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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 같이 미라예스관으로 가자.”
“저도요?”
“그래, 이제부터 할 일이 많아.”
아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는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엘레나의 뒤로 비비안이 따라 들어왔다.
“옷을 갈아 입으시게요?”
“그래.”
엘레나는 불만스럽게 옷장을 바라봤다.
‘좀 다양한 옷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가이아처럼 기사복을 입거나 아니면 활동성 좋은 옷을 입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옷장 안에는 샤오르가 전부였다.
물론 색깔이 다양하고, 입고 벗기가 편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단점도 많았다.
쉽게 벗겨지는 만큼 거동을 조심하게 했고, 따라서 건축 현장을 다니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무언가 너무 여성적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일단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엘레나는 하늘빛 샤오르로 갈아입고 아몬과 함께 미라예스관으로 갔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미라예스관에는 쩌렁쩌렁한 고성이 들렸다.
요하스 자작은 공모 결과를 받아들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당연히 자신이 될 줄 알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다른 이가 될 수 있었지만, 그런 경우에는 협력 체제로 갈 생각이었다.
여태껏 건설을 도맡아왔기 때문에 경험과 인력을 내세워 협업을 하게 되면 어느 정도 이익을 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레나가 되다니!
지난번 사건도 있고, 엘레나가 된다면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싹 끌고 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요하스 자작, 공정한 심사에 의해 결정된 겁니다.”
“불복합니다. 이의를 제기하겠습니다.”
“자작.”
미라예스관의 관리인인 바룽 남작은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미 결정된 것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바룽 남작, 그대는 이 결과가 옳다고 생각합니까? 다른 케이타인이 선정되었다면 나도 두말하지 않고 인정했을 겁니다. 그런데 가이아의 황녀가 낸 거 아닙니까? 그것도 폐하의 정부고요.”
바룽 남작 역시 얼굴이 굳었다.
사실, 결과를 받아들고 요하스 자작만큼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가이아의 황녀의 출품작이 되다니!
아무리 공정한 심사였다지만, 썩 받아들이기 유쾌한 사안은 아니었다.
“다시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자작, 그만두시오.”
바룽 남작은 요하스 자작을 말렸다.
“이런 심사가 항상 공정하게 진행되는 것은 모르지 않을 거 아니오.”
“그래도 이번엔…….”
요하스 자작이 의혹을 나타내고 있을 때, 엘레나가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엘레나 님.”
“여기서 또 보니 반갑네요. 요하스 자작.”
요하스 자작의 인상이 굳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까?”
“흐, 흠.”
요하스 자작은 불쾌한 낯빛을 숨기지 못했다.
“바룽 남작, 케이타 제국의 심사제도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역시 대제국이라 그런지 제도가 선진적이네요.”
엘레나의 말에 두 사람의 입이 꼭 다물렸다.
반박을 하자니, 케이타 제국을 비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제 얼굴에 침 뱉기였다.
“이번에 요하스 자작님이 특별히 협력해 주신다고 해서 기대가 큽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바룽 남작이 엘레나에게 물었다.
“일전에 요하스 자작 댁에 방문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요?”
“식사도 함께하면서, 가이아의 건축에 대해서도 존중해주시는 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덕분에 아몬과도 함께 작업하게 되었고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바룽 남작은 요하스 자작을 나무라듯 바라봤다.
그런 전력이 있으면서 이의를 제기하러 왔다니.
“그뿐이 아닙니다. 신전 건축 시에는 가이아 건축가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겁니다.”
“정말입니까? 요하스 자작?”
바룽 남작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요하스 자작을 찾았다. 하지만 요하스 자작은 자리에 없었다. 자신에게 불리하게 이야기가 돌아가자 꽁무니 빼듯 달아나버린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바룽 남작은 엘레나에게 여러 가지 서류를 건네주었다.
“훌륭한 신전을 건축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엘레나는 여러 가지 제반 서류를 챙겨 들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신전 건축이 시작될 것이다.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불러 모을 생각을 하니 엘레나도 기분이 좋았다.
엘레나는 로하스관으로 돌아와 아몬과 함께 세부적인 실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 *
칼립소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신전 건축이 엘레나에게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 더 그랬다.
‘그 출품작이 엘레나가 했다니.’
파격적인 디자인이 한층 더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 반신반의했던 선택을 운명적인 선택으로 여길 정도로.
실제로 칼립소는 요새 머릿속에 구름이 걷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항상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몸속에 화가 있는 것처럼 피가 끓었다. 전쟁터라도 나가 피를 보지 않으면 괴롭고 답답해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다.
몸속의 피는 끊임없이 다른 피를 갈구했다.
‘전쟁광’은 괜히 붙은 별명이 아니었다.
그러던 칼립소의 얼굴에 어느 순간부터 여유가 흐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크리스가 온갖 재주를 부려 황제를 꾸며주기 시작한 덕분에 그의 외모는 날이 갈수록 빛을 발했다.
비단 외모뿐이 아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는 안정과 편안함이 칼립소 자체를 바꿔놓은 것 같았다.
예전의 날카로움은 유하게, 급한 성질은 여유롭게, 분노와 화는 인내심으로 바뀌어 한층 더 깊은 카리스마로 칼립소는 변하고 있었다.
‘반려를 만난다는 것은 이런 느낌인가.’
칼립소가 달라지자, 정무 역시 순조롭게 흘러갔다. 늘 벌컥 화를 내던 칼립소가 여유롭게 받아들자, 대신들도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전달할 수 있었다.
늘 전쟁에 휩싸였던 케이타 제국에 평화가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그날 저녁, 칼립소는 들뜬 걸음으로 로하스관으로 향했다.
생각 같아서는 엘레나에게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싶었으나, 적당한 만남을 추구하는 엘레나에게 가능한 모두 맞춰주고 있었다.
하늘에 별이라도 따다 주고 싶은 마음이니 오죽할까.
칼립소는 막 사랑을 느낀 소년처럼 들뜬 마음으로 로하스관에 들어섰다.
그에게 비로소 찾아온 첫사랑이었다.
칼립소가 행차하자, 로하스관의 시종과 시녀들이 내려와 그를 맞았다.
칼립소가 고개 숙인 비비안에게 물었다.
“엘레나는?”
“곧 내려오실 겁니다.”
잠시 후, 새하얀 샤오르를 입은 엘레나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칼립소에게 다가왔다.
칼립소가 꽃다발을 내밀며 이를 드러내 웃었다.
꽃다발을 들은 황제라니.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칼립소를 봤지만, 정작 칼립소는 당당하기만 했다.
“받아.”
“고마워요.”
엘레나는 고개를 숙여 꽃향기를 맡았다.
향긋하고 달콤한 꽃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오늘 좋은 소식 있던데.”
“들었어요?”
“축하해. 당신의 신전이 어떤 식으로 완성될지 기대가 돼.”
당신의 신전.
그 말이 왠지 엘레나의 가슴을 울렸다.
“가이아 건축의 정수를 맛보게 해줄게요.”
“무척 설레네.”
칼립소가 사랑스럽다는 듯 엘레나의 머리에 입술을 댔다가 뗐다. 붉은 눈에는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이젠 아랫사람들에게 좀 맡겨.”
“그럴 생각이에요.”
체계만 잡으면 사실 현장의 세세한 것까지 엘레나가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실전 건축으로 들어가면 전문가인 아몬에게 맡기고 뒤로 물러설 계획이었다.
그것보다는 다른 가이아 사람들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었다.
“좋은 생각이군.”
같이 밤을 보내서 그런가. 칼립소와의 만남도 이전보다 훨씬 편안해졌다.
엘레나의 입매 역시 부드럽게 풀어졌다.
“폐하, 정원으로 나갈까요?”
“그…….”
칼립소가 살짝 시선을 비키며 말했다.
“둘이 있을 땐 폐하 소리는 하지 말지.”
엘레나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그날 밤처럼 부르던지.”
엘레나의 볼도 붉어졌다.
「칼립소…….」
그날 밤, 정신이 없어서 이름을 불렀던 게 생각났다.
“그건, 차차 해요.”
엘레나가 얼굴을 숨기듯 먼저 정원으로 나가자, 칼립소가 황급히 따라 나갔다.
칼립소는 은근히 스치는 엘레나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커다란 손에 폭 쌓이는 느낌이 좋았다.
“정무는 잘 보고 왔어요?”
“그래.”
엘레나를 만나기 위해 그간 어떤 시기보다 성실히 정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혹여라도 실망하면 안 되니까. 멋져 보인다는 말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데릭에게 달라졌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꼭 길들여지는 기분이야.”
“뭐라고요?”
엘레나가 쿡 웃었다.
“마음껏 길들여. 당신한테라면 상관없으니까. 밤이든 낮이든. 물론 밤이라면 더 좋고.”
정원에 어둠이 깔리고, 달은 반쯤 기울어있었다.
은은한 달빛에 비친 엘레나의 얼굴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정원의 나무 근처에 가자 칼립소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달이 아직 반이나 있네.”
칼립소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삭’이 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저절로 입술이 엘레나에게 닿았다.
“키스는 괜찮지?”
뜨거운 숨결이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자잘한 키스는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런데 왜 하필 ‘삭’에만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지?”
“그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관없어. 내가 유혹하면 되니까.”
칼립소의 혀가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깊어진 키스에 엘레나의 몸도 함께 반응했다.
둘 모두 기다렸던 접촉이었다.
칼립소의 혀가 관능적으로 그녀에게 얽혔다. 거칠지만, 능숙해진 움직임에 숨이 터져 나왔다가 그대로 사라졌다.
칼립소의 손도 같이 움직이자, 엘레나의 다리 사이도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와는 달랐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에 그만큼 더 절실해졌다.
그 순간, 그녀의 다리 사이로 칼립소의 길고 굵은 다리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