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67화 (6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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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켜있던 근육들을 섬세하게 풀어주는 느낌이었다.

뻐근했던 몸이 점차 시원해졌다.

“으음…….”

기분 좋은 음성이 엘레나에게 새어 나왔다.

“한숨 주무셔도 됩니다.”

마사지가 계속될수록 몸이 나른해졌다.

어제의 긴장과 격렬한 정사 탓에 몸이 피로했다.

대신녀의 말대로 치유력도 사라졌는지 예전보다 더 피로감을 느낀 것 같았다.

엘레나의 눈이 이내 스르르 감겼다.

* * *

엘레나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눈을 뜨자, 이제는 칼립소가 앞에 있었다.

“일어났소?”

“내가 얼마나 잤나요?”

“오후 내내.”

오전 내내 칼립소의 몸은 긴장 상태였다.

아침에 창백해진 엘레나의 몸을 봤을 때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침대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에 대한 환멸까지 느껴졌다.

잘 먹고, 마사지를 받고 잔다는 말을 듣자,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더 누워있어도 돼.”

엘레나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칼립소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엘레나는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너무 오래 머물렀어요. 이제 돌아가야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하루를 통째로 날리다시피 했으니, 할 일이 태산일 것이다.

“굳이 왜?”

칼립소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라니요? 당연하잖아요.”

엘레나는 몸을 반쯤 일으켰다.

“이제부터는 그냥 여기에 머물러.”

위압적인 말투에 엘레나는 시선을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야. 여기에서 생활하라고.”

다시 한번 분명히 칼립소가 말했다.

“이해를 못 하겠어요. 로하스관에서 할 일이 많아요. 가이아 예술가들이 지금 막 활동을 시작했어요. 이건 가이아인들만을 위하는 게 아니에요.”

케이타인들은 흡수가 빨랐다.

특히 청년층은 놀라울 정도였다. 가이아 제국에 대한 편견이 없는 그들은 가르쳐주는 빠르게 배웠고, 자신들의 기술과 결합해서 응용했다.

이대로라면 케이타 제국도 조만간 엄청난 발전을 할 것이다.

“케이타인들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가이아인들 뿐 아니라 케이타 제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에요.”

“그딴 건, 다른 사람에게 맡겨.”

‘그딴 거?’ 엘레나는 여태껏 자신이 한 노력을 부정하는 듯한 말에 거부감이 들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엘레나가 똑바로 일어나 앉아 딱딱하게 물었다.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죠?”

“……”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이상했어요.”

그냥, 넘기려 했는데 아무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여기에 머물러야 하는 진짜 이유가 뭐죠?”

한동안 침묵이 계속됐다.

방 안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칼립소였다.

“가이아의 대신녀와는 언제부터, 어디까지 소통하고 있었지?”

엘레나의 낯빛이 하얘졌다.

“……!”

“보름에 한 번, 삭에 한 번, 다시 보름에 한 번.”

칼립소의 몸에서 화가 피어올랐다.

“어떻게 그걸…….”

“속이려면, 철저히 속이던가. 아니면 나한테 솔직히 말하고 제대로 이용을 하던가.”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아요.”

“무슨 오해?”

“…….”

엘레나는 입을 열어 이야기하고 싶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를 속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처음부터 나한테 진심 따위는 없었잖아.”

칼립소의 붉은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그걸 몰라봤으니, 나야말로 등신이지. 상대의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 구별도 못 하고. 혼자서 좋아서 날뛰었으니 구경하는 재미는 좋았을 거야.”

그게 아니라고.

구경하는 재미 따윈 없었다고.

같이 느낀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말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변명이라도 해봐.”

엘레나는 아무 말 없었다.

무거운 공기가 참을 수 없이 사방을 짓눌렀다.

쨍.

갑자기 칼립소가 검을 꺼내 높이 들었다.

꿀꺽, 엘레나는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할 말이 없어?”

팽팽한 긴장이 침실 안을 가득 채웠다.

“…….”

잠시 후,

검이 내리쳤졌지만, 그건 엘레나를 향한 게 아니었다. 검은 칼립소의 팔을 스쳤다.

칼립소의 팔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것을 보는 엘레나와 칼립소는 둘 다 말이 없었다.

피가 흐르던 칼립소의 팔은 빠르게 아물어 갔다.

“젠장.”

거의 다 아문 칼립소의 팔을 엘레나는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봤다.

“지독한 악연이지?”

그 말을 남긴 채, 칼립소는 방 밖으로 나갔다.

* * *

서재 안에 홀로 앉은 칼립소의 기분은 깊게 가라앉았다.

눈으로 다시금 회복과정을 보니 더 놀라웠다.

‘치유력이라.’

칼립소는 아까 검에 베였던 팔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거의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천금보다 귀한 능력을 가졌지만, 지금은 착잡하기만 했다.

‘가이아 황녀의 능력.’

칼립소는 눈을 감았다.

왜 이런 능력이 내게 왔을까. 능력이라는 것이 이렇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칼립소는 데릭을 호출했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데릭이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 엘레나 님이 황궁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긴장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너의 말이 맞았어.”

칼립소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가이아의 신전에 방비를 강화해.”

“알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경계하는 것을 가이아의 신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 아니면 아예 우리 편으로 포섭해도 좋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줘.”

“네, 폐하.”

데릭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 펼치고 있는 가이아인들에 대한 정책은 어떻게 할까요?”

“뭘?”

“자치구의 가이아인들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왜 나오지? 그냥 지금처럼 놔둬.”

“하지만 귀족들의 불만이 있어 보입니다.”

“무슨 불만? 가이아인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는 불만?”

칼립소가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가이아 제국의 문화는 받아들일 점이 많아. 향후 케이타 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될 테고. 이 문제와는 별개야.”

그 점에 있어서는 데릭도 동의했다.

“엘레나가 하고 있는 일은 옳아.”

칼립소는 무겁게 중얼거렸다.

엘레나가 펼치는 일에 대해 지지했다.

자신이 엘레나에게 실망한 것은 다른 것이니까.

“그럼, 엘레나 님에 대한 처우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정부로 데려왔잖아. 그러니 당연히 황궁에 머물러야지.”

칼립소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엘레나의 지위는 내리되, 지금까지 가이아인들에 대한 지원은 그대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하나 더.”

칼립소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자세히 알아봐. 엘레나가 왜 치유력이 뺏기게 되었는지 말이야.”

“알겠습니다.”

“가이아에 사람을 보내 그간의 사정을 알아봐. 분명 처음 포로로 잡혔을 때는 치유력이 있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행적을 모두 알아보도록 해. 그리고 신탁의 계시에 대해서도 알아봐.”

“신중히 행하겠습니다.”

“가이아의 신녀에 대한 감시도 소홀히 하지 말고. 르엘에게는 지금처럼 신뢰를 잃지 말라고 당부하고.”

“예, 폐하.”

칼립소는 피곤한 표정으로 손짓했다.

어서 가서 일하라는 뜻이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데릭은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건 간언이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데릭이 맡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나갔다.

* * *

어젯밤, 칼립소가 방에서 떠난 후, 엘레나는 생각이 많았다.

「이곳에 있어.」

‘도대체…….’ 어떤 식으로 비밀이 새어 나갔을까.

캐서린 말고는 세 번의 밤에 대해 알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설마, 캐서린이?’

엘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케이타 제국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내통할 누군가가 있을 리가 없다.

‘어쨌든 능력을 뺏긴 건 사실이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어젯밤 똑똑히 봤다. 칼립소의 팔이 빠르게 치유되는 모습을. 심지어 놀라운 속도로 치유되는 모습에 말을 잊었다.

엘레나는 자신의 몸을 살펴봤다.

아직도 얼룩덜룩한 흔적은 보통의 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립소를 만나야겠어.’

마사지를 받은 후라서 몸의 움직임은 한결 부드러웠다.

하지만, 엘레나가 문을 여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덜컹. 덜컹.

흔들리는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이런.’

절망적인 마음에 엘레나는 스르르 주저앉았다.

‘또다시 감금된 건가.’

다시 처음과 같아졌다.

엘레나는 힘없이 침대로 돌아왔다.

그 후, 엘레나는 방에서만 지냈다. 사흘 동안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서지 못한 채, 마사지를 받고, 식사를 했다.

하지만, 내내 갇혀 있다 보니 점점 입맛도 잃었다.

“엘레나 님, 좀 더 드세요.”

처음과 비교해서 식사량이 반도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비비안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아.”

“얼마 드시지도 않았잖아요.”

수프 몇 번 숟가락질을 한 것이 식사의 전부였다.

“어차피 하는 일도 없는걸.”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지내시다가는 몸이 축나게 돼요.”

비비안의 간절한 말에도 엘레나는 더 이상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로하스관으로 갈 수는 없는 거지……?”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이곳은 정부가 머무는 곳.

또다시 정부 취급이라는 사실에 엘레나는 절망스러웠다.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비비안.”

“네, 엘레나 님.”

“가이아인들은 어떻게 되고있는지 아는 바가 있어?”

갇혀 있다 보니, 걱정되는 건 가이아인들에 대한 처우였다.

혹시 자신에 대한 앙갚음으로 가이아인들의 처우를 바꿔놓지는 않았을까.

다시 노예 신세로 되돌아간 건 아닌지, 지원금을 끊은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로 염려가 되었다.

“알아볼까요?”

“그럴 수 있어?”

“네.”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좀 더 드세요.”

“알았어.”

조금 기운이 생긴 엘레나가 숟가락을 들었다.

“이 그릇은 다 비워야 해요.”

차마 폐하의 지시가 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매번 식사량을 확인하는 통에 비비안도 죽을 맛이었다.

“그래, 알았어.”

엘레나는 기운을 내어 겨우 숟가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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