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칼립소가 엘레나의 잔과 자신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건배할까?”
“오늘 밤을 위해 건배하죠.”
“좋지.”
쨍그랑.
살짝 닿은 잔에서 투명한 소리가 났다.
“맛이 괜찮군.”
솔직히 말하자면 맛보다는 분위기가 좋았고, 분위기보다는 옆에 있는 엘레나가 좋았다.
“그러네요.”
하늘에는 환한 달빛만큼 별도 많았다.
“어?”
갑자기 엘레나가 일어섰다.
“별똥별이에요!”
휙.
하나의 별이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졌다.
“봤어요?”
마치 아이처럼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칼립소의 표정은 굳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칼립소는 하늘 대신 엘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색 머리카락은 달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살짝 달아오른 하얀 뺨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감동하는 보랏빛 눈동자는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하다는 별똥별보다도 귀한 구경이었다.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다.
칼립소의 붉은 눈이 깊은 소유욕으로 넘실거리며, 엘레나의 순수한 미소를 사납게 주시했다.
밤하늘 아래서 칼립소는 제 시선이 어떻게 변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엘레나를 보는 데만 급급했다.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데, 얼른 소원을 빌어야겠어요.”
엘레나가 두 손을 고이 모았다.
칼립소는 같이 소원을 비는 대신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떤 소원을 빌까. 공모에 당선되는 거? 아니면 가이아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
그녀가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욱신거리며 심장이 저려 왔다.
소원을 다 빌었는지 엘레나가 감은 두 눈을 떴다.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 보자, 심장이 단도가 꽂힌 것처럼 내려앉았다.
“오늘은 운이 좋네요. 별똥별을 다 보고.”
엘레나가 눈가를 접어 웃었다.
슬픈 미소를 감추며, 엘레나가 와인을 들었다.
한 잔을 남김없이 비우자, 칼립소가 다시 잔을 채웠다.
호젓한 달빛 사이로 칼립소는 와인을 마시는 엘레나를 바라봤다.
달을 바라보는 엘레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사람같이 보였다.
달아나지 못하게 완전히 묶어두고 싶다.
붉은 눈에는 어느새 소유욕과 함께 짙은 욕망이 드러났다.
하얀 목덜미를 잡고, 입술을 벌려 제 혀를 밀어 넣고 싶었다.
아무 곳도 가지 못하게 허리를 붙잡고, 이를 박아 넣고 싶었다.
그는 불순한 정욕을 잠재우며, 한참이나 엘레나를 지켜봤다.
칼립소는 본능을 진정시키며 와인을 한 잔 더 마시곤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그만하지.”
엘레나가 또다시 와인병을 잡자, 칼립소가 말렸다.
“왜요?”
“취하겠어.”
“취하면 안 되나요?”
엘레나가 빈 와인잔을 칼립소 앞으로 내밀었다.
억눌린 충동이 서서히 고삐가 풀린다.
“내가 안 될 거 같아서.”
“왜요?”
“자꾸 물으면 안 되는데.”
칼립소의 눈가에는 욕망이 번졌다.
“끝낼 수 있을 때, 끝내지.”
눈빛과 달리 칼립소는 깔끔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갈래요?”
칼립소의 동작이 멈췄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말투가 조절을 잃고 사나워졌다.
“알고 하는 이야기예요.”
달빛에 비친 엘레나의 얼굴에 결연한 기색이 비친다.
그때와 비슷한 분위기다. 마치 전투에 임하는 것 같은 자세.
칼립소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됐어.”
칼립소가 절망을 느끼고 돌아서려는데, 엘레나의 손이 그를 잡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이 왠지 모르게 수줍어 보였다.
칼립소는 골똘히 그 손을 내려봤다.
‘긴장했나?’
칼립소의 큰 손이 엘레나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부드러운 몸짓과는 달리 말투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이번엔 시작하면 멈출 자신이 없는데.”
“멈출 필요 없어요.”
엘레나의 보드라운 입술이 칼립소에게 먼저 닿았다.
입술이 겹쳐지고 달콤한 숨결이 흘러들어왔다.
순간 참지 못하고, 여린 턱을 쥐어 잡고 칼립소가 화답했다.
“읏.”
칼립소는 단단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고개를 틀어 혀를 더 깊이 넣자, 움찔하는 몸을 힘껏 당겼다.
뒤섞이는 숨결 속에 흥분이 배가 되었다.
“정말, 오늘 밤을 같이 보내길 원해?”
칼립소는 다시 한번 엘레나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아까의 결연한 표정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달뜬 흥분뿐.
보랏빛 눈동자가 자수정처럼 반짝이며 그 안에 칼립소의 붉은 눈을 담았다.
“꼭 말로 해야 해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엘레나가 속삭이며 다시 입술을 맞대자, 칼립소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꼭 욕망 때문만은 아니다. 하고자 한다면 그동안 기회가 없던 것도 아니니까.
다만 엘레나가 스스로 마음을 열기를 기다렸다.
강제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맞닿아서,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구애의 순간이 비로소 보답을 받은 것 같아 칼립소는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엘레나.”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칼립소의 입술이 이마로 향했다.
“마음을 열어줘서, 정말 고마워.”
마치 경배하듯 칼립소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마에서 눈썹으로.
그리고 뺨으로.
마지막으로 다시 입술로.
아까와는 다른 보드랍고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입술만 맞대다 살짝 뗀 칼립소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후회할 일은 하지 않아요.”
엘레나의 팔이 칼립소의 목을 둘렀다.
“안으로 들어가지.”
“장소가 문제가 되나요?”
칼립소가 설핏 웃었다.
“대담한 건 좋은데, 그래도 우리의 첫날밤이잖아. 그리고 엘레나, 급한 건 내 쪽이야.”
칼립소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걸을 때마다, 아래쪽에서 무시하지 못할 존재가 흔들렸다.
그게 무언지 느껴지자, 엘레나의 얼굴로 달아올랐다.
걸을 때마다 흉흉하게 일어선 그것이 허벅지 안쪽을 찔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좀 꾸미고 다닐 걸 그랬어.”
칼립소의 입가에는 숨기지 못한 미소가 걸렸다.
엘레나는 춤추듯 흥분된 칼립소의 얼굴을 올려봤다.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묵직한 부피에 배 속이 조여왔다.
로하스관의 정문을 지나자, 시녀들이 인사를 하며 그들을 따랐다.
그새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곧바로 정문이 열리고, 칼립소의 발길을 따라 비비안이 서둘러 침실 문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착착 진행될 건 없잖아.’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것은 마음에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공포도 함께 자리 잡았다.
엘레나도 어린 시절, 황궁에서 성교육에 대해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초야에 대해서 뭐라고 했더라.’
누워서 가만히 견디고 있으면, 끝난다고 했다. 중간에 아픔이 있더라도 절대로 일어서면 안 된다고 했다.
아픔이 있어봤자 얼마나 아프겠는가 하고 당시엔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밑을 자극하는 거대한 부피에 조금 긴장됐다.
아니, 솔직히 많이.
침실 문이 열리자, 비비안이 따라 들어왔다.
“폐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엘레나 님의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되었으니 나가.”
칼립소가 단호하게 명했다.
“폐하, 아무리 그러셔도 첫 밤이십니다. 엘레나 님은 바깥에서 돌아오셔서 씻지도 않으셨고…….”
“비비안.”
“네, 폐하.”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목을 벨 거다. 나가.”
황제는 진심이었다.
비비안은 돌처럼 굳어 고개만 끄덕인 후, 뒷걸음질 쳐서 침실을 벗어났다.
달칵.
침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칼립소는 이보다 더 부드러울 수 없는 몸짓으로 엘레나를 침대에 눕혔다.
칼립소는 먼저 망토를 벗어 던졌다.
튜닉을 탈의하는 손짓이 급했다. 예전 같으면 한 번에 벗을 수 있던 튜닉과 달리, 이번 크리스가 만든 것은 쓸데없이 장식이 복잡했다.
확.
걸리는 옷을 기어이 칼립소가 잡아 찢었다.
“이럴 땐, 옷이 불편하군.”
“하지만, 멋졌어요.”
칼립소가 무릎걸음으로 침대 위에 올랐다.
“만족했다니 다행이야. 바꾼 보람이 있어서.”
웃옷을 벗은 칼립소의 몸은 전설 속 전사들을 연상시킬 만큼 완전한 사내의 것이었다.
전장 속을 누빈 것을 증명하듯 탄탄한 근육질과 흉터가 자잘하게 새겨져 있었다.
남자다운 두툼한 허리와 그의 복근에 엘레나의 시선이 닿았다.
복근 한쪽 옆에는 커다란 흉터가 보였다.
“이건…….”
검이 깊이 박혔던 자리였다.
엘레나의 손이 닿자, 불끈 근육이 화답했다.
“신경 쓰지 마. 다 잊었으니까.”
칼립소의 손이 엘레나를 마주 잡았다.
“당신이 내게 온 걸로 충분해.”
다시 한번 입술이 얽혔다.
이번에는 엘레나의 옷이 벗겨질 차례였다.
탁.
칼립소의 옷과 달리 샤오르는 한 번의 매듭을 푸는 것으로, 스르르 벗겨졌다.
하얗고 부드러운 상체가 드러나자, 칼립소의 심장이 배로 뛰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를 거야.”
목덜미를 빨아대는 입술이 뜨거웠다.
‘뭐가 이리 달콤할까.’
칼립소의 손이 엘레나의 살결을 쓰다듬었다.
매끄러우면서 착 감기는 느낌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그녀의 몸에서는 향이 났다. 그것도 사람을 미치게 하는.
과일향인가.
아니면, 달큰한 와인향 같기도 하고.
칼립소는 그녀의 체취를 듬뿍 들이마셨다.
붉은 눈이 기이한 열기를 품었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반응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투투둑.
허리에 있는 매듭도 풀리자, 숨겨두었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났다.
“돌겠네.”
칼립소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제야 엘레나가 멍한 시선을 들어 칼립소를 봤다.
적어도 지금은 그가 적국의 황제라는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점점 내려가는 입술에 뱃멀미를 하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엘레나.”
그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전율했다.
“이제 한계야.”
하체에 뜨거운 것이 닿았다.
엘레나의 눈가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치는 순간.
“잠깐만요.”
“이제, 못 멈춘다니까.”
칼립소가 항의하려는 듯한 엘레나의 입술을 막았다.
동시에 두 손으로 허벅지를 갈랐다.
빌어먹을.
그가 욕설을 삼켰다.
미간을 일그러뜨리자, 엘레나가 다리로 허리를 감쌌다.
“조금만, 힘 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