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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알았지?’
세바스찬의 눈썰미가 그렇게 좋단 말인가.
안토니안이 불안한 걸음으로 욕실을 돌아다녔다.
태어날 때부터 면밀히 행해진 작업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잊지 않고 끔찍한 가루를 하루 동안 뒤집어쓰고 누워있어야 했다.
조만간 레비가루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재차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안토니안이 긴장했다.
문을 살짝 열자, 데이지가 보였다.
얼굴을 보자마자 안토니안은 데이지의 팔을 홱 끌어당겼다.
“안토니안, 왜 이래요?”
“네가 말했어?”
“뭐를요……?”
눈을 굴리던 데이지가 뭔가를 떠올린 듯,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안토니안을 봤다.
“아버지가 그걸 말했어요?”
‘역시 데이지였구나.’ 안토니안은 자신의 예감이 맞은 것을 깨달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데이지가 안토니아의 얼굴을 잡았다.
“아버지가 비밀은 반드시 지켜준다고 했어요. 서로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협상에 중요한 점이라고요.”
안토니안의 황당한 기색에도 데이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염색하는 거 필요하죠? 어떤 걸로 구하면 돼요?”
안토니안은 뭔가 덫에 걸린 느낌이 들었다.
“……레비가루가 필요해.”
“알았어요. 비밀리에 내가 알아서 구해줄게요. 이제부터 우리는 한배를 탄 거니까 모든 걸 나한테 맡겨요.”
데이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 * *
칼립소의 추진력은 빨랐다.
영토를 지정하여, 가이아인들을 모여 살도록 했고, 총책임자에 엘레나를 임명했다.
가이아의 황녀인 엘레나가 총책임자로 임명되자, 황궁 내에서는 반대 세력이 암암리에 생겼다.
신전 건축에 대해 불만을 가진 요하스 자작에게서부터 흘러나온 불만은 차차 여러 귀족에게 옮겨 불어났다.
이 과정을 데릭은 불안하게 지켜봤다.
처음부터 칼립소가 엘레나에 대해 지나치게 휘둘린다 여겼었다.
‘차라리 처음에 고분고분하게 황후가 되었다면 걱정이 덜 될 텐데.’
그동안 지켜본 바로 보면, 엘레나는 훌륭한 여인이었다.
만약 황후가 되었다면, 폐하의 반려로서 제국을 이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데릭은 불안한 마음에 르엘을 불렀다.
요사이 르엘은 그가 시킨 대로 가이아에서 온 신녀와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했다.
“르엘.”
“형님, 그렇지 않아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가이아의 신녀와 꽤 친해진 모양이더구나.”
“캐서린입니다.”
이름을 불러달라고 말하는 거 보니, 르엘도 사심이 꽤 많이 들어간 것 같았다.
“그래서, 쓸 만한 이야기는 좀 들었냐?”
르엘은 살짝 망설였다.
“협조하면, 캐서린은 보호해주실 거죠?”
“당연하지.”
가장 궁금한 건 엘레나의 본심이었다.
적국이라 생각하며,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는지, 아니면 완전한 협력을 하는지 궁금했다.
최근에 황제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면, 어쩌면 그녀의 마음이 케이타 제국 쪽으로 기운 것 같기도 했다.
가이아의 신녀가 오면 어떤 식이든 가이아 제국 쪽과 엘레나 간의 접선이 이루어질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일부러 르엘을 사신으로 보내 신녀와 친분을 쌓으라고 한 것이다.
“캐서린이 가이아 제국과 소통 창구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겠지. 밀서를 가져왔나?”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르엘은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캐서린이 중간에서 엘레나님과 가이아의 대신녀가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어떻게 말이지?”
데릭이 고개를 갸웃했다.
“신녀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 영성술의 일종인 듯 싶은데, 가이아의 방식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 어쨌든 내용은?”
“대신녀가 엘레나 님에게 폐하와 세 번의 밤을 보내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뭐?”
데릭은 놀랐다.
요사이 칼립소의 기분이 흡족한 것이 엘레나와 밤을 보내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 칼립소에 대한 마음이 생겨서가 아니라, 대신녀의 지시 때문이었다니!
우려하던 바가 일어났다.
“이유가 뭐지?”
“그게, 치유력이라는 거 말입니다. 그걸 되찾아야 한다고 했답니다. 보름에 한 번, 삭에 한 번, 또다시 보름에 한 번 이렇게 세 번의 밤을 보내면 치유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요.”
“이런…….”
데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다른 지시는?”
“다음 보름에 다시 연락한다고 했습니다.”
“알았다. 다음 보름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꼭 알아보고 보고해.”
“네, 형님.”
데릭은 르엘을 보낸 후 생각에 잠겼다.
최측근에서 칼립소를 모시고 있기에 칼립소가 얼마나 엘레나를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엘레나와 밤을 보낸 후, 황제께서 얼마나 기뻐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모습의 칼립소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위험해.’
데릭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 시각, 칼립소는 로하스관 응접실 안에서 엘레나와 함께 그림을 보고 있었다.
엘레나에게 가이아인들에 대한 관리를 맡긴 후, 생각보다 일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가이아인들의 그림이며, 예술 활동을 전달할 체계가 하나하나 갖춰졌으며, 케이타 제국에서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건 최근에 완성된 건가?”
“노아 아저씨가 그린 거예요. 케이타 제국 샤턴 언덕의 풍경화죠.”
칼립소는 한참 동안 풍경화를 바라봤다.
마치 눈으로 광경을 보는 듯한 섬세한 터치와 자연스러운 색감이 인상적이었다.
“좋군.”
“진짜요?”
“난 빈 말은 하지 않아. 좋은 그림이야.”
“폐하 덕분이에요. 노아 아저씨도 감사해하고 있어요. 다른 가이아인들도요.”
“당신은?”
한참 후에 엘레나의 입이 열렸다.
“나도, 고맙게 생각해요.”
그 말에 칼립소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말로만?”
칼립소가 허리를 잡았다.
“행동으로 보여줄게요.”
엘레나의 입술이 칼립소에게 닿았다.
칼립소 역시 기꺼이 화답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엘레나가 칼립소의 귓가에 속삭였다.
“노아 아저씨가 나중에 폐하의 초상화도 선물하고 싶다고 해요. 한 번 맡겨보세요. 어릴 때 나도 그려줬는데 괜찮았어요.”
“당신 어릴 때를 그려줬다고?”
칼립소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보고 싶네. 그 그림.”
‘어린 시절 엘레나는 얼마나 귀여울까.’ 칼립소의 입매에 미소가 그려지자, 엘레나의 손이 닿았다.
“폐하의 어릴 때 그림은 없나요?”
“없어. 우린 초상화 따위는 그리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런 게 있었으면 좋았겠어. 그럼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그게 누군데요?”
칼립소의 말 밑에 진한 그리움이 느껴지자, 엘레나는 기묘한 질투를 느꼈다.
“나의.”
칼립소의 눈이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어머니.”
칼립소는 ‘어머니’ 소리를 뱉으며, 탄식했다.
그는 한 번도 어머니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얼굴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는 하지만,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분명, 아름다우셨을 거예요.”
“어떻게 알아?”
“폐하께서 미남이니까요.”
“내가?”
엘레나의 손이 칼립소의 얼굴에 닿았다.
눈가에 닿자, 칼립소가 눈을 감았다.
칼립소는 자신의 붉은 눈이 싫었다. 마치 어머니의 피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것 같았다.
칼립소가 태어난 날, 어머니는 죽었으니까.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엘레나의 손길에 칼립소의 얼굴에 금세 울적함이 사라졌다.
칼립소는 눈을 감은 채로, 엘레나의 손에 뺨을 부비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엘레나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손바닥에 꾹 자신의 입술을 누른 뒤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그런 칼립소의 머리를 엘레나가 천천히 쓸어주었다.
마치 커다란 아이를 다루듯이.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한참 안겨 있던 칼립소가 고개를 들었다.
“좋아해.”
엘레나의 몸이 굳었다.
칼립소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칼립소는 살짝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엘레나는 잠시 멈칫했다.
내 마음은 뭘까.
점점 칼립소에게 끌리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역시 가이아의 제1황녀라는 자신의 책무가 걸렸다. 그건 태어날 때부터 피할 수 없는 의무였다.
‘신탁의 계시’
그것을 생각하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당신도 그런 거지?”
칼립소는 가끔 엘레나의 흔들리는 보랏빛 눈동자를 보면 불안했다.
저 심연 속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몰라서.
칼립소의 절실한 물음을 들으며, 엘레나는 눈을 감았다.
대답 대신 본능이 이끄는 대로 입술을 내렸다.
살포시 맞닿았던 엘레나의 입술과 달리 칼립소의 입술은 거칠었다.
마치 답을 안하는 것을 원망하는 것처럼 칼립소의 혀가 사납게 들어왔다.
물어뜯을 것처럼 달려들고, 틈을 주지 않는다. 구석으로 도망친 혀를 잡아채고, 문지르고 가뒀다.
마치 다른 대답은 생각하지도 말라는 듯이.
예민해진 입 안을 집요하게 공략하다 기어이 엘레나의 신음을 듣고 나서야, 부드럽게 바뀌었다.
“굳이 보름을 기다릴 이유가 있나?”
칼립소의 손이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서로 맞닿은 몸 사이에 떨림이 느껴졌다.
“나보다 당신이 더 원하는 거 같은데.”
칼립소의 손이 샤오르를 헤쳤다.
“보름에…… 하기로 했잖아요.”
엘레나가 필사적으로 몸을 물리는 것을 보고, 칼립소가 손을 당겼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럼, 나도 당신을 도와줄게. 전에 당신이 해 준 거처럼.”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엘레나가 돌아보자, 칼립소가 씩 웃었다.
“참는 데 꽤 도움이 되었거든.”
칼립소가 엘레나의 손을 끌었다.
“이리 앉아봐.”
칼립소는 엘레나를 자신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샤오르의 허리 매듭을 풀러, 허벅지가 드러나게 만들었다.
“이건…….”
“끝까지 갈 건 아니야.”
칼립소가 엘레나의 뒷목을 잘근잘근 씹었다.
“느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