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63화 (63/100)

63

칼립소가 데릭의 멱살을 잡았다.

숨이 컥 막혀버린 데릭이 바둥거렸다.

여기서 칼립소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방금 한 말, 책임질 수 있어?”

“제…… 제 가족의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데릭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굳이 보름을 정한 것.

그리고 ‘삭’날까지 기다리라고 한 것.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칼립소의 손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컥컥.”

칼립소의 손에서 풀려난 데릭은 한참을 숨을 골랐다.

“그리고, 세 번의 밤을 보낸 후에는, 다시는 잠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러면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고 하더군요.”

데릭은 용기를 끌어모아 말했다.

“폐하, 정부는 정부답게 다루시고 국혼을 치르십시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데릭, 이 일을 또 누가 알고 있지?”

“저와 동생밖에 모르는 일입니다.”

“함구해. 만약 새어 나갈 시에는 아까 걸었던 가족의 목숨을 받으러 갈 테니까.”

“네, 폐하.”

“나가봐.”

데릭이 나가자, 칼립소는 보카시 럼을 들어 잔에 따랐다. 그리고 한 번에 마셨다.

‘그런 거였어?’

지독한 배신감이 발끝부터 타고 올라왔다.

저도 모르게 악력을 주니, 유리잔이 손안에서 바스라졌다.

유리 조각에 베인 칼립소의 손에도 피가 흘렀다. 하지만 칼립소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손을 뚫어지게 관찰했다.

밤이 깊을 때까지, 칼립소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유리에 베인 손은 서서히 말끔해지더니, 나중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한참 동안 바라보던 칼립소는 시종에게 명했다.

“베르나르를 불러.”

“네.”

시종은 서둘러 베르나르 의원을 호출했다.

황급히 달려온 베르나르에게 엘레나의 상처 변화에 대해 전해 들은 칼립소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엘레나가 치유력을 잃은 것은 사실이다.

아까 자신의 경험으로 봤을 때, 만일 치유력이 있다면 돌 수레에 긁힌 정도의 상처는 반나절도 되기 전에 씻은 듯이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베르나르에게 치료를 받고 연고까지 발랐다니, 치유력은 사라진 게 분명했다.

그 말은 데릭의 말이 진실이라는 의미였다.

칼립소는 베르나르를 내보내고, 황궁 안을 걸었다.

마음이 타는 듯이 복잡했다.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여인이었다.

자신의 심장을 내줘도 아깝지 않다고 여겼다.

‘날 이용했다고?’

이용한 것뿐이면 상관없다.

이용하라고 말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저 깊은 곳에서의 배신감은 다른 것이었다.

그 밤, 마음이 통했다고 여겼다.

서로의 진심이 오가던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섞는 것도 물론 소름 돋게 좋았지만, 그 밑에는 엘레나의 마음이 열렸다는 것이 더 컸다.

「좋아해.」

「당신도 그런 거지?」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던 엘레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칼립소는 하늘을 올려봤다.

이제, 곧 보름이 온다.

의심의 씨는 이미 뿌려졌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솎아내면 그뿐이다.

그 몸짓이, 그 눈빛이 거짓일 리가 없었다.

‘보름밤에는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칼립소의 눈이 어두워졌다.

* * *

보름까지 이틀 동안, 엘레나는 무척 바빴다.

자치권을 획득한 가이아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피곤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엘레나의 몸에는 이상한 흥분도 함께 돌았다.

곧 보름이다.

칼립소와 함께 밤을 보낼 생각을 하면, 기대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치권을 획득한 가이아인들은 훌륭한 예술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는 암암리에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되었고, 가이아인들에게 기술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가이아의 문화는 케이타 제국의 유행이 되었다.

특히 의복의 경우에는 그 유행의 정도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우선, 케이타 황제의 의복이 바뀌면서 귀족들로부터 새로운 의복에 대한 욕망이 생겼다.

처음에는 남자 귀족부터 시작하던 것이 여자 귀족에까지 확산되기 시작했다.

케이타 제국에서는 여인들은 ‘샤오르’라는 전통의상만을 주로 입었다. 샤오르의 옷감과 색깔에 따라 구분이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옷은 활동하기 불편할 뿐 아니라, 꾸밈새에도 한계가 있었다.

칼립소의 가이아 문화 우대 정책에 따라 의복 역시 가이아의 다양한 의복이 선보이게 되었고, 이는 여인들의 마음을 홀리기 시작했다.

“엘레나 님, 주문이 밀려듭니다.”

의복 장인 제임스가 기쁜 낯으로 엘레나를 찾았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 있는 가이아인으로는 부족할 지경입니다.”

“엘레나 님, 화가들도 그림을 그리기 바쁩니다.”

노아 역시 기쁜 낯으로 말했다.

이곳에서 대우를 받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가이아의 화가들도 활력을 찾았다.

“잘됐네요.”

엘레나가 활짝 웃었다.

“우선 모든 작품들은 무상으로 제공하도록 해요. 우리에겐 전파가 목적이니까요.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시 무료로 전수해주고요.”

가이아의 문화가 확산되면, 그에 따른 이익은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네, 어차피 그러려고 온 걸요.”

한 번 노예 생활을 경험해서 그런지 가이아인들은 지금의 대우가 꿈만 같았다.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무상으로 제공하는 대신 칼립소가 기본적인 자치운영비를 주고 있었기 때문에 의식주의 걱정은 없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하나 둘 찾아오던 케이타인도 점점 소문이 퍼져 물밀듯이 찾아왔고, 방문규모도 커지게 되었다.

특히 의복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가이아에서도 꽤 명망있는 의복 장인 제임스가 왔기에 더 그랬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오면서 케이타 제국의 사람들도 사치를 즐기기 시작하였다.

샤오르는 아름다운 옷이기는 하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이아의 드레스는 그런 여인들의 욕망을 잘 충족시켰다.

샤오르와는 달리 드레스는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고, 화려한 레이스는 여심을 홀리기 충분했다.

가이아의 드레스를 갖고 싶다는 문의가 많았지만, 여기서의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덕분에 가이아 제국의 무역업은 근래에 없는 활황을 누렸다.

그 외에도 다양한 건축술, 공예 기술, 자수, 그림 등 여러 방면으로 가이아 문화의 전파기지 역할을 톡톡히 해나갔다.

엘레나는 밤늦은 시간이 되서야 로하스관으로 들어갔다.

밤하늘을 올려보니, 달이 휘영청 밝았다.

드디어 내일은 기다리던 보름이었다.

이틀이었지만, 칼립소를 보지 못했다. 최근에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매일 보다시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엘레나는 그 이유를 짐작했다.

아마 만나면 더 견디기 힘들어서 아닐까.

그건 자신의 마음이기도 했다.

지난번 마지막 만남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졌다.

끝까지 가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그날은 여운이 더 진하게 남았다.

밤에 그 생각을 하면, 쉽게 잠이 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엘레나는 주피터 열매를 꺼내 세 알을 삼켰다.

그리고 보름밤을 대비해 목욕을 준비했다.

‘또 일찍 올지도 몰라.’

엘레나는 옷을 벗고 탕 안으로 들어갔다.

비비안을 물리고, 엘레나는 혼자서 오랫동안 씻었다.

두 번의 밤을 함께 보내서인지 몸의 기가 더 충만해진 것을 느꼈다.

목욕을 마치고 엘레나는 꿀을 섞은 오일을 전신에 발랐다. 충분히 몸에 흡수된 후, 미온수로 한 번 더 씻었다.

그리고는 나른해진 몸으로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잠을 청했다.

보름의 낮과 밤을 기대하며.

* * *

아침이 밝았다.

어제 오랫동안 목욕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보름이라 그런지 엘레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혹시…….’

눈을 뜨자마자 사방을 둘러봤다.

자신을 내려보는 붉은 눈동자를 찾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살짝 실망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하스관의 아침은 고요했다.

보름날을 맞아 엘레나는 모든 일정을 뒤로 미뤄놨다.

덕분에 이날의 아침은 한가했다.

‘많이 먹어야지.’

엘레나는 든든하게 아침 식사를 챙겨 먹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엘레나의 마음은 여유로웠다.

간혹 시선이 문 쪽을 향하기는 했어도, 음식에 집중할 수 있었고, 기분 좋은 설렘이 함께 했다.

하지만 아침 식사를 마치자, 왠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바쁜가.’

당연히 바쁠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은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는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침 식사가 끝나고 오전이 지나도록 칼립소에게는 소식이 없었다.

비비안이 기다리는 엘레나를 위해 다과와 차를 간식으로 가져왔지만, 도통 입맛이 없었다.

‘내가 찾아가 볼까?’

아니야. 좀 더 기다려보자.

엘레나는 애써 성급한 마음을 눌렀다.

시간은 흘러 오후에 다가가고 있었다.

“엘레나 님, 점심을 드셔야죠.”

“그래…….”

엘레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이대로 점심도 지나가는 건가.’

한 시간, 한 시간이 소중했다.

이번 보름이 지나면, 그와 같이 밤을 보낼 수 없다.

계속 문 쪽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엘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엘레나는 먼저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비비안, 황궁으로 가야겠어.”

“황궁으로요?”

“폐하를 알현해야겠어.”

“알현하려면 대기가 엄청날 거예요.”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칼립소는 이 나라의 황제다.

원한다고 쉽게 만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여기서 기다리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아니면, 제가 황궁으로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줄래?”

“네, 혹시라도 엇갈리시면 안 되잖아요.”

“고마워.”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당연히 제가 할 일인 걸요.”

엘레나는 비비안을 보내고 방으로 올라갔다.

기다리는 동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이참에 오늘은 다른 걸 입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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