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59화 (59/100)

59

널따란 집무실은 태양 빛이 그대로 들어오게 설계되어 있었다.

벽에는 온갖 고서들부터 책이 천장에 닿도록 꽉 차 있었다.

“책을 좋아하나 봐요.”

“밤에는 잠이 잘 안 와서.”

하지만 단순히 잠이 안 와서 읽었다고 하기에는 그 양이 방대했다.

책장에 꽂힌 책의 종류는 다양했다. 역사, 경제, 정치, 문학 등 여러 가지 이름난 책들과 고서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대단한 독서광이네요.”

“여기 있는 걸 다 읽은 건 아니오. 내가 수집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겉은 야수처럼 보여도 칼립소의 사고 수준은 범상치 않았다.

‘책을 많이 읽어서 그렇구나.’

엘레나는 천천히 책장을 둘러보다가 위쪽 책장에 꽂혀있는 책에 시선이 꽂혔다.

“저게 있네요. ‘위대한 권력’은 나도 좋아하는 책이에요.”

“그래?”

엘레나가 발끝을 올리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한쪽 팔이 엘레나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자 단단한 몸이 등 뒤에 느껴졌다.

긴 팔이 위로 올라가 가볍게 책을 뽑아 들고, 엘레나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엘레나는 책장을 펼쳤다.

꽤 자주 본 것처럼 책장은 닳아있었다.

군데군데 밑줄 친 부분도 있고 덧붙인 내용도 있었다.

[사람의 뿌리가 궁금하지 않다. 다만 장점으로 분류할 뿐이다]

그 밑에 칼립소가 적어놓은 문구도 있었다.

[나 역시 속 좁게 그들은 이방인과 케이타인으로 나누지 않을 것이다.]

그 내용을 본 엘레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폐하의 생각에 동감해요.”

칼립소는 자신의 생각대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실제로 케이타 제국에서는 이방인이라고 차별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케이타 제국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이아인들은…….’

엘레나는 다소 아쉬웠다.

“이방인에게 차별을 두면 정복에 한계가 와. 그들을 인정하고 배울 건 배워와야지.”

“그런데 가이아인들에겐 안 그런 거 같아요.”

엘레나가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엘레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가이아 사람들은 이곳에서 위치가 어떻게 되나요? 노예인가요?”

“노예라니, 당치않아. 가이아의 문화를 존중하오. 앞서가는 부분이 많으니까. 그래서 그걸 받아들이려 하는 거요.”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뭔가 가늠하는 것처럼 칼립소는 엘레나를 바라봤다.

칼립소의 통치는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나라를 정복하면 자율권을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가이아의 경우에는 달랐다.

군신의 관계를 맺고, 건축가와 예술가를 끌고 와 각 귀족들에게 일임했다.

귀족들 산하에 있기에 가이아인들이 제대로 된 처우를 받기 힘들 수도 있다.

엘레나부터 ‘정부’로 데려왔으니까.

“가이아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전수하지 못해요. 오히려 노예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죠.”

“그건……. 내가 미처 살피지 못했군. 경고를 해야겠어.”

“폐하, 경고로는 해결될 거 같지 않아요. 귀족 산하에 있는 한 처지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엘레나는 요하스 자작을 떠올렸다.

자작에게 경고를 한다고 해서 가이아의 건축가들이 지내는 형편이 나아질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뒤로 더 괴롭히기 쉬웠다.

“그럼, 좋은 방법이 있소?”

“공모랑 비슷한 방법을 쓰는 게 어떨까요?”

노아와 여러 가이아인들을 만나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각 나라에 거주하면서 자율권을 얻거나, 다른 이방인들처럼 개인 자격으로 이민 온 처지와는 달랐다.

한 번에 공물과 같이 온 처지라 그 지위도 애매했다.

“비슷한 방법이라면 어떤 것을 말하는 거지?”

“귀족들 산하에 두지 말고, 자율적 공간을 보장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공간을 달라…….”

“그곳에서 생산, 판매, 기술 전수를 하게 만들고요.”

거주 공간을 확보하면 훨씬 자유롭게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총 책임자는 당신으로 하고?”

“그건, 말하지 않았어요.”

엘레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책임자는 상관없어요. 다만, 그 역할이 공정히 수행할 사람의 경우에는요.”

“생각해보도록 하지.”

긍정적인 듯한 반응에 엘레나가 생긋 웃었다.

“애초에 당신이 황후로 왔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일이었어.”

칼립소는 아직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씩 칼립소가 다가왔다.

살짝 뒷걸음질 치던 엘레나는 책장이 등에 닿자,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었다. 칼립소가 커다란 팔을 올려 가두듯 엘레나를 감쌌다.

그리곤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감았다.

“아직도 날 못 믿겠어?”

아직도 도망칠 생각만 하냐고.

캐묻는 것 같아 엘레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칼립소가 손을 올려 고개를 잡았다.

“엘레나”

그가 고개를 잡아 시선을 마주했다.

“가엾은 나의 반려여.”

손가락으로 뺨이 그려진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어쩐지 소름이 돋아오는데, 그가 설핏 웃었다.

소유욕 짙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안을 점령했다. 뜨거운 살덩이가 입 안을 헤집고 혀가 얽혔다.

짜릿한 감각이 배 속을 요동쳤다.

엘레나의 두 손이 그의 목을 감자, 허리가 바싹 끌어당겨졌다.

여기서 더 나가도 상관없을 것 같다.

‘삭’날을 기다린 건 그뿐이 아니었으니까.

처음엔 정중했던 키스가 점점 거칠어졌다.

조금 더.

그의 입술이 목덜미로 내려가고, 다리 하나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복부에 닿는 무언가는 열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몸이 붕 떴다.

서재 안쪽에 이런 공간이 있었나.

문을 열자,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여긴…….”

“말했잖아. 잠이 안 오면 책을 보다 잔다고.”

커다란 침대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늘어져 있었다.

칼립소는 아무렇지도 않은 손길로 침대 위의 책들을 와르르 떨어뜨렸다.

엘레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설마, 지금 여기서.

놀란 눈으로 보니 칼립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 잠깐만요. 씻지도 않았어요.”

“나로 말하자면, 새벽 일찍 목욕했어.”

“나는요.”

“당신?”

“아침 먹고 바로 온 거잖아요.”

“당신은 씻을 필요 없어.”

짐승처럼 목덜미에 이를 박고 빨아들인다.

“당신 몸에서 항상 달콤한 냄새가 나거든. 물 따위에 내줄 수는 없지.”

칼립소의 붉은 눈 아래 열망이 드러났다.

“지금은 낮이에요. 그리고 어차피 오늘 밤은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낮부터 함께하면 더 길지.”

칼립소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안하지만, 이미 충분히 기다려서.”

칼립소가 엘레나를 눕히며 양손 사이에 가뒀다.

미안하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당당하게 자리할 수 없을 테니까.

마치 기다려온 것의 보상을 받겠다는 듯 칼립소의 손짓은 맹렬했다.

사실, 칼립소는 좀 더 참으려 했다. 엘레나의 말처럼 밤까지 기다리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달콤한 입술을 빠는 순간, 자제심은 사라졌다.

자제는 지난 보름간 충분히 했다.

이제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그날 느낀 느낌이 진짜인지.

신기루가 아닌지.

그날 밤 이후, 일에 몰두하려 애썼지만 잔상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기다리던 ‘삭’의 날.

이제 그가 그녀를 몰아댈 차례였다.

살짝 굳은 그녀를 달래듯 칼립소는 입을 몇 번 맞췄다.

튜닉을 벗는 그의 몸짓이 다급했다.

“천천히요.”

엘레나의 손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근육으로 덮힌 그의 몸이 엘레나의 손에 따라 움직였다.

제 아래에 누워있는 엘레나를 향한 뜨거운 갈망이 샘솟았다.

미친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미치는 거면 얼마든지 미치겠다고 생각하며 칼립소는 그녀를 껴안았다.

“부드럽게 해 줘요.”

엘레나의 말에 마법처럼 칼립소의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

칼립소는 엘레나의 이런 점이 좋았다. 다른 여인들과 달리, 엘레나는 물러섬이 없었다.

괜히 수줍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솔직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같이 열락에 빠지면 그녀 역시 함께 그 안에서 놀았다.

“이끌어 줘, 엘레나.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입술로 질문을 대신했다.

“여기?”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 아래에 닿았다.

팔을 들어 가슴과 닿는 여린 살에 다시 입술이 묻었다.

“여기는?”

칼립소가 습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날 밤이 무척이나 생각났어. 그만큼 좋았거든.”

바르르 떠는 엘레나를 보며 칼립소의 입술을 농밀하게 움직였다.

“그다음 날도.”

더 아래로 입술이 내려갔다.

“그다음 다음 날에도.”

이번엔 은밀한 부분에 손이 닿았다.

“당장 달려가서, 당신 침대에 기어오르고 싶었지.”

엘레나의 몸이 튀었다.

“여기, 좋아하나 봐.”

속삭이듯 묻는 칼립소의 음성은 자상했으나, 어두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때는, 내가 처음이라 조절을 잘못했으니.”

칼립소가 그녀의 엉덩이를 살짝 쥐었다.

“오늘은 당신이 이끌어 줘. 처음부터 끝까지.”

엘레나의 손이 칼립소의 등 근육을 짚었다.

나른하게 울리는 신음이 마음에 들었다. 맹수를 조련하는 심정이랄까.

“벌려요.”

엘레나의 말에 순종하듯 칼립소의 입술이 벌어졌다.

숨을 몰아쉬듯 칼립소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엘레나…….”

엘레나의 손이 밑으로 내려가자, 칼립소의 호흡이 더 거칠어졌다.

“못 참겠네.”

뜨거운 입술이 엘레나를 집어삼키고, 아래 부근은 뜨끈한 열기로 가득 찼다.

잠시 강렬한 감각 속에, 칼립소가 놀란 듯 다시 멀어졌다.

“젠장, 참아볼게.”

멀어지려는 칼립소의 몸을 잡아당겼다.

“누가 이끌던 무슨 상관이에요. 그냥 마음대로 해요.”

붉은 눈이 정염으로 짙게 빛났다.

“젠장.”

붙어 먹는다는 것이 이리도 좋은 건지 몰랐다.

“하아.”

뇌가 누군가에 의해 주물러지는 것 같았다.

칼립소의 몸짓에 따라 엘레나의 몸이 리듬에 맞춰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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