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58화 (58/100)

58

“절, 기억하고 계셨군요.”

“당연하죠, 그런데 어떻게 아저씨가 케이타 제국으로 오게 되었죠?”

노아는 가이아에서는 유명한 원로 화가였다.

“서로들 가지 않으려 하니 늙은이가 지원을 했죠. 젊고 앞길 창창한 애들을 적국에 보낼 수 있나요.”

노아는 자신이 자원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케이타 제국에서의 생활도 궁금했습니다. 늙은 화가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거든요.”

“그랬군요.”

“하지만 그건 오만한 제 착각이었습니다. 이곳은 절망입니다.”

엘레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번에 신전 건축에 황녀님께서 낸 도안이 선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가이아인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죠. 사실 황녀님을 만나러 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온 가이아인도 있습니다.”

말로는 앞선 문명을 가진 가이아인들의 도움을 받겠다며 데려왔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거라 짐작은 했었다.

당장 가이아의 건축가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엘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황녀님의 소식을 듣고 혹여 희망이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말씀하세요.”

“황녀님, 이곳에서는 붓을 들 수 없습니다.”

노아는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췄다.

“저는 카토 공작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 여물을 베고, 밭에 나가서 일하고 있지요. 그림은커녕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케이타 제국은 건축가, 화가, 예술가, 의복 장인 등을 잔뜩 요구했다. 그들은 당연히 케이타 제국에 와서도 같은 일을 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랐다.

기술이 필요하다고 불렀지만, 그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현실에 절망하고, 다시 가이아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그러던 중 황녀인 엘레나가 신전 건축을 맡게 되면서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데려갔다는 소문이 돌자, 다들 들썩이기 시작한 것이다.

노아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던 엘레나의 고개가 끄덕였다.

“상황은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 주세요.”

“황녀님, 저희에게 희망을 보여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좀 더 확실한 사태를 파악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이곳에 온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엘레나는 노아를 보내고, 한 명 한 명 남아 있던 가이아인들을 만났다.

각자의 사정은 달랐으나, 큰 맥락은 같았다.

엘레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 *

찬란한 햇빛이 나뭇잎을 비췄다.

가이아의 제국에서도 변방의 어떤 집에서 안토니안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 밖으로 미친 듯이 도망친 이후, 안토니안은 절망 속에서 지냈다.

처음에는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무조건 도망갔고, 나중에 군신 관계를 맺고 조약을 체결한 뒤 엘레나가 정부로 끌려갔다는 소문을 듣자, 차마 돌아갈 수가 없었다.

‘좀 더 철저히 계획했어야 했는데.’

성급했던 자신 때문에 가이아 제국이 무릎을 꿇은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자, 돌아갈 일이 캄캄했다. 특히 엘레나가 정부로 끌려간 것을 아니 더 했다.

그래서 안토니안은 신분을 숨긴 채 술만 먹었다.

매일매일 술에 취해 살면서 처음에 들었던 죄책감은 희미해져 갔다. 대신 묘한 억울함이 차올랐다.

어릴 때부터 계시에 따라 살았던 삶이다.

당연히 황녀인 엘레나의 부군이 될 거라 생각했고, 가이아의 황제가 될 거라 믿었다.

‘그깟 야만족 때문에 이 꼴이라니.’

칼립소에게 당한 것이 억울했다.

‘다 끝낼 수 있었는데.’

그놈의 배에 검을 박고 감옥에서 빠져나올 때 봤던 엘레나의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엘레나도 그놈 편 아니야?’

처음 청혼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기가 막힌 생각에 코웃음 치고 말았다.

하지만 두 번째, 볼모로 요구했을 때는 가슴 깊이 분노가 끓어올랐다.

거기에다 엘레나의 태도는 어땠는가.

침략자를 정원 산책까지 시켜주고, 웃음을 보이지 않았는가. 자신에게는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았던 웃음이었다.

거기에 달아나자는 자신의 제안을 뿌리친 쪽은 엘레나였다.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엘레나는 늘 제멋대로였다.

가이아의 제1황녀로 모두가 그녀에게 꼼짝 못 했고, 여자 주제에 자신보다 검을 더 잘 썼다.

황위에 오를 때까지는 모든 것을 감내할 생각이지만, 그 이후에는 어림없었다.

“일어났어요?”

환한 금발에 초록빛 눈을 한 자그마한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데이지.”

데이지는 안토니안의 품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아침 먹어요.”

밤낮없이 술에 취한 어느 날, 안토니안을 잡아준 것은 데이지였다.

“언제 일어난 거야?”

“아까요.”

“부지런하기도 하지.”

안토니안은 데이지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세요.”

“아.”

안토니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지의 아버지는 평민 출신이지만, 꽤나 부유한 상인인 세바스찬이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진 그를 데이지가 발견했고, 그가 황녀의 약혼자인 안토니안이라는 것을 알아본 세바스찬은 집에 머물게 하면서 그를 돌봐주었다.

“토니.”

수줍게 파고드는 데이지를 보면서 안토니안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여인이란 이래야지.’

세바스찬의 집에 머물면서 데이지와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늘 뻣뻣했던 엘레나와 달리 데이지는 항상 부드럽고 연약했다.

자신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숭배하는 눈으로 보는 데이지를 보며, 안토니안은 새로운 매력을 느꼈다.

“이제 일어나요.”

“난, 아직 일어나기 싫은데.”

안토니안이 데이지의 허리를 허리를 잡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지 말아요. 아버지가 당신한테 할 이야기가 있대요.”

“그래? 그럼 가 봐야지.”

안토니안이 황궁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세바스찬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면이 서지 않는다는 안토니안의 말에 세바스찬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하여 조직을 만들기까지 했다.

안토니안은 데이지의 손을 잡고, 방문을 나섰다.

* * *

달의 기운이 잠든 밤.

“으…….”

칼립소의 침전에서는 괴로운 신음이 들렸다.

그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보지 마세요』

유모가 어린 칼립소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손가락 틈 사이로 침실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어린 칼립소의 몸이 굳었다.

아버지가 죽었다.

침대에서 알몸으로 칼에 꽂힌 채 시트를 피로 물들였다.

왠지 불길했던 요부는 결국 아버지를 죽였다.

‘안 돼…….’ 팔을 휘젓고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진정하세요.』

유모의 팔을 뿌리치며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안 돼요!』

침실로 들어가려는 칼립소의 몸이 막혔다.

몸부림치며 침실로 들어가는 순간.

번쩍.

칼립소의 눈이 떠졌다.

한동안 안 꾸던 꿈이었다.

칼립소는 무의식적으로 팔과 등을 확인했다.

‘젠장.’

아버지는 정부로 들인 여인에게 살해당했다.

“쓸데없는 꿈을 꿨군.”

아직 날이 밝으려면 멀었지만, 칼립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삭’의 날. 엘레나와 데이트가 있는 날이다.

좋은 기분을 쓸데없는 꿈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칼립소는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성밖으로 나갔다.

‘삭’의 날이 가까워서 그런지 달은 보이지 않고 주변은 온통 깜깜했다.

‘엘레나.’

문득 허전한 마음이 들어 엘레나가 더욱 보고 싶었다.

은빛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휩싸여 그녀의 달콤한 향에 취하고 싶었다.

* * *

로하스 관에서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새벽 일찍 찾아온 칼립소 덕분이었다.

“폐하.”

시종들이 칼립소를 맞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자, 칼립소는 그들을 제지했다.

비비안이 서둘러 나가 칼립소를 맞이했다.

“폐하, 오셨습니까?”

“엘레나는?”

“곧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됐으니까, 가 봐.”

칼립소는 엘레나의 침실로 살짝 들어갔다.

침대에서 단정히 누운 엘레나를 바라보니 뭔가 감동이 뭉클 솟았다.

손짓으로 비비안을 물리고, 칼립소는 그녀 옆에 앉았다.

그녀를 만나고 나니 악몽을 꿔서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칼립소는 슬그머니 엘레나 곁에 누웠다.

살짝 졸았나. 눈을 떴을 때에는, 엘레나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일어났어요?”

엘레나는 어느새 샤오르를 갖춰 입은 상태였다.

오늘의 샤오르는 분홍빛이었다.

분홍색의 잠자리 날개 같은 천이 여러 겹이 겹쳐있었다. 마치 천사처럼.

칼립소는 눈을 깜빡였다.

마치 조금만 방심하면 사라질 것 같았다.

손을 들어 그녀를 만지려 하니, 부드러운 손이 그를 감싼다.

“아직 졸려요?”

“내가, 졸았나 보군.”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보고 싶어서.”

무심하게 중얼거린 칼립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준비됐어요. 일어나요.”

칼립소가 아직 풀린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눈 뜨자마자 보니까 좋네.”

“아침 먹고, 어서 들어가 봐야죠.”

“어디를?”

“황궁에요.”

“왜?”

“그야, 일이 있지 않아요?”

“오늘은 쉴 건데. 하루 종일.”

쉰다는 그 말에 엘레나가 시선을 피했다.

칼립소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황궁에 가는 건 좋은 생각인 거 같아. 아침 먹고, 오늘은 황궁에 갈까?”

“그럴래요?”

“같이 말이야.”

“굳이 왜요?”

“내가 지내는 곳을 보여주고 싶어서.”

칼립소는 몸을 일으켜 엘레나의 손을 끌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후, 엘레나는 칼립소와 함께 황궁으로 들어갔다.

엘레나는 황궁으로 가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자신은 칼립소를 증오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나란히 칼립소와 같이 황궁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시종들과 대신들이 자신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물론 곁에 있는 칼립소 때문이겠지만.

“집무실을 구경해 보겠소? 황궁에 있을 때 내가 많이 머무는 곳이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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