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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64화 (6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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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샤오르를 입는 것은 지루했다.

저번에 칼립소도 다른 의상으로 깜짝 놀라게 해 주지 않았는가.

오늘, 엘레나는 가이아의 드레스를 입어보기로 했다.

마침 며칠 전 만들어 놓은 가이아의 드레스가 있었다.

가장 먼저 황녀님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어 준다며, 제임스가 특별 제작한 드레스였다.

시녀 없이 입기에는 다소 어려운 드레스였으나, 비비안이 없기에 엘레나는 혼자 입어보기로 했다.

한 가지 색만으로 이루어진 샤오르와 달리, 가이아의 드레스는 여러 색깔의 배합이 일품이었다.

이번 드레스는 보라색이 메인으로 되어 있지만, 은빛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고, 소매 끝은 금사로 수를 놓아 처리되어 있었다.

샤오르와 달리 가슴 부근이 살짝 드러나,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허리를 강조하고 하체를 부풀려 여성적인 매력을 드러냈다.

엘레나는 거울을 보며 허전한 가슴 부근을 매만지다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가이아의 목걸이와 귀걸이를 꺼냈다.

어머니가 챙겨주셔서 가져오기는 했으나, 이곳에서는 따로 장신구를 할 이유가 없었다.

「얘야, 귀걸이를 하면 미모가 다섯 배는 상승한단다. 한번 봐보렴. 이렇게 하고 고개를 흔들어 봐. 그럼, 사내치곤 넘어가지 않는 법이 없지.」

매일 검만 쥐고 사는 엘레나를 거울 앞에 앉히며 엘리자베스가 한 말이었다.

그때는 흘려들었었는데, 새삼 그 말을 떠올린 엘레나는 보석함을 열었다.

반짝이는 금강석 귀걸이가 시선을 끌었다.

‘칼립소도 나를 위해 해줬잖아.’

근사하게 변해버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뛰던 날을 기억했다.

오늘은 그를 위한 작은 변신을 해보리라.

엘레나는 여인으로 챙겨야 할 다른 도구를 꺼냈다.

방법은 알지만, 거의 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특히 자신의 손으로는.

엘레나는 곱게 빻은 녹색의 공작석을 손가락에 묻혀 눈덩이 위로 뿌렸다.

흔히들 하는, 눈썹이나 입술에 색감을 더하거나, 피부에 백색 가루를 뿌리는 일은 필요 없었다.

요사이 햇빛을 보지 못해서인지 엘레나의 피부는 더 투명해졌으며, 태어날 때부터 숱 많은 머리와 눈썹은 오히려 덧붙이는 것이 과해 보였다.

대신 엘레나는 입술에 레드오커를 발랐다.

‘너무 과한가.’

한 번도 안 해보던 화장을 하려니, 스스로도 어색했다.

‘그래도 로하스관 안이니까 괜찮을 거야.’

엘레나가 속으로 다독이고 있을 때, 아래층에 인기척이 들렸다.

‘드디어!’

엘레나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쌘 동작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간 순간, 진한 실망감이 올라왔다.

그곳에 칼립소는 없었다.

“비비안.”

“엘레나 님, 왜 이렇게 아름다우세요? 천사가 내려오는 줄 알았어요. 이게 가이아의 전통의상인가요?”

“그건 아니고, 가이아 사람이 만든 드레스는 맞아.”

“너무 아름다우세요.”

비비안의 눈에서는 찬탄의 빛이 어렸지만, 엘레나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엘레나의 눈은 비비안의 너머로 뭔가를 찾는 듯 분주했다.

“폐하는?”

“엘레나 님, 오늘 폐하께서는 무척 바쁘십니다.”

“바쁘시다고?”

예상하지 못한 말에 엘레나는 당황했다.

“사실, 황궁에 가서 알현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요.”

“로하스관에서 왔다고 말했지?”

“물론입니다.”

“내가 보냈다는 것도?”

“네.”

비비안은 말을 삼켰다.

로하스관에서 엘레나 님이 보낸 거라고 몇 번을 말했음에도 알현을 할 수 없다고 내쫓기다시피 했다.

겨우 만나게 된 데릭 경의 입에서는 오늘 중으로는 만나기 어렵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아마 오늘 중 만남은 어려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엘레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늘, 못 본다고? 그럴 리가.’

엘레나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폐하의 명이 있기까지 로하스관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애달아 하는 것은 늘 칼립소 쪽이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황제였다. 만날 시간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후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오전의 흥분은 온데간데없어졌다.

‘그래, 저녁에는 올 거야.’

하지만 막상 어둠이 내리기 시작해도 칼립소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보름에 봅시다」

분명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조한 나머지 양손을 꼭 쥐고 정원으로 나갔다.

환한 보름달이 엘레나를 반겼지만, 즐길 수 없었다.

‘오늘은 꼭 같이 보내야 해.’ 엘레나는 비비안을 불렀다.

“마차를 준비해 줘. 황궁으로 가야겠어.”

“엘레나 님, 폐하께서는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가야겠어.”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비비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두 분이 연애 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로하스관을 찾아오는 폐하의 얼굴에서는 감출 수 없는 설렘이 느껴졌으니까.

더구나 차림새도 몰라보게 바뀌셨고, 엘레나 님을 대하는 태도에는 사랑이 묻어났다.

하지만 지엄하신 황제 폐하였다.

기다리라고 했으면, 기다려야 했다.

그것도 고작 하루가 아닌가.

엘레나 님이 그리 분별없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러운 고집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마차를 준비해.”

“엘레나 님. 제발, 진정하세요.”

이제 비비안은 거의 울 듯했다.

분명 데릭 경은 기다리라고 했다.

이대로 마차를 준비하는 것은 지엄한 명을 어기는 것과 같았다.

“엘레나 님, 폐하께서는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보름에 보기로 했어.”

“엘레나 님,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날은 많습니다. 그러니 제발 진정하시고……”

“마차를 준비시키지 않으면 혼자라도 가겠어.”

엘레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비비안은 할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엘레나의 말은 진심이었다.

게다가 승마도 능숙하시니, 황궁으로 혼자 갈 수도 있었다.

둘 다 나쁘지만, 말을 타고 홀로 황궁에 가는 편이 더 나쁠 것이다.

비비안은 울며 겨자먹기로 마차를 준비했다.

* * *

엘레나가 마차를 타고 황궁에 도착하자, 이전과는 대접이 달랐다.

분명, 이전에 왔을 때는 한 번에 통과된 것 같은데, 세세한 간섭이 많았다.

샤오르를 입고 오지 않은 탓에 황궁에 들어서면서부터 주목을 받았고, 여기저기서 쑥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직접 알현을 청했지만, 비비안의 말대로 오늘 알현은 어렵다어렵다는 답만 돌아왔다.

예약을 하겠냐는 물음에 엘레나는 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밤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알현 신청이 허사로 돌아갔으나, 엘레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알현 신청장이 문을 닫자, 엘레나는 정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탑에 갇혀 있을 때, 왔던 곳이었다.

오수를 즐기고 있을 때, 파라솔을 가져다주었던 칼립소의 행동이 기억났다.

자신이 황궁에 왔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의상 때문이라도 화제가 되는 것을 똑똑히 봤으니까.

똑.

또똑.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엘레나 님, 비가 와요. 제발 로하스관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엘레나 님.”

비비안이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따라 왜 이리 고집을 부리시는 줄 모르겠다.

안절부절 못하던 비비안은 황급히 어디선가 파라솔을 빌려 왔다.

조금씩 내리던 빗방울은 점점 굵게 바뀌었다.

“엘레나 님!”

거센 비에도 엘레나는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눈 위로 곱게 칠했던 녹색 공작석은 떨어져 나갔고, 레드 오커도 흘러내렸다.

“엘레나 님! 여기로 들어오세요. 비가 점점 많이 와요.”

“괜찮다니까.”

엘레나는 손바닥을 폈다.

투둑, 투둑, 투두둑.

빗방울이 손바닥에 마구 튀었다.

오랜만에 비를 맞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까운 보름날이 점점 지나고 있었다.

제발, 이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보름날이 끝나기 전에

칼립소가 자신을 찾아주길.

한편, 집무실에 있는 칼립소의 심기도 편안하지 않았다.

어젯밤, 칼립소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오늘은 아침부터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세 번의 밤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데릭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보름에 한 번, 삭에 한 번, 다시 보름에 한 번이라니!

자신과의 아름다웠던 잠자리가 대신녀의 지시에 의해서였다니 말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정말 그런 걸까.

두 번의 밤은 단지 치유력을 되찾기 위한 수단이었단 말인가.

서로의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말 못 할 배신감에 칼립소는 보름이 되었건만 로하스관으로 가지 않았다.

엘레나 역시 그냥 보름을 넘어가 주길 바랐다.

아무 일 없이 보름을 넘어가서, 데릭의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길 바랐다.

그랬다면 보름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대가로, 그녀를 잠시나마 의심한 대가로, 발밑에 엎드려 다시 구애하리라.

단단히 결심한 칼립소는 그토록 기다렸던 보름밤이건만 아침에 엘레나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오전에 비비안이 알현을 청했을 때 돌려보냈다.

첫 약속을 어기는 것이니, 비비안 정도야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약속을 어긴 보답은 나중에 배로 갚아주겠다.

그러니 제발 오늘은 그냥 넘어가 달라고.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기어이 왔단 말인가.’

오후가 지나고, 저녁이 되자 엘레나가 직접 황궁으로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과 제발 돌아가줬으면 하는 마음이 뒤섞였다.

황궁은 온통 엘레나의 이야기로 들썩였다.

그녀의 의상에 대해, 그녀의 반짝이는 귀걸이에 대해, 그녀의 미모에 관한 찬양이 끝없이 이어졌다.

안 듣는 척하면서도 칼립소의 눈과 귀가 집중됐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매혹적인 줄은 이미 충분히 아니까.

알기에 더 보고 싶었지만, 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았다.

투툭.

칼립소는 빗방울을 떨어지는 정원을 바라봤다.

간신히 눌러담은 마음이 새나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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