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자신을 껴안는 손이 느껴졌다.
보름이니까…….
‘빌어먹을.’
그래서 받아준 거겠지.
알면서도 헤어나올 수가 없다.
달빛이 들어오는 밤 내내 칼립소는 엘레나의 몸에 자신을 묻었다.
아침이 되자, 엘레나는 눈을 떴다.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는 칼립소의 모습이 보였다.
순하게 잠든 그의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주자, 자신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아직 졸린가.’
엘레나는 뻐근한 몸을 침대에서 일으키려 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다시 칼립소의 몸이 조여든다.
“더 자자…….”
칼립소가 커다란 몸으로 이불처럼 그녀를 감쌌다.
“그동안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어.”
어젯밤 보았던 핏발 선 눈동자가 떠오르면서 엘레나의 마음도 스르르 약해졌다.
다시 누우려던 엘레나가 화들짝 놀랐다.
‘아차.’
뒤늦게 어젯밤에는 주피터 열매를 먹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설마하니 칼립소가 올 줄은 몰랐다.
‘안 되는데…….’
그 때 커다란 손이 다시 허리를 감쌌다.
“자자니까.”
칼립소의 팔이 엘레나의 몸을 덮었다.
토닥토닥.
마치 자신을 재우려는 듯한 그의 서툰 몸짓에 어이가 없을 때쯤, 칼립소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다시 들렸다.
‘정말 잠을 못 잤나?’
좀 더 재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엘레나도 그 안락한 느낌에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피곤하기는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결국 칼립소가 일어난 건 꼬박 하루를 잔 후였다.
칼립소는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다.
미세하게 따라다니던 두통과 무거운 피로감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몸 전체를 도는 피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일어났어요?”
꽤 오래전 일어나 있었는지 엘레나의 눈은 초롱초롱했다.
“얼마나 잔 거지?”
“하루 꼬박이요.”
칼립소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데릭 경이 잠을 통 자지 못했다고 하던데…….”
“맞아.”
오죽하면, 칼립소가 잠에 들었다고 하니 절대 깨우지 말라고 데릭이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칼립소의 얼굴을 보면서 엘레나는 그 역시 편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칼립소의 시선인 엘레나와 부딪혔다.
“그래.”
칼립소가 순순히 인정하자, 엘레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먼저, 약속을 어겨서 미안해요.”
가이아의 신녀를 보내준다고 했을 때, 가이아 제국과 따로 연락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기억한다.
비록 치유력 때문에 가이아의 대신녀와 소통한 것이지만, 약속을 어긴 것은 사실이었다.
미안하다는 사과에도 칼립소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눈썹을 한 번 살짝 들어 올렸을 뿐이다.
“하지만 가이아의 대신녀와 치유력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어요. 그건 믿어도 돼요.”
칼립소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자신의 말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칼립소는 골똘히 한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아에 대한 정책을 그대로 유지해줘서 고마워요.”
비비안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가이아의 문화 정책은 엘레나가 펼친 그대로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엘레나의 부재로 인해 임시로 노아를 대표로 선정했으며, 사업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칼립소는 별 반응이 없었다.
“듣고 있는 거죠?”
아무래도 불안한 나머지 엘레나가 되물었다.
“그래.”
그제야 칼립소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향했다.
막상 붉은 눈빛을 마주하자, 왠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엘레나는 입술을 축였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줄은 모르지만, 난 치유력을 잃었어요. 그래서 당신과 세 번의 밤을 보내야 했어요.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맞아요. 보름, 삭, 그리고 다시 보름에 밤을 보내면 내 능력을 되찾을 수 있어요. 그래서 보름에 밤을 보내자고 한 거예요.”
당신에게 피를 제공해서 그렇다는 말을 하려다 삼켰다.
이 사실은 평생 비밀이 되는 편이 좋았다. 적국의 황제를 살려준 셈이니, 알려져서 좋을 것도 없었다.
“당신 입장에선, 이용당한 거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 역시 미안해요.”
엘레나는 담담히 말했다.
이 정도면 할 말은 다 한 셈 아닐까.
“할 말은 끝났나?”
“그래요. 이제 폐하의 차례예요.”
“내 차례?”
칼립소의 눈썹이 올라갔다.
“날 이대로 계속 여기 둘 건가요?”
그동안 속인 것의 대가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칼립소에게선 말이 없었다.
엘레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칼립소의 말을 기다렸다.
“한때는 당신과 다른 미래를 꿈꾼 적도 있었지.”
중얼대듯 뱉던 칼립소가 고개를 들었다.
“원하는 게 뭐지?”
“로하스관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 그렇게 해.”
생각보다 쉽게 칼립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당장 로하스관으로 돌아갈게요.”
엘레나는 칼립소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아무 말 없는 칼립소가 이상했다.
뭔가 기다리는 듯한, 무엇을 갈망하는 듯한 표정이 잠시 스쳐 가더니, 다시 딱딱한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표정이 없어졌다.
“대신 앞으로 가이아 제국의 신녀와는 만나지 마시오.”
각오했던 일이었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어요.”
“가이아의 신녀뿐 아니라 가이아인과의 접촉도 금하겠소.”
“하지만 로하스관에 돌아가서 일을 하려면 가이아인들을 만날 수밖에 없어요. 그 정도는 용인해줘요.”
엘레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칼립소를 바라봤다. 하지만 칼립소의 표정은 차가웠다.
“가이아 제국과 직접 소통은 하지 않을게요. 다만 여기서 벌여놓은 일은 제대로 마무리 짓고 싶어요.”
엘레나의 눈이 칼립소의 얼굴을 맴돌았다.
어떻게 해야 칼립소의 마음을 돌릴까.
“내 능력을 가져갔잖아요.”
무표정했던 칼립소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러면 그 정도는 해줘도 되잖아요.”
“그렇군.”
칼립소가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두 번의 밤도 협조했으면 좋겠어요.”
“그건 당신에게 달렸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엘레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능력의 비밀이 밝혀진 이상 다시 빼앗아오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하필 왜 이런 일이 일어나서.’
엘레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로써 우리의 연애는 종료된 건가?”
칼립소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건 당신한테 달렸죠.”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예요.”
담담히 똑같이 돌려주는 엘레나의 말에 칼립소는 시선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살폈다.
무언가를 찾는 듯이.
그러더니 칼립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겠소.”
예를 갖추려는 엘레나에게 됐다고 손짓을 한 칼립소는 일어나 떠났다.
엘레나는 돌아가는 칼립소의 뒷모습을 앉은 채로 바라봤다.
떡 벌어진 어깨에 화려한 망토.
제국을 지배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무소불위의 권력도 가진 남자.
다 가진 자인데 뒷모습이 왠지 쓸쓸하게 보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 *
엘레나는 로하스관으로 돌아갔다.
마음속에 뭔가 미진함이 남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협상이었다고 생각했다.
‘능력을 돌려받는 부분은 어떻게 하지?’
삭, 다시 보름.
두 번의 밤이 남았다.
「그건 당신한테 달렸어.」
하지만 지난 보름밤을 생각하니 다시 그를 유혹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하자.’
엘레나는 로하스관을 가서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엘레나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노아가 제일 먼저 찾아왔다.
“그동안 무사하셨습니까?”
노아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본 엘레나는 설핏 웃었다.
“심려를 끼쳤군요.”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노아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제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요. 다들 열심히 하는 통에 저는 손댈 일도 없었습니다.”
노아의 말대로 가이아인들의 활동은 빠르게 확장되었다.
가이아인들의 생산품 역시 반응이 뜨거웠다.
“특히 여성 드레스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케이타 제국에서는 여인들이 샤오르를 주로 입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을 텐데요.”
“최근에 황제 폐하께서 정책을 바꾸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이아 문화에 대한 적극 장려 정책으로요.”
노아의 얼굴에선 기쁜 빛이 감돌았다.
자신이 처음 케이타 제국으로 왔을 때 꿈꿨던 일이 실제로 펼쳐지고 있었다.
하루하루 상황이 달라졌고, 그걸 눈으로 직접 보는 감동이 색달랐다.
“특히 올해에는 가이아 제국과의 무역에 대해 무관세 정책을 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가이아 제국에도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노아의 말을 들은 엘레나가 놀랐다.
이렇게까지 케이타 제국에서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잘됐네요. 이번 기회에 적극적으로 돕도록 하세요.”
“네, 그리고 이건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엘레나는 서류를 찬찬히 훑어봤다.
노아가 임시 총책임자로 선정되었다고 들었을 때, 엘레나는 안도했다. 가장 연장자이자 지혜로운 그가 있다면 사람들도 쉽게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추측이었다.
역시 노아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뤄냈다.
“정리가 잘 되었네요. 시간도 없으셨을 텐데.”
“노인네라 밤잠이 없습니다.”
노아의 농에 엘레나가 살짝 웃었다.
“앞으로도 지시하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맡겨주세요. 홀로 어려운 중책을 감당하시다 병이라도 날까 봐 이 노인네가 노심초사합니다.”
오랜만에 들은 따뜻한 말에 엘레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