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65화 (65/100)

65

파라솔을 보낸 시종의 보람도 없이 엘레나는 홀로 정원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지났다.

아마, 그녀의 성격이라면 오늘 밤 내내 저러고 있겠지.

휘영청 밝았던 보름달이 이제는 검은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칼립소는 왠지 모를 짜증, 아니 화가 끓어올랐다.

저리 계속 서 있으면, 감기가 들 것이다.

‘젠장, 엘레나.’

칼립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두고 볼 만한 인내심은 남아있지 않았다.

“폐하, 조금만 천천히 가 주십시오. 옷이 젖습니다.”

우산을 들고 따라오는 시종의 발걸음을 칼립소가 앞섰다.

빗방울이 내리쳤지만 상관없었다.

“엘레나!”

“폐하.”

올 것을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담담하면서도, 평온한 눈빛을 보자,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칼립소는 망토를 벗어 엘레나를 감쌌다.

“오늘은 못 만난다고, 로하스관에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소! 왜 여기까지 와서…….”

“오늘, 보름이잖아요.”

그 말에 칼립소의 가슴이 찌릿했다.

“보름에 우리 만나기로 했잖아요.”

환하게 웃는 엘레나의 얼굴은 유혹적이었다.

그저 엘레나가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용인하고 싶을 정도로.

“엘레나.”

파리하게 질린 입술이 안쓰러워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춥잖아.”

“전장에서는 더한 날씨에도 있었는걸요.”

움직이는 입술이 칼립소의 손가락을 자극했다.

칼립소는 엘레나의 허리를 이끌었다.

본능적으로 입술을 내렸다.

지금은 오직 하나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저 입 안을 맛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만이 칼립소의 머릿속을 맹렬히 지배했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칼립소의 입술이 파고들었다.

아무리 차가운 비도 두 사람의 열기를 식힐 수는 없었다.

거의 입술을 물어뜯을 기세로 덤비던 칼립소는 엘레나의 숨결을 몇 번 호흡하고는 부드러워졌다.

엘레나가 당황할 정도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몸짓으로 입 안을 느리게 훑었다.

입천장을 두드리기도 하고, 볼 안쪽을 쓰다듬기도 하고, 어쩐지 애달파지는 키스였다.

오히려 적극적인 건 엘레나 쪽이었다.

칼립소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 안으로 깊숙이 혀를 집어넣었다.

그가 했던 행동을 따라 하면서도 좀 더 진하게 얽혀갔다.

마지막으로 깊게 키스를 하고, 입술을 떼자, 칼립소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엘레나의 눈꼬리가 유혹적으로 올라갔다.

한숨 같은 소리가 들리며, 칼립소는 엘레나를 들어 올렸다.

“들어가지. 안으로.”

보름달이 검은 구름 사이로 조금 모습을 비쳤다 사라졌다.

이제 보름밤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가 왔으니까.

엘레나는 탄탄한 칼립소의 가슴에 뺨을 대었다.

차가운 비바람과 달리 칼립소의 품은 안락했고, 따뜻했다.

‘이제 됐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엘레나가 뺨을 기대자, 칼립소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황궁에 들어가자, 칼립소가 향한 곳은 엘레나의 예상 밖이었다.

칼립소가 침실이 아닌, 응접실로 그녀를 안내했기 때문이다.

칼립소의 손짓에 따라 시종이 따뜻한 차와 간식을 내왔다.

“들지.”

빗속에 있었기에 따뜻한 차가 반가웠으나, 엘레나가 원한 건 이런 것이 아니었다.

아, 뜨거.

엘레나는 차를 급하게 마시다, 멈칫했다.

“천천히.”

칼립소가 아기 다루듯 엘레나의 찻잔을 빼앗아 호호 불었다.

그리고 다시 엘레나 앞에 찻잔을 놓았다.

적당히 식은 차를 엘레나가 서둘러 마셨다.

“쿠키도 좀 들어.”

칼립소는 쿠키 접시를 엘레나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몸을 물려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이상했다.

칼립소는 지나치게 신사처럼 굴었다.

쿠키 접시를 미는 것이 아니라, 직접 먹여주는 것이 더 어울렸다.

아니, 쿠키를 먹여주면서 아까의 행동을 이어가는 편이…….

엘레나는 쿠키를 한 입 베어 먹다가 내려놓았다.

“씻고 싶어요.”

“그래.”

칼립소는 깔끔하게 일어났다.

자신이 씻겨주겠다는 둥의 말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화난 사람인 양 서둘러 자리를 떴다.

대신 비비안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엘레나 님, 이쪽이에요.”

엘레나는 욕실로 가는 동안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봤다.

보름밤이 얼마 남지 않았다.

“비비안, 물러가. 혼자 씻을 테니.”

엘레나는 비비안을 물리고 간단히 씻었다.

“옷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걱정 마세요. 제가 챙겨올게요.”

재빨리 씻고 나온 엘레나에게 비비안은 하얀색의 샤오르를 내밀었다.

오늘은 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얀색 샤오르를 입으면서도 엘레나는 귀걸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샤오르를 입고 단장을 마치자, 엘레나는 아까 그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아까와 같은 차림으로 뒤돌아있는 칼립소의 모습은 뭔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유혹해야 하나?’

엘레나가 다가오자, 그 기척을 느낀 것처럼 칼립소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응접실 통창에 비친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칼립소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그 가운데 붉은 눈동자만 유난히 빛나서 오히려 무서워 보일 정도였다.

“앉아. 엘레나.”

엘레나는 자리에 앉았다.

앞에는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따뜻한 수프와 간단하게 먹을 만한 빵이 놓여있었다.

“지금은 별로 배고프지 않아요.”

“몇 시간 동안이나 밖에서 서 있었다고 들었소. 비도 많이 맞았고.”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제야 엘레나의 마음은 안심이 됐다.

자신이 걱정돼서 그랬구나.

“그럼, 들지.”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다른 거 하고 싶어요.”

칼립소는 엘레나는 찬찬히 살폈다.

방금 목욕을 해서인지, 엘레나의 투명한 피부는 빛이 날 지경이었다.

고개를 흔들 때마다 반짝이는 귀걸이는 하얀 목선을 더욱 부각시켰다.

다른 거라.

평소라면 저 말에 얼마나 심장이 뛰었을까.

“좀 더 먹는 게 좋을 거야.”

칼립소가 다시 음식을 가리키자, 엘레나가 싱긋 웃었다.

“내 체력을 걱정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달뜬 표정의 엘레나를 보며 칼립소는 차갑게 말했다.

“다행이네. 그럼, 일어나지.”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칼립소의 침실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밤이 늦었으니, 올라가서 푹 쉬시오. 비비안이 손님 침실로 안내해 줄 거요.”

칼립소가 돌아서는 것을 보고 엘레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나 혼자만 기대한 건가.

“폐하.”

엘레나가 칼립소의 앞으로 갔다.

“설마, 나 혼자 자라고요?”

“오늘 밤 말고도 날은 많아. 오늘은 비도 많이 맞았으니, 쉬는 게 좋겠소.”

“싫어요.”

“엘레나.”

엘레나는 발끝을 올려 칼립소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제발, 말 들어.”

으르렁거리는 칼립소의 입술에 다시금 살며시 부딪혔다.

팔을 뻗어 칼립소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당겨진 칼립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칼.”

이름을 부르자, 칼립소의 몸이 굳었다.

“날, 원하지 않아요?”

엘레나는 칼립소의 붉은 눈동자를 곧게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안 그런 척하지만 칼립소도 자신을 원한다는 것이다.

엘레나는 다시 칼립소의 입술에 자신의 혀를 내어 살살 파고들었다.

뜨거운 입 안을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칼립소는 어정쩡한 자세로 허공에 손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차마 엘레나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망설이는 칼립소를 보며 엘레나는 답답했다.

그토록 기다린 밤인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토록 참아왔는데, 왜 물러서는 것인가.

고작 비 좀 맞았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일 아프더라도 자신에게는 치유력이 있다.

오늘 보름밤만 보내면 완전히 자신의 것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럼, 감기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을 텐데.

엘레나는 사랑스럽다는 듯 칼립소의 얼굴을 만졌다.

무엇보다 오늘은 마지막 밤, 이날을 놓칠 수 없었다.

마주친 칼립소의 눈빛에는 혼란의 기색이 가득했다.

엘레나는 눈을 깜빡이며, 귀를 흔들어 보였다.

짤랑.

귀걸이가 흔들리면서 칼립소의 붉은 눈이 하얀 목덜미에 박혔다.

도톰한 귓불과 새하얗고 긴 목에 시선을 빼앗겼다.

결국 칼립소의 얼굴이 거기에 파묻혔다.

칼립소는 코끝과 뜨끈한 입술로 엘레나의 맨살에 부벼댔다.

마치 생명수를 마시는 것처럼 확 들이켰다가, 다시 뱉어냈다.

“알잖아, 미치도록 당신을 원해.”

“그럼, 침대로 가요.”

“정말 그걸 원해?”

“물론이죠.”

“당신이 선택한 거야. 후회하지 마.”

후회할 리가.

엘레나는 기꺼이 칼립소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몸이 들렸다.

엉덩이 아래로 칼립소의 탄탄한 손이 느껴지나 싶더니 한 손으로 엘레나를 가볍게 들었다.

성큼성큼 가는 발걸음 사이로 엘레나는 창밖을 봤다.

창으로 보이는 밤은 아직 캄캄했다.

침실 문까지 가는 칼립소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커다란 침대 위에 엘레나를 내려놓았다.

“엘레나, 왜 꼭 보름이어야지?”

칼립소의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굳이 보름이 아니어도 상관없잖아.”

칼립소의 말투가 어딘가 괴로운 것 같았다.

“그건…….”

망설이는 엘레나를 보면서 칼립소는 간절히 바랐다.

지금이라도 사실을 털어놓기를.

만약 그렇다면, 기꺼이 따라줄 용의도 있었다.

치유력 때문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자신의 능력을 되찾고 싶은 것은 당연한 순리.

칼립소가 참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이제라도 엘레나가 사실대로 말해주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덮을 용의도 있었다.

“그건…….”

“말해.”

“지금 그게 중요한 거 같진 않아요.”

끝까지 엘레나가 입을 다무는 것을 보고, 칼립소의 눈빛이 사납게 빛났다.

“정 그렇다면야.”

칼립소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미소를 띠는 것처럼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잔인해 보이기도 했다.

저 웃음은 진심이 아니다.

칼립소가 화가 날 때, 저렇게 웃는다는 것을 엘레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왜, 화를 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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