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57화 (57/100)

57

르엘의 말에 캐서린은 또 얼굴을 붉혔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 거예요. 오늘 황녀님도 오셨고 해서요.”

“황녀님이 오셨습니까?”

“네.”

캐서린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까?”

“그건…….”

“아니, 꼭 말을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저는 캐서린 님하고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서요.”

“아, 네.”

“혹시…… 제가 싫은 건 아니시죠?”

“어머, 그럴 리가요!”

“정말입니까?”

르엘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캐서린 님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죠?”

“나…… 나는.”

캐서린은 쿵쾅대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캐서린 님.”

르엘의 따뜻한 손이 캐서린을 잡았다.

“입을 맞춰도 될까요?”

푸르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본 순간, 캐서린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그날,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 * *

대신녀는 엘레나와 대화를 마친 후, 생각에 잠겼다.

우선 엘레나가 능력을 회복하면 어떻게든 가이아 제국으로 모셔와야 했다.

‘안토니안 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 거야?’

안토니안의 별이 건재한 것을 보면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름이 지나면 엘레나 님을 모셔와야 할 텐데.’

그 주체는 안토니안이 되어야 한다.

조금 엇갈리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서둘러 둘이 혼약을 이뤄야 신탁의 계시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위대한 제국’

그것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특별한 계시였다.

수백 년 전, 기록된 가이아 제국의 전성기 때에도 위대한 제국이라는 말은 나오지는 않았다.

‘휴우.’

하필이면 능력이 케이타 황제에게 흘러가다니.

그래도 찾아올 방도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만, 다음 보름 후에도 엘레나를 케이타 제국에 두는 것은 위험했다.

반려가 아닌 상대와 기가 계속 나누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하루빨리 반려자인 안토니안과 결합하게 만들어야 했다.

대신녀는 하를 공작과 협력해 하루빨리 안토니안을 찾는데 온 공력을 다 소진하기로 했다.

한시가 급했다.

* * *

“젠장, 시간 참 안 가는군.”

칼립소는 잔뜩 쌓인 서류를 처리하다가 목을 한 바퀴 돌렸다.

일에 파묻히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아래의 욕망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삭’날 밤만 기다리는 신세가 서글플 지경이었다.

‘운동이라도 해야지.’

그동안 너무 정무에만 집중했는지, 몸이 좀 찌뿌둥한 것 같기도 했다.

칼립소는 대련장으로 갔다.

대련장에는 장수들이 무예를 연습하고 있었다.

칼립소가 들어오는 것을 본 장수들은 검을 높게 들고 환영했다.

“폐하, 오랜만입니다.”

헥토르가 제일 먼저 반기며 나왔다.

“다들 잘 지내고 있나?”

“네, 폐하.”

“훈련들은 열심히 하고 있고?”

“네, 하지만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헥토르는 어깨를 돌리며 말했다.

물론 군사훈련은 계속하고 있으나, 전쟁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당분간 칼립소가 전쟁을 멈추겠다고 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러기에 오늘 대련장에 나온 칼립소의 행보가 반가웠다.

“한번 몸 좀 풀어볼까?”

“네, 폐하.”

헥토르는 가벼운 몸짓으로 달려들었다.

오랜만에 나온 칼립소가 자신을 지목한 것이 자랑스러웠다.

검을 빼든 두 사람의 경합이 시작되자, 훈련하던 장수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날렵한 칼립소의 몸짓에 헥토르는 줄곧 수세에 몰렸다.

며칠 대련장에도 보이질 않기에 살짝 기대했던 헥토르는 결국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폐하, 승복합니다.”

패배를 인정하자, 칼립소가 끄덕였다.

오랜만에 뛰었더니 칼립소의 몸에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폐하, 예전보다 몸이 더 가벼워지신 것 같습니다. 혹시 저희 몰래 영약이라도 잡수신 거 아니십니까?”

헥토르가 감탄 어린 어조로 말했다.

원래도 검술은 뛰어났지만, 지금은 범접할 수조차 없는 느낌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긴. 수고해.”

툭 하고, 헥토르의 어깨를 친 칼립소는 대련장을 나섰다.

오랜만에 땀을 흘렸더니, 씻고 싶었다.

황제가 목욕실로 들어가자, 시종들이 목욕시중을 들기 위해 쫓아왔다.

“찬물로.”

칼립소의 지시에 시종은 찬물을 준비했다.

“나가.”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오려던 시녀를 칼립소가 내보냈다.

전쟁터를 누비던 시절, 이상하게 들끓던 열기는 사라졌다.

잠도 잘 수 없게 들끓던 사나운 기운.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리던 날뛰는 열기가 희한하게 요사이 잠잠해졌다. 대신 다른 욕망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칼립소는 신경질적으로 튜닉을 벗었다.

‘성가셔.’

예전에 한 번에 훌렁 벗었던 튜닉은 장식이 달려 걸리적거렸다.

첨벙.

칼립소는 넓은 욕조에 채워진 차가운 물 가운데로 들어갔다.

아까의 대련으로 해소되지 않는 욕망이 답답했다.

칼립소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래를 무심한 손길로 훑었다.

“으.”

한 차례 절정을 맞았으나,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삭’날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할 수만 있다면 달을 칼로 베어 없애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푸욱.

칼립소는 머리 전체를 잠수하듯 찬물에 담갔다.

* * *

신전 건축의 도면이 확정되자, 엘레나는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불러 모았다.

요하스 자작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최대한 당선자에게 협조하라는 황제의 지시가 있었기에 마지못해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내주었다.

‘분명, 뭔가가 있어.’

요하스 자작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황제께서 여우에 빠진 거야.’

요하스 자작은 엘레나를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신전 공모에서 탈락된 이후, 요하스 자작을 찾는 고객들도 줄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건축은 무조건 요하스 자작에게 맡겨야 한다는 공식이 깨진 것이다.

게다가 신전 건축만 믿고 빌린 자금도 많았다. 예산에 상관없이 진행하라는 황제의 말을 믿고 미리 당겨 놓은 비용이었다.

그 비용이 단순히 건축에만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요하스 자작은 암담한 미래에 한숨이 나왔다.

칼립소 황제는 공평한 정책을 펴서 신임을 얻었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었다.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누고, 공정한 공모제도를 만들어 나라의 발전을 이루게 했지만, 권력을 이용하고 싶어하는 음험한 인간의 욕망까지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요하스 자작 곁에는 칼립소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는 조금씩 그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더 이상 패전국의 정부 따위에 자신의 이익을 뺏길 수는 없었다.

엘레나가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모두 이끌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요하스 자작은 다짐했다.

* * *

“황녀님! 만세!”

엘레나가 자신들을 이끌고 요하스 자작의 집을 나서자 가이아의 건축가 중 한 명이 외쳤다.

그러자, 나머지 건축가들도 따라서 외쳤다.

“조용히 해라.”

엘레나는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식의 소동은 보기 좋지 않았다.

“여기는 케이타 제국이다. 말조심, 행동 조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신전 건축은 사력을 다해 공사하도록 해야 한다.”

엘레나가 칼같이 지시하자, 소란스럽던 가이아의 건축가들은 잠잠해졌다.

“아몬.”

“네.”

“설계 도안을 공유해주고 어떤 식으로 임무를 맡길지 정리해서 보고해.”

“알겠습니다.”

“그럼, 다들 현장으로 가서 일할 준비를 해라.”

“네!”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현장으로 보내고 엘레나는 로하스관으로 향했다.

로하스관에 가까이 가자 엘레나는 깜짝 놀랐다.

한 무리의 인파가 로하스관을 둘러싸고 소란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그들은 가이아인들이었다.

“황녀님! 황녀님!”

조용히 하라는 로하스관 시종들의 만류에도, 엘레나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엘레나는 잠시 당황했다.

“엘레나 님!”

엘레나 옆으로 비비안이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오, 오전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어서요.”

비비안은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가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엘레나가 군중을 향해 천천히 손을 들었다.

“황녀님! 황녀님!”

“저희를 봐주세요! 황녀 마마!”

엘레나는 손을 좀 더 높이 들어,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군중들이 집중하며 엘레나를 바라봤다.

“조용히 해.”

널리 퍼지는 엘레나의 위엄있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집중하며 시선을 고정했다.

몰려온 사람들은 아몬처럼 엘레나와 같이 온 예술가들이었다.

건축가들이 받은 처우를 볼 때, 예술가들 역시 상황은 비슷할 것이다.

“다들 이곳에서 고생들이 많다.”

“황녀님. 흑흑.”

“역시 저희 마음을 아시는 분은 황녀님밖에 없어요.”

사람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여기저기서 조용히 하라며 진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군중들은 다시 집중하며 엘레나의 말을 기다렸다.

“한 명씩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테니 기다리거라. 만약 관할 케이타 귀족의 허락 없이 함부로 나온 거면 명부에 이름을 작성한 후, 즉시 돌아가도록 해. 시간이 걸려도 다 만나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엘레나는 비비안을 불렀다.

“비비안, 대기 명단을 만들어서 이들의 이름을 적어 줘. 약속 시간을 잡고.”

“네, 엘레나 님.”

엘레나의 지시에 군중들은 차분하게 질서를 지키며 비비안에게 이름을 말하고 대기표를 받았다.

접견 일정을 따로 받은 사람들은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은 이제 열 명이 채 안 됐다.

잘 정리가 된 것을 확인한 엘레나는 가이아인을 한 명씩 만나보기로 했다.

“황녀님.”

첫 번째로 들어간 이는 가이아의 화가였다.

예전 자신이 어릴 때 초상화를 그려주었던 자로 엘레나도 안면이 있었다.

“노아 아저씨! 아저씨가 어떻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