온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진귀한 선물이 들어왔다.
귀한 범 가죽부터 사슴 뿔이며 보석과 금도 가득 상자째 들어왔으며, 각종 비단도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진귀한 선물이라도 엘레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그건 엘레나가 그의 정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는 것뿐이었다.
결국 선물은 모두 창고행이었다.
“그래도 이건 꼭 한 번 보세요.”
비비안이 하얀 여우 목도리를 내밀었다.
“흠 하나 없이 귀한 여우 목도리예요. 이런 건 폐하밖에 못 잡으세요.”
비비안의 말대로 여우 목도리는 반짝이는 빛깔에 풍성한 털을 자랑했다.
꼭 엘레나의 머리 색처럼.
재빠르고 눈치가 워낙 빨라 잡기 힘든 사라타종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흠 하나 없이 잡기 위해서는 눈을 정확히 쏘아 맞춰야 했다. 그건 웬만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엘레나는 여우 털을 쓰다듬었다.
반지르르한 털이 녹아내리면서 각도에 따라 빛이 살짝 변하는 것이 아름다웠다.
“곱지요? 천금을 주고도 못 구할 거예요.”
“그래, 곱네.”
“이건 침실에다 둘게요.
반짝이는 눈을 하며 간곡히 말하는 바람에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 님.”
“왜? 비비안.”
비비안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할 말 있으면 해.”
“폐하가 원망스러우신가요?”
“……그런 거 없어.”
“한 달 동안이나 갇혀 계셨으니,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하세요.”
엘레나는 쿠키를 한 조각 베어 먹었다.
칼립소에 대한 감정은 혼란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폐하께선 곁에 두신 여인이 엘레나님이 처음이세요. 그래서 서투르신 점이 많을 거예요. 거기다…….”
비비안은 잠시 말을 멈추다 다시 이었다.
“선황 폐하께서 정부에게 목숨을 잃으셨거든요.”
“그건 무슨 소리야?”
비비안은 천천히 이야기를 풀었다.
칼립소의 아버지, 산체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장골이었으며 힘이 셌다.
타고난 전사였던 산체스는 부족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가장 아름다웠던 족장의 딸 아들리에와 결혼을 했다.
신혼은 무척 행복했다고 한다.
산체스는 몸이 약한 아들리에를 극진하게 위했고, 둘의 모습을 사람들은 흐뭇하게 지켜봤다.
아들리에가 임신했을 때, 산체스는 그녀의 발이 땅에 닿지 못하게까지 했다. 침대에서 식탁으로, 다시 침대로 산체스가 직접 안아서 옮겼다고 했다.
입덧이 심했던 아들리에가 사흘간 음식을 먹지 못하자, 산체스는 같이 금식을 하며 아들리에의 곁을 지켰다. 또한 아들리에게 산딸기가 먹고 싶다고 하니, 겨울 산을 손수 샅샅이 뒤져 산딸기를 그득 대령할 정도였다.
그런 아들리에가 칼립소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아들리에의 피를 뒤집어쓰고 나온 칼립소에게 산체스는 증오의 시선을 보냈다.
「피처럼 붉은 눈이구나. 저주받은 눈이야. 그래서 네 어미를 잡아먹은 게지.」
그 이후, 산체스는 칼립소를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다.
아들리에가 죽은 후, 5년 동안 산체스는 여인을 멀리했다.
그렇게 오 년이 흐른 후, 산체스는 아들리에와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 테미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여리여리한 아들리에와는 달리 탄탄한 체격에 까무잡잡한 미녀였다.
산체스는 테미를 정부로 삼고, 그의 아버지와 오빠에게도 권력을 내어주었다.
테미는 아들리에와 달랐다.
활발하며 거침이 없었고, 사냥을 좋아하며 적극적이었다.
소박한 아들리에와 달리 사치를 일삼으며 산체스를 조종했다.
그리고 칼립소가 열 살이 되던 해, 테미는 산체스를 죽였다.
비비안의 이야기를 다 들은 엘레나는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다니.
어린 칼립소가 얼마나 정에 굶주렸을까.
‘안쓰럽네.’
지금의 칼립소를 보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니 엘레나 님, 폐하를 너그러이 감싸주세요. 여인에 대해 알지 못해 서툰 것뿐이세요. 그러니까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비비안이 말했다.
비비안은 엘레나를 가둔 것 역시 그저 칼립소의 변덕이라고 생각했다. 여인을 가까이하지 못했던 칼립소가 여인의 마음을 알지 못할 테니 실수한 것이라고.
그러니까 또 이렇게 선물을 잔뜩 보내면서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비안, 그런 게 아니야.”
“그럼요?”
비비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여튼 좀 사정이 있어.”
칼립소는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분노한 것이다.
몸을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정부로 끌려왔던 그녀를 로하스관으로 보낸 것은 신뢰를 기반해서였다. 거기에 신녀까지 불러 주었다. 그걸 고스란히 배반했으니 당연히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야기해 주어서 고마워.”
비비안은 엘레나를 안타깝게 보았다.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둘은 분명 사랑하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서로들을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도 그랬다.
폐하가 보낸 선물은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여인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귀한 물건들이었다.
그걸 열어보지도 않고 창고에 넣으라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일만 하신담?’
로하스관에 돌아온 엘레나는 이전보다 업무량이 두 배 정도 늘어난 것 같았다.
비비안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