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51화 (5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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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스 자작은 엘레나가 다녀간 이후,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활용해 수많은 설계안을 받았다.

그중 실력이 좋아 보이는 가이아의 건축가인 샤자드의 설계안으로 작업을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요하스 자작은 기존의 설계안을 크게 뒤집을 생각이 없었다.

지금 신전 공사는 기초 토대 작업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다시 돌려놓는다면 계획서를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게다가 가이아의 건축가 이름을 이 원대한 계획에 올려 줄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따라서 처음의 계획을 그대로 두되, 그 안에서 그의 입맛에 맞게 샤자드에게 수정만 시킨 것이다.

나온 결과물은 꽤 만족스러웠다.

그동안 제대로 된 설계도 없이 작업했기에 양식만 갖춰도 그럴싸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요하스 자작은 이번 공모 결과를 자신했다.

결과가 나온 후에는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다시 한번 단단히 교육시킬 생각이었다.

비록 지금은 엘레나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지만, 공모에 채택이 되면 엘레나도 명분이 없으니 더 이상 간섭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제출 잘 하고 오십시오.”

“그래요.”

엘레나는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미라예스관으로 들어갔다.

“설계 도안을 접수하러 왔습니다.”

“여기로 제출해주세요.”

안내원의 말에 따라 엘레나는 설계안을 제출했다.

몇 가지 양식에 사인하고 최종 제출한 후, 엘레나는 미라예스관을 나왔다.

이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건 그렇고…….’

엘레나는 잠시 미뤄뒀던 고민을 떠올렸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정원길을 걸으며, 엘레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봤다.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밤.

대신녀의 말대로라면 칼립소와 함께 밤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내가 찾아가야 하나?’

갑자기 고민이 됐다.

칼립소와의 관계에서는 그동안 계속 밀어내기만 했지, 한 번도 자신이 다가선 적은 없었다.

‘어떻게 하지.’

칼립소가 리드한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번잡한 생각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로하스관 길목에 한 사내가 보였다.

큰 키에 검은 머리, 화려한 망토에 잘 꾸며진 튜닉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누굴까.’

뒷모습이 어쩐지 눈에 익는다 싶더니 남자가 뒤를 돌았다.

‘세상에.’

엘레나는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사실 한 시간 전부터 칼립소는 로하스관 앞에서 엘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에서 기다리라는 시종의 말에도 결국 문 앞까지 나와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제나저제나 엘레나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차였다.

놀란 보랏빛 눈동자를 본 순간, 너무 반가우면서도 어쩐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너무 과했나?’

새로운 옷을 입고, 이발을 하고 나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굳어버린 엘레나를 보면서 칼립소는 시선을 돌렸다.

“폐하…….”

먼발치에서 엘레나의 음성이 들리자, 칼립소는 그제야 시선을 맞췄다.

“엘레나?”

칼립소는 점점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석양빛이 내려서 엘레나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오?”

아무리 측근들이 잘 어울린다고 하여도 조금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미리 엘레나의 취향이라도 알아보고 바꾸었어야 했나.

점점 칼립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꾸 말없이 자신의 얼굴만 살피는 게 살짝 불안하기도 했다.

그 때, 엘레나가 살짝 웃었다.

“멋지네요.”

“정말?”

칼립소의 얼굴에 소년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엘레나의 반응에 칼립소의 뺨이 홍조로 물들었다.

그러자 엘레나가 칼립소의 손을 잡았다.

“안으로 들어갈래요?”

“좋지.”

사춘기 소년처럼 칼립소는 귀까지 붉힌 채, 엘레나의 뒤를 따라갔다.

로하스관에 들어선 칼립소를 보고 비비안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폐……하!”

비비안의 눈이 감탄으로 반짝였다.

“너무 멋지십니다! 워낙 출중한 인물이셨는데 이제 더 그 빛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래?”

“네! 폐하! 엘레나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래.”

호들갑을 떠는 비비안에게 엘레나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의 찬사는 계속 이어졌다.

“폐하께선 정말 태양보다 빛나시고, 하늘보다 멋지십니다. 평소에도 외모가 출중하시다고 여겼으나, 특히 오늘은 눈이 부실 정도로…….”

“됐다.”

칼립소는 손을 내저었지만, 내심 이런 반응이 싫지는 않았다. 은근슬쩍 엘레나의 표정을 살피며 비비안이 더 말해주길 바랐으나, 칼립소의 손짓에 비비안의 입은 꼭 다물렸다.

“저녁은요?”

엘레나가 다정하게 묻자, 칼립소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울렸다.

“아직.”

“그럼, 함께 들어요. 비비안, 준비해 줘.”

“네, 엘레나 님.”

비비안은 서둘러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서도 하녀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비비안, 폐하께서 무슨 일이 있으신 거예요?”

“그전에도 잘 생기셨지만 오늘은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에요!”

“눈이 부셔서 눈을 못 뜰 정도라니까요?”

“엘레나 님을 그만큼 좋아하시는 거겠죠?”

“너무 멋있으세요!”

식당은 하녀들의 수다로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조용! 어서 식사 준비를 해. 폐하께서 저녁을 안 드셨으니 서둘러.”

“네.”

비비안은 빠른 식사 준비를 지시했다.

점점 엘레나 님과 폐하와의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었다.

처음, 엘레나 님을 모실 때부터 비비안은 그녀야말로 황제 폐하의 반려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일이 좀 꼬이기는 했으나, 지금이라도 두 분이 서로 마음을 맞춰나간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비비안은 최선을 다해 저녁 만찬을 준비했다.

* * *

식사 시간은 내내 화기애애했다.

따끈한 파이와 수프, 암퇘지 구이가 있는 식탁은 풍성했다.

무엇보다 엘레나의 기분이 좋은 것 같아 칼립소는 같이 흥겨워졌다.

식사 내내 엘레나가 보인 모습은 예전과 달랐다.

어떻게 보면 긴장을 하고 있었고, 어떻게 보면 흥분을 감추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튼 기존의 느낌과는 다른 느낌이었고, 그것이 칼립소는 싫지 않았다.

‘좀 꾸며보길 잘했네.’

칼립소의 입가에도 내내 미소가 머물렀다.

“오늘 미라예스관에 다녀왔어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마감일이군.”

칼립소가 보드라운 흰 빵을 손에 들어, 길게 찢어 입에 넣었다.

“설계안 구상은 잘 끝났소?”

“아몬이 애썼어요.”

“다행이군.”

“이젠 잘되길 바라야죠.”

엘레나가 스튜를 한 입 떠먹었다.

“이번 공모는 열 명의 대신들이 선정하게 될 거요.”

“네.”

관심 있는 이야기에 엘레나의 눈빛이 반짝였다.

“출품 작품에 신상 정보를 삭제하고 번호를 매겨 평가할 거라, 누가 무엇을 제출했는지 모르지. 비밀투표 형식으로 최종 득점을 합산해서 평가할 거요. 간혹 공모전이 열리면 우리는 그렇게 하거든.”

“좋은 방법이네요.”

가끔 느끼는 거지만, 엘레나는 어떤 면에서는 케이타 제국이 앞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비밀투표를 한다면, 요하스 자작이나 다른 귀족들의 로비가 통하기 힘들 것이다.

케이타 제국에서는 실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더니 공정성을 중시하는 칼립소 황제다웠다.

“비밀 투표를 하는 건 가이아에서도 한 번 도입해 볼 만한 거 같아요. 정말 누가 제출한지 모르나요?”

“모르지. 만약 알고 투표를 한다면 그 사람은 직위를 박탈하고 감옥으로 보내지. 덕분에 딱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감히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없어.”

“그 한 사람은 누군데요?”

“당연히.”

칼립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지.”

그리곤 당당히 덧붙였다.

“내가 바로 제국이니까.”

엘레나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자, 의외로 진지한 칼립소의 눈빛과 마주쳤다.

“그러니까, 부탁해보겠소?”

칼립소의 눈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당신의 부탁이라면, 미친 척하고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사양할게요.”

엘레나는 칼같이 답한 후, 잔을 내려놨다.

기껏 좋은 제도를 만들어 놨다고 칭찬했더니 이런 소리라니!

“과정이 공정하다면, 승복은 빠른 편이에요. 거기다 그런 정책은 지지하는 편이고요.”

“그런가.”

칼립소가 눈썹을 살짝 들었다 내렸다.

하긴, 그게 엘레나의 성정과도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수상했다.

사실, 아까부터 엘레나는 묘하게 긴장되어 보였다. 그래서 혹시나 청탁을 하려고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만약.

엘레나가 진짜 청탁을 한다면.

자신의 오래된 원칙을 깨고라도 들어 주고 싶은 정신 나간 충동도 들었던 것이다.

“식사가 끝난 거 같은데, 산책할래요?”

엘레나가 먼저 시간을 보낼 것을 제안하자 칼립소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칼립소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정원에는 어느새 어둠이 완전히 깔려 있었다. 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이었다.

달빛 사이로 둘은 나란히 걸었다.

“달빛이 좋군.”

“보름이라서 그래요.”

보름달의 환한 빛이 둘 사이로 흘렀다.

“보름달이 뜰 때, 가이아에서 연인끼리는 와인을 마셔요.”

연인이라는 말에 칼립소의 눈가가 떨렸다.

“그럼, 지나칠 수 없지. 우리도 한잔할까?”

“저기로 갈까요?”

엘레나가 가리킨 곳은 정원에 있는 야외 캐노피였다.

야외에서 밤하늘을 보면서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혹시 준비했소?”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내심 엘레나는 조금 찔렸다.

보름에 밤을 보내야 되는 것을 알고는 캐노피에서 와인을 마시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준비한 건 아니다.

칼립소는 살짝 웃더니, 엘레나를 캐노피 쪽으로 이끌었다.

엘레나가 시종에게 지시하자, 금세 캐노피 안으로 와인과 다양한 치즈와 과일이 담긴 은쟁반이 대령됐다.

은쟁반을 내려놓은 시종은 한 발짝 뒤에 서서 다음 시중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러가.”

“네, 폐하.”

칼립소가 시종을 물리자, 캐노피 안에는 칼립소와 엘레나 단둘만 남았다.

달빛이 그윽하게 캐노피 안으로 흘렀다.

“이런 것도 꽤 괜찮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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