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정부로 이 나라에 끌려 온 이상 언젠가 그와 밤을 보낼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상하게 군 것은 칼립소였다.
바로 함께 합방이라도 할 것같이 굴어놓고는 구애니 연애니 이런 것들을 늘어 놓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칼립소에 대한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그저 좋은 감정이 생기더라도 적국의 황제니, 미래를 함께하지 못할 뿐이다.
엘레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뺏겼다면, 다시 뺏어오면 그뿐이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엘레나는 시선을 들었다.
-황녀님, 들어가도 될까요?
소리의 주인공은 아몬이었다.
“들어와.”
“황녀님, 드디어 설계도를 완성했습니다.”
아몬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말했다.
“완성을 했다고? 아몬, 고생했어.”
엘레나는 아몬이 완성한 설계 도안을 펼쳤다.
“아몬……!”
설계 도면의 신전은 아름다웠다.
자연의 곡선을 살린다는 아몬의 말처럼 도면에는 직선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몽환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더 신비로워 보였다.
둥글게 설계된 지붕들은 꽃과 나무로 뒤덮여서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둥근 배불뚝이 기둥에는 넝쿨이 타고 올라가는 것까지 섬세하게 계산했다.
지붕의 물결 문양은 바다의 파도를 연상시키든 넘실거렸으며, 과감한 색상 배치는 이전의 신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거면, 승부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감사합니다, 황녀님.”
아몬의 얼굴에는 홍조가 옅게 올랐다.
“이걸로 제출할게.”
“네.”
엘레나는 설계 도면을 소중히 들었다.
공모 마감은 오늘 저녁까지. 결과는 사흘 후에 판가름 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밤이다.
「기가 가장 충만한 보름에 한 번, 가장 줄어든 삭에 한 번, 다시 가장 충만한 보름에 한 번, 총 세 번의 밤을 그 사람과 함께 보내야 합니다.」
‘오늘을 놓치면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해.’ 그러니 오늘 밤은 놓칠 수 없었다.
* * *
그 시각, 칼립소는 크리스가 가져온 옷을 살펴봤다.
화려한 옷으로 지으라고 한 만큼 크리스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옷이었다.
기본 재질은 튜닉이었으나, 이전의 품이 넉넉하고 무색이었던 튜닉과는 완전히 달랐다.
새롭게 들고 온 검은색 튜닉은 양어깨가 딱 맞게 제작되었으며, 폭이 살짝 좁아지면서 허리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검은 실크로 만들어졌으며, 가장자리에는 금색 실로 수놓아져 고급스러워 보였다.
“폐하, 입어보시겠습니까?”
칼립소가 앞으로 오자, 크리스는 직접 옷시중을 들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몸에 잘 맞는 검은색 튜닉은 칼립소의 완벽한 몸매를 잘 살려주었다.
가슴 부분이 드러나면서 상체의 윤곽을 보여주었으며, 소매 끝에 있는 보랏빛 보석과 금실은 그의 위엄을 더욱 배가시켰다.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크리스는 칼립소의 오른쪽 어깨에 보석으로 만든 핀을 고정시켰다. 길게 늘어져 있는 붉은 비단은 황제의 표식이었다.
검붉은 빛깔의 망토는 칼립소의 붉은 눈동자를 더욱 강조해주었다.
“조금 거추장스럽군.”
“금세 익숙해지실 것입니다.”
크리스는 만족한 표정으로 칼립소를 우러러봤다.
기존에도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존재했지만, 지금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멋이 더해졌다.
자신이 만든 옷으로 황제의 위엄이 더 잘 드러나는 것 같아 크리스는 괜히 더 뿌듯했다.
“보기 어떤가?”
“폐하,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그래?”
칼립소는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좀 거추장스럽긴 하지만, 촉감이며 장식도 나쁘진 않았다.
“시녀들을 불러와.”
“네?”
“여인들의 눈이 중요하니.”
뜻밖의 명령에 크리스는 얼른 나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시녀장을 데려왔다.
시녀장은 갑작스러운 황제의 호출에 긴장했다.
크리스가 시녀장을 데려오며 속삭였다.
“폐하께서 새 의상으로 입으셨습니다. 부디 좋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혹여나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이 일어날까 싶어 크리스는 시녀장에게 미리 언질했다.
“전 그저 본 대로 말씀드릴 뿐입니다.”
하지만 꼿꼿한 시녀장은 만만하지 않았다.
육십이 넘어서도 건재하게 자리를 지키는 시녀장은 자신의 자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침실 안에서 칼립소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런 그녀조차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 더 빛난다고나 할까.
시녀장은 마치 환골탈태라도 한 것처럼 빛나는 칼립소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옷이 날개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떤가?”
“폐하,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그래?”
시녀장의 칭찬에 칼립소가 천진한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보였다.
“부족한 점은 없고?”
“한 가지…….”
시녀장이 무언가 말하길 망설이자, 크리스도 덩달아 긴장했다.
“편히 말해봐.”
칼립소가 지시하자, 시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옷은 너무 완벽하신데 머리 손질이 아쉽습니다.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해 완벽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칼립소의 머리는 거친 흑발이었다. 본디 외모에 별 관심도 없기에 칼립소는 머리카락 관리에도 역시 별로 관심 없었다.
흑발의 머리는 어깨선에 맞춰서 거칠게 자르거나 아니면 대충 하나로 묶기 일쑤였다.
“그래?”
“네, 맡겨주십시오.”
“좋다.”
칼립소가 흔쾌히 허락하자, 시녀장이 시녀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잠시 편히 누워계십시오.”
시녀장은 시녀들에게 눈짓을 해서 궁중 이발사를 불렀다. 평소 부름이 없던 황제께서 찾으신다는 말을 듣고 이발사는 긴장을 하며 달려왔다.
“폐하께서 머리 손질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네? 아, 알겠습니다.”
칼립소가 고개를 살짝 돌리자, 이발사는 뻣뻣하게 굳었다.
가뜩이나 멀리서 봐도 위엄이 넘치는 황제였다. 황궁에 이발로 근무한 지 5년이 넘었지만, 황제가 먼저 찾는 일은 없었다.
시녀장이 이발사에게 지시했다.
“머리카락과 수염을 다듬어 주세요. 폐하께서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발사는 칼립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큰 골격과 단단한 근육이 위협적이었다.
‘여기서 잘못 깎는다면 목이 달아나겠지?’
긴장한 이발사에 비해, 칼립소는 비교적 편안했다.
마침 새로 입은 옷도 마음에 들었고, 머리와 수염을 다듬은 후의 엘레나의 반응이 매우 기대됐다.
덕분에 칼립소의 입가에는 보기 드문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그 미소에 용기를 얻은 이발사는 마음을 다잡고 깨끗한 천으로 목 아래를 덮고, 따뜻한 천으론 칼립소의 얼굴을 덮었다.
얼굴이 가려지니 붉은 안광을 보지 않을 수 있어 부담감이 조금 줄었다.
이발사는 재빠른 손길로 준비를 끝냈다.
잠시 후, 칼립소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걷어 낸 이발사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면도를 시작했다.
다행히 칼립소의 눈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이발사는 마치 잠들어 있는 사자의 갈기를 빗는 심정으로 서서히 수염을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칼립소의 눈이 떠졌다.
놀란 나머지 이발사는 하마터면 얼굴을 벨 뻔했다.
“간지러운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스윽 올라가는 눈썹은 이발사의 심장을 내려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계속해.”
칼립소가 말하자, 그 때부터 이발사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여기서 목숨이 달아날 수 있다는 각오로 심혈을 기울여 면도를 끝냈다.
‘휴우.’
면도가 끝나자, 이발사의 등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다 끝났습니다.”
이럴 수가!
잘 다듬어진 수염을 가진 칼립소의 얼굴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이건 변신이나 다름없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는 비슷했지만, 이전에는 해칠 것 같은 맹수 같은 느낌이 주를 이루었다면 지금은 위험하지만 잘생긴 미남이 서 있었다.
모두 놀란 가운데 그 모습을 보던 시녀장만이 홀로 미소를 지었다.
깔끔하게 다듬은 얼굴에서는 어린 시절의 칼립소의 모습이 보였다.
사실, 믿을 수 없게도 어린 시절의 칼립소는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의 귀여운 아이였다.
말을 하지 않으면 여자아이로 착각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에 말랑말랑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머리카락만 다듬으면 완벽할 것 같아요.”
“마저 하지.”
이번엔 시녀장이 직접 나섰다.
칼립소가 다시 의자에 편히 기대자, 시녀장이 직접 칼립소의 거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잘 풀어 헤쳤다.
몇 번에 걸쳐 세심하게 빗고, 아무렇게나 손질된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다듬었다.
거친 흑발은 점차 윤기 있고 매끄럽게 다듬어져 갔다.
잘 손질된 머리에는 금색 실로 장식을 넣어 마무리했다.
“끝났습니다. 폐하.”
칼립소가 기지개를 켜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을 가지고 와.”
“예, 폐하.”
시녀들이 긴 거울을 칼립소 앞으로 가지고 왔다.
꾸미기 위해서 거울을 제대로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제법 공작새 같군.”
칼립소가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댔다.
“이 정도면 봐줄 만하겠지?”
칼립소가 씩 웃자, 주변의 시녀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평소에도 황제를 동경하는 마음이 컸으나, 이제는 흡사 사랑에라도 빠진 표정이었다.
칼립소가 자신들의 황제라는 사실이 진심으로 벅차올랐다.
“로하스관으로 가지.”
오늘 이 난리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 * *
늦은 저녁, 엘레나는 완성된 설계도를 제출하기 위해 미라예스관으로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이느라 마감 시간을 겨우 맞추게 되어 발걸음이 바빴다.
서둘러 들어가는데 공교롭게도 미라예스관에서 막 나오는 요하스 자작과 마주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요하스 자작.”
“여기서 보게 되는군요. 엘레나 님.”
요하스 자작이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계 도안은 완성했나 보군요.”
요하스 자작은 엘레나의 손에 든 설계 도안에 시선을 두었다.
“네, 자작님은요?”
“전, 이미 제출했습니다. 가이아의 건축가들이라 참신한 생각을 기대했는데 별거 없더군요. 결국 기존에 신전 공사를 담당했던 아수르 건축가가 이끌었습니다.”
요하스 자작은 엘레나를 내려다보듯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