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왜?”
칼립소는 즉각 반박했다.
“우리가 그런 관계는 아니잖아요.”
“그러게 진작 혼인을 하자고 했잖아.”
칼립소가 투덜대듯 중얼거렸다.
“지난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그래.”
마음에는 들지 않는 듯했으나 칼립소는 수긍했다.
“그럼, 신혼이라는 것은 빼고, 열애 중이라고 해도 되잖아?”
남녀 간의 정을 나누는데 꼭 신혼일 필요가 있을까.
“본업을 빼놓고 연애만 하는 건 싫어요.”
“같이 밤을 보냈는데?”
칼립소는 깜짝 놀랐다.
함께 밤을 보냈다. 그런 엄청난 경험을 했는데 달라지는 게 없다니.
자신으로서는 하늘과 땅이 바뀌는 것 같았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줄은 모르겠어요.”
완전히 품에 들어온 줄 알았는데 또 스르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칼립소는 애써 씁쓸한 미소를 감췄다.
“그럼, 저녁에 오겠소.”
“다음에는 ‘삭’날에 봐요.”
“‘삭’날?”
“오늘이 보름이잖아요. 또다시 보름 후, 달이 저무는 ‘삭’에 보자고요.”
“왜 그래야 하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칼립소가 되물었다.
혹시 지난 밤이 무리가 되었나.
너무 거칠게만 몰고갔나.
솔직히 중간부터 엘레나의 반응을 보지 않았던 건 인정한다. 까무러치도록 좋아서 지치도록 몰고 갔으니까.
칼립소는 찬찬히 엘레나의 얼굴을 훑었다.
“내가, 별로였나?”
뜻밖의 이야기에 엘레나가 멈칫했다.
“처음이라서 그래.”
칼립소는 귀 끝이 발개진 채로 살짝 퉁명스럽게 말했다.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니까, 하다 보면 더 좋아질 거야.”
“그게 아니라…….”
엘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럼?”
“밤은…… 좋았어요.”
칼립소의 입가가 확 올라갔다.
같은 것을 느꼈다는 환희에 어린 미소는 곧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왜?”
불만스럽다는 듯 칼립소의 눈썹이 올라갔다.
“원래 가이아에서는 그렇게 해요.”
엘레나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 채 얼버무렸다.
“그래?”
칼립소는 유심히 엘레나의 얼굴을 봤다.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마치 수줍어하는 새 신부 같았다.
‘부끄러운가 보군.’
그렇게 생각하자, 엘레나가 귀엽게만 보였다.
기꺼이 보호해 주고 싶을 만큼.
“그동안 열심히 각자 일을 하고요. 아마 폐하의 정무 보는 모습은 꽤 멋질 거 같아요.”
그 말에 칼립소는 어깨가 더욱 으쓱해졌다.
‘내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좋다는 말이군.’
“기다리는 설렘도 있고요.”
“그건 그렇지.”
조금, 아니 매우 많이 아쉽기는 했지만, 칼립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공모 심사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예상보다 신전 설계안을 공모한 사람들의 수가 많았다.
요하스 자작이 이 나라의 건설을 도맡은 이후, 드러나진 않았지만 하나하나 불만이 쌓여 갔다.
제국이 영토를 넓힐 때마다, 당연하게도 건축은 필요했다.
처음에는 크지 않았던 영역이 점점 커져갔고, 요하스 자작이 이익을 독점하는 것에 다른 귀족들도 불만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따라서 이번 신전 건축 공모는 기회의 장이 되었다.
그동안은 경험과 편의성을 이유로 요하스 자작이 독점했던 것을 탐내는 귀족들이 사람을 시켜 응시하기도 했고, 스스로 건축안을 작성해 응시한 평민들도 있었다.
그래서 공모에 응시한 설계안의 개수는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덕분에 평가를 맡은 심사위원의 움직임도 바쁘게 돌아갔다.
여러 설계안을 본 심사위원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좁혀졌다.
하나는 완성도가 높았으며, 하나는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설계안에 대한 표가 동일하게 나오자, 두 개의 설계안을 두고 갑론을박이 심해졌다.
“마지막은 폐하께 결정을 맡기는 것이 어떨까요?”
데릭의 제안에 대신들도 수긍했다.
큰 예산이 들어가고 케이타 제국의 상징이 될 신전이기에 황제의 의견이 중요했다.
“하지만, 폐하께서 우리가 알아서 결정하지 못하고 올렸다고 역정을 내시지 않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데릭이 말하자, 최근 칼립소의 모습을 떠올린 다른 대신들도 수긍했다.
요즘 황제의 기분이 매우 좋았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칼립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만큼 너그러웠고, 귀찮아했던 정무 회의에도 열심이었다.
“이번 정무 회의에서 마지막 안건으로 올리죠.”
“네.”
보통 이렇게 의견이 팽팽히 나눠지지는 않는데 이번 경우는 예외였다.
이렇게 시간을 끄느니 황제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나았다.
황제의 심기만 불편하지 않다면야.
* * *
대신들의 예상대로 최근 칼립소의 기분은 아주 좋았다.
꿈같은 밤을 보낸 다음 날부터 칼립소의 기분은 붕 떠 있었다.
빨리 한 번 더 같이 밤을 보내고 싶었지만, 엘레나의 말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달이 저무는 ‘삭’ 날에 함께 보내요.」
「왜 그래야 하지?」
「가이아에서는 그렇게 해요.」
도대체 왜.
같이 몸을 겹치는 것이 이리도 좋은데.
굳이 날짜를 정해서 합방을 해야 하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짐승 같은 자국을 보았기에, 칼립소도 할 말이 없었다.
아쉽긴 아쉬웠지만.
“폐하.”
“말해.”
정무 회의 후, 데릭이 칼립소에게 나아갔다.
“다름이 아니라 신전 건축에 관한 사항입니다.”
“결정이 났나?”
신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칼립소는 관심을 보였다.
자신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엘레나가 선정되길 바라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래야 엘레나가 웃을 테니까.
“그게…….”
데릭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후보는 둘로 간추려졌으나, 양쪽 다 팽팽하여서 결론이 쉽게 나지 않습니다.”
“투표로 정하지 않았나?”
“공교롭게도 표 수가 같습니다.”
“그래서?”
칼립소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폐하께서 결정을 내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짐은 관여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던 것 아닌가?”
“예, 하지만 워낙 의견이 팽팽해서 시일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희끼리 정할까요?”
“흐음.”
칼립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져와 봐.”
칼립소의 명에 데릭이 서둘러 두 개의 설계안을 가지고 왔다.
칼립소는 유심히 두 개를 비교해보았다.
둘 모두 훌륭한 설계안이었다.
‘이 중 엘레나가 제출한 것이 있을까.’
알아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과정이 공정하다면, 승복은 빠른 편이에요. 거기다 그런 정책은 지지하는 편이고요.」
칼립소는 사심을 누르고 다시 살펴봤다.
첫 번째 설계안은 안정감이 있으며 고전적이었다.
가이아에서 많이 봤던 전형적인 신전이었고, 케이타 제국에서 신전을 세운다면 이런 형태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상상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예산에 기준을 두지 않았기에 규모는 좀 더 화려했다.
하지만 왠지 끌리는 것은 두 번째 설계안이었다.
이 신전은 기존에 보아왔던 것과 달랐다. 어떻게 보면 웅장했고, 어떻게 보면 소박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연스러웠다.
기둥은 나무를 연상시켰으며, 신전의 지붕은 단순한 지붕이 아닌 나무에서 피어나는 잎들이 무성한 숲과도 같았다.
이성은 첫 번째 것을 말하고 있었으나, 본능은 두 번째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칼립소는 이성보단 본능의 감각을 선호했다.
“두 번째로 하지.”
명쾌한 결정에 데릭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칼립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누가 출품한 것인지 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누군지 차차 알게 되겠지.
그것보단 엘레나가 칭찬한 제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그리고 데릭.”
“네, 폐하.”
“앞으로 평가단은 홀수로 구성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동점표가 나오는 일이 없기를 미리 방지하는 차원이었다.
“무효표가 나오면 어찌할까요?”
“평가단으로 선정했는데 무효표를 내는 건 무능한 거 아닌가?”
“네, 맞습니다.”
데릭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앞으로는 잘 정비하겠습니다.”
“가봐.”
칼립소는 손을 내저었다.
칼립소는 한번 부하들에게 권한을 주면 그 부분에 관해서 만큼은 자율권을 존중해주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자율권에는 책임도 함께 따라다녔다.
그 점에 있어서 칼립소는 꽤나 엄격했다.
* * *
“엘레나 님! 엘레나 님!”
비비안이 서둘러 로하스관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가뜩이나 엘레나의 심경은 예민해져 있었다.
어제는 예정되었던 공모 발표일이었는데, 예상보다 접수 인원이 많다는 이유로 연기되었다는 소식만 들었던 것이다.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한 만큼 초조한 마음만 가득했다.
“엘레나 님.”
“무슨 일인데 그렇게 소란인 거야?”
“미라예스관에서 전언이 왔어요.”
“뭐?”
엘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다리던 소식 드디어 왔다.
“결과는 어떻게 된 거야?”
“저는 모릅니다.”
“그럼?”
“여기요.”
비비안이 서류를 엘레나에게 건넸다.
밀봉된 서류는 직접 뜯어야 했다.
엘레나는 심호흡을 커다랗게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소식을 듣고 나왔는지 아몬도 초조한 기색으로 옆에 서 있었다.
엘레나는 조심스레 봉투를 뜯었다.
서류를 읽어보던 엘레나의 입매가 가늘게 떨렸다.
“아몬!”
“황녀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해냈어!”
“아!”
아몬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황녀님.”
“아몬, 고생했어. 물론 앞으로 더 고생해야 되겠지만.”
“그런 것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녀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엘레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몬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고 있었다.
“아몬, 네가 열심히 한 결과야.”
“……정말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그건 엘레나도 반신반의였다.
케이타 제국의 심사가 공정하다고는 하나, 자신은 패전국의 황녀였다. 자신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설계도의 내용과 상관없이 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정말, 다행이야.’
이로써 요하스 자작 밑에 있는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구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