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60화 (60/100)

60

“……렇게, 해 줘요.”

엘레나의 애원이 들려오자, 속도에 점점 불이 붙었다.

아찔한 감각에 눈앞이 섬멸했다.

정신을 놓칠 것처럼 흐릿한 시야 속에서 쾌감만을 쫓았다.

뜨겁고 질척한 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붉다 못해 폭발할 것 같은 그의 눈동자는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깊은 곳에 맞닿자, 엘레나의 입에서 감탄 같은 비명이 터졌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감각이었다.

젖은 소리가 허공에 뒤섞이며, 그가 더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너무 버거워 흐느끼는 엘레나를 칼립소가 재촉했다.

함께 가자고.

‘더는, 안 돼!’

엘레나가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멈추기는 늦었다.

“정말 안 돼?”

여유로운 입매로 칼립소가 몸을 뒤로 물리자, 엘레나의 몸이 그대로 따라왔다.

“거짓말.”

지끈.

전신이 울렸다.

머지않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열락을 느낄 거라는 기대감에 온몸이 조였다.

고조된 흥분은 서로를 같은 곳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발작 같은 경련과 함께 울컥, 절정에 올랐다.

떨리는 엘레나의 몸을 안으며, 붉은 눈동자에 벅찬 희열이 떠올랐다.

완전히 지쳐 곯아떨어진 엘레나가 눈을 뜬 건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였다.

커다란 통창에서는 찬란한 햇빛이 들어왔고, 맛있는 음식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깼어?”

“이게 무슨 냄새예요?”

“배고플까 봐.”

침대 옆에는 언제 가져다 두었는지 각종 음식들로 가득했다.

수프, 빵, 고기 요리뿐 아니라 케이크와 쿠키류도 다양했다.

“여기서 먹자고요?”

“오늘은 여기서 계속 지낼 생각이야. 먹고, 마시고, 함께 뒹구는 거지.”

칼립소가 이를 드러내고 천진한 소년처럼 웃었다.

황궁을 구경시켜 준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나.

엘레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칼립소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 봐?”

“네?”

“손.”

칼립소의 말에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자, 칼립소가 손을 맞잡았다.

손바닥 위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살짝 빼내려 하자, 칼립소가 다시 잡는다.

“가만히 있어 봐.”

이번에는 하얀 물수건으로 엘레나의 손을 정성스럽게 닦아냈다.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엘레나가 사랑스럽다는 듯 칼립소의 눈가가 사르르 접혔다.

“먹여줄까?”

칼립소가 빵을 뜯어 꿀에 찍더니 천천히 그녀의 입에 가져갔다.

“괜……찮아요.”

뚝.

하필이면 꿀이 가슴 부근에 떨어졌다.

“이런, 흘렸네.”

느린 동작으로 입술을 내려 칼립소가 남김없이 빨았다.

엘레나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다시 줄게.”

“괜, 괜찮아요. 내가 먹을게요.”

새로운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엘레나는 몸을 일으켰다.

“많이 먹어, 엘레나. 오늘 밤은 기니까.”

칼립소가, 아니 둘이 함께 기다렸던 ‘삭’의 날은 낮부터 밤까지 계속됐다.

마치 신혼을 즐기는 것처럼.

* * *

달의 기운과는 반대로 뜨거웠던 ‘삭’의 날이 끝났다.

칼립소의 얼굴에도 진한 충족감이 어린 윤기가 흘렀다. 포만감을 즐기는 맹수처럼 칼립소의 몸에는 여유가 묻어났다.

정무 회의가 거의 끝나 갈 즈음, 칼립소가 입을 열었다.

“가이아인들에 대한 처우는 어떻게 되고 있지?”

“각자 용도에 맞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토 공작의 말에 칼립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용도에 맞게?”

칼립소가 되묻자, 데릭이 답했다.

“필요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그들의 문화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칼립소의 눈빛이 카토 공작에게 향했다.

“카토 공작, 공작은 그림을 좋아하지?”

카토 공작은 미술품 수집광이었다.

정복한 땅들의 미술품에 환장하고, 특히 가이아 제국의 그림을 좋아했다.

“가이아에서 온 화가들이 좋은 그림을 많이 그렸나?”

“아직 완성된 것은 없습니다. 생각보다 그리는 속도가 늦더군요.”

“그림 그릴 시간을 주지도 않는 건 아니고?”

칼립소의 말에 카토 공작이 움찔했다.

“도대체 가이아인들을 어떻게 대우한 거지?”

칼립소의 성난 음성에 좌중은 답이 없었다.

요 근래 칼립소의 기분이 좋았기에 화난 칼립소의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오랜만에 보는 칼립소의 분노에 대신들은 모두 긴장했다.

“가이아 제국은 우리와 군신 관계를 맺지 않았나? 짐이 너희들을 이렇게 대하고 있나?”

칼립소의 날 선 말에 대신들은 얼어붙었다.

“왜 답이 없지?”

칼립소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하자, 대신들의 얼굴은 공포에 질렸다.

최근 들어 전쟁이 없어 잠시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줬을 뿐, 칼립소는 본래 피의 군주였다.

특히 저런 얼굴의 칼립소는 위험했다.

웃는 얼굴로 사람을 베는 것은 칼립소의 특기였으니까.

“데릭.”

“예, 폐하.”

군기가 바짝 든 데릭이 얼른 말했다.

“가이아인들의 처우에 대한 소상한 보고를 올려.”

“알겠습니다.”

데릭이 고개를 숙이자, 카토공작이 나섰다.

“폐하, 그간 소홀했던 점이 사실입니다. 즉시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에 와서?”

칼립소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지금까지 안 했다는 건가?”

“송구합니다.”

카토 공작은 바로 엎드렸다.

칼립소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카토 공작을 노려봤다.

아버지의 오른팔이었던 카토 공작은 아버지가 암살당하고, 중도 입장을 고수한 전력이 있었다.

말은 아버지가 없는 자리를 지킨다는 명분이었으나, 실상은 정부의 세력을 처단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알다시피 기회는 한 번뿐이야.”

칼립소의 경고에 대신들이 긴장했다.

“일단, 가이아인들이 처우 조사를 시작해. 그런 후에는 그들에게 자치권을 줄 생각이니까.”

“폐하,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엄연히 저희에게 패배한 국가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자치권을 주다니요?”

“그러게 처음부터 제대로 관리했으면 되지 않았나?”

칼립소가 날카롭게 바라봤다.

“처음부터 그들을 데려온 건 문화를 전수받기 위해서야. 노예로 삼으려는 게 아니라.”

칼립소는 자신의 정책을 위압적으로 밀어붙였다.

* * *

데이지와 짧지만 뜨거운 시간을 보낸 안토니안은 방에서 내려왔다.

세바스찬은 안토니안이 내려오자마자, 서재로 안내했다.

“안토니안 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제 서서히 황궁으로 돌아가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안토니안은 머뭇대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방황의 시간이 조금 길었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황궁에 돌아가기에는 아직 명분이 충분치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생활도 편해지기 시작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없고, 적당히 놀고, 적당히 먹고, 적당히 노는 시간들.

거기에는 또 데이지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타의에 의해 엘레나와 정혼했던 안토니안은 특별한 연애 경험이 없었다.

마음 편히 연애를 하기에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또한 그걸 무시하기에는 안토니안은 소심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엘레나 황녀의 정혼자, 하를 공작의 장남, 이런 타이틀을 떼고 나니 퍽 자유로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알지만, 또 다른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서서히 준비를 해야죠.”

안토니안은 끝을 뭉개며 말했다.

이곳의 생활이 좋지만, 결국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은 황궁임을 알고 있다.

다만 시간을 좀 늦추고 싶을 뿐.

“황궁에 가실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떻게요?”

세바스찬이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한번 보시죠.”

세바스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데이지가 안토니안을 데려온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상인의 신분으로 아무리 돈을 벌어도 귀족의 벽은 넘지 못했다.

그것을 한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데이지가 하를 공작가의 장남을 데려온 것이다.

가히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라 할 수 있었다.

“이건 사람들의 명단이 아닙니까?”

“안토니안 님의 편이 되어 줄 사람들입니다.”

명단을 보는 안토니안의 얼굴에는 묘한 빛이 돌았다.

“이들은 모두 안토니안 님을 위해 일할 사람들입니다.”

빼곡히 적힌 명단의 이름이 수천 명이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르타인들입니다”

“하르타인들이라고 하면?”

“용병들이죠. 안토니안 님의 힘이 될 것입니다.”

하르타인들은 해적 집단으로 애도섬에서 살고 있는 족속이었다.

다루기가 까다롭지만, 세바스찬은 해상무역을 하면서 이들과 친분을 쌓아두고 있었다.

이들의 특성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하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안토니안 님이 시키는 대로 할 것입니다. 이 정도 무력이면 다시 황궁으로 돌아갈 명분은 되지 않겠습니까.”

세바스찬은 머리를 숙였다.

“흐음…….”

“다시 용기를 내주십시오. 가이아 제국을 이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안토니안은 다소 오만하게 세바스찬에게 서류를 받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부탁하신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뜻을 받아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안토니안 님이 가이아 제국을 위대하게 건설할 것을 믿습니다. 무엇보다 안토니안 님은 신탁의 계시를 받은 분 아닙니까?”

세바스찬이 안토니안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런데, 거울은 자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뜬금없는 소리에 안토니안이 세바스찬에게 되물었다.

세바스찬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머리카락 말입니다.”

그러자 안토니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우리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다 뜻이 있겠죠. 걱정 마세요. 저야 안토니안 님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드릴 테니. 대신 저희의 앞길도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안토니안은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세바스찬과 이야기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봤다.

머리를 숙이고 세세히 살펴보던 안토니안은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여유로움에 취해 있느라 잠시 방심한 틈에 검은 머리의 뿌리가 아주 미세하게 드러나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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