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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
“네, 대신녀님.”
“엘레나 황녀님을 언제부터 모시고 있지?”
“네. 열 살 이후부터는 쭉 제가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칼립소 황제가 성안에 방문했을 때도 함께 있었니?”
“네, 대신녀님.”
“그때 황녀님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말해보렴.”
“그……게, 마마님은 언제나처럼 침착하셨습니다. 연회에는 제가 시중을 들어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셨고…….”
대신녀는 지루한 기색을 감추며, 이자벨의 말에 하나하나 귀를 기울였다.
스쳐 지나가는 말에 중요한 단서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자벨은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그때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황궁 안으로 케이타 제국의 군대가 공격했을 때, 황녀 전하께선 지하감옥에 계셨습니다.”
“지하감옥?”
“네, 케이타 제국의 황제가 고문당한 곳이요.”
“아…….”
“그곳에서 탈출하려는데 황녀 전하께서 유난히 힘이 없어 하셨어요.”
“힘이 없으시다니?”
“원래 그러신 분이 아니잖아요. 같이 싸우면 싸우셨지. 그런데 그날따라 금방 휘청거리시고, 무엇보다…….”
“뭐지?”
“손가락에 피가 흘렀어요. 평소라면 금방 나으셨을 텐데 쉽게 멈추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피가?”
대신녀의 눈이 빛났다.
“황녀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그것도 손가락에?”
“네, 대신녀님. 마치 이빨로 깨문 것 같은 상처였어요.”
“확실한 거냐?”
엘리자베스가 무섭게 추궁했다.
“황후 폐하, 제가 대신녀님 앞에서 거짓을 아뢸 리가 있겠습니까? 피가 멈추지 않아 제가 지혈해 드렸는걸요. 그리고 나서 정신을 잃으셨어요.”
“아…….”
엘리자베스는 머리를 감쌌다.
‘그토록 피를 나눠주지 말라고 했었는데…….’
대신녀는 이제야 뭔가 실마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언약의 피!’
피가 잘못 흘러간 것이다.
“이자벨, 고생했다. 가보렴.”
“네, 대신녀님.”
“참, 방금 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니?”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앞으로도 절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면 안 돼.”
무서운 어조에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녀님.”
“그럼, 가봐라.”
이자벨이 나간 후, 엘리자베스는 걱정스럽게 대신녀를 돌아봤다.
“대신녀님, 이번 일로 엘레나에게 안 좋은 일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돌이킬 방법이 있을 겁니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아마, 황녀님께서 피를 나눠주신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파래졌다.
“그럼…… 어떻게 되나요?”
“돌이켜야죠. 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대신녀님. 꼭 찾아주세요.”
엘리자베스는 대신녀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
“일어나세요. 마음을 굳건히 잡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황후 폐하께서도 각별히 주의해주셔야 합니다. 행여 소문이라도 나면 안 되니 아까 나간 이자벨의 언행도 잘 살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대신녀님.”
대신녀는 엘리자베스를 달래고 서둘러 신전으로 돌아갔다.
언약의 피가 잘못 흘러갔다. 반려자에 갈 언약의 피가 검은 구름에게 흘러가다니. 그래서 검은 구름의 기운이 더 세진 것이다.
보름이 되어도 빛을 발하지 못하다니. 검은 구름의 방해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무슨 수를 써도 능력을 다시 찾아와야 했다.
대신녀는 고문서를 뒤지기 위해 신전 도서관으로 향했다.
분명, 되찾을 방법이 있을 것이다.
* * *
르엘이 떠난 후, 캐서린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캐서린은 남자를 사귄 적이 없었다.
그녀가 살던 시골 마을은 워낙 보수적인 동네라서 어느 집에 그릇이 몇 개인지도 다 아는 곳이었다.
여자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했기에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남자와의 접촉이 드물었다.
그런 캐서린에게 르엘은 새롭게 다가왔다.
「괜찮으시다면, 종종 들러도 되겠습니까?」
캐서린이 르엘의 생각을 하며 볼을 붉히고 있을 때, 배 속에서 뜨거운 통증이 왔다. 이제야 거의 괜찮아진 참이었다.
“어……?”
캐서린은 타는 듯한 통증에 허리를 숙였다.
‘캐서린, 황녀님을 모시고 오렴.’
대신녀의 전언이 머릿속에 울렸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그냥 찾아올 수 있는 건가.’
캐서린은 감시를 당하는 듯한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전언을 들은 이상 빨리 알려야 했다.
캐서린은 시종을 통해 로하스관에 전언을 전달했다.
저녁 무렵, 엘레나가 카트리전에 도착하자, 캐서린은 사색이 된 채, 방 한쪽에 웅크리고 있었다.
“캐서린. 괜찮아?”
“황녀님, 어…서 빨리요.”
엘레나는 다급히 캐서린에게 다가갔다.
캐서린이 손을 펼치자, 이전처럼 거울이 보이더니 대신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대신녀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황녀님. 그때 물어보신 질문에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정말이에요?”
엘레나가 반색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걸렸던 문제였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혹시, 피를 나눠준 적이 있습니까?
“그건 왜 물으시나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있습니다.”
-누구한테 나눠 주셨습니까?
엘레나는 망설였다. 칼립소에게 치유의 피를 나눠 준 일은 비밀이었다.
“전쟁 중에 상처를 입은 자를 도운 일이 있습니다.”
-그자가 케이타 제국의 황제입니까?
대신녀의 말에 엘레나는 깜짝 놀랐다.
“……네, 그렇습니다.”
대신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이번 일과 연관이 있습니까?”
-역시 그랬군요. 일이, 공교롭게 되었습니다.
“왜죠?”
-황녀님께서 피를 나눠주면서 치유력도 함께 흘러간 듯합니다.
“뭐라고요?”
-아마, 이대로 두면 그자에게 능력이 나타날 겁니다. 그럼, 지금보다 더 강해지겠지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엘레나는 매우 놀랐다.
자신의 행동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되찾아오는 방법은요?”
-…….
대신녀는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분과 가장 가까워지는 방법으로 다시 가져와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쉽게는 접촉이 있겠고……. 하지만 그건 한계가 있습니다.
“아…….”
엘레나는 칼립소와 입을 맞췄던 때를 떠올렸다. 그날 이후 상처가 낫는 속도가 빨라졌던 것도.
-외람되지만, 혹시 두 분이 같이 밤을 보낸 일이 있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문제가 된다기보다…….
대신녀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다 말을 이었다.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뭐라고요?”
엘레나는 놀라 되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자세히 얘기 해주세요.”
-능력을 되찾아오려면 정기를 가져와야 합니다.
대신녀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황녀님의 기가 가장 충만한 보름에 한 번, 가장 줄어든 삭에 한 번, 다시 가장 충만한 보름에 한 번, 총 세 번의 밤을 그 사람과 함께 보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세 번의 밤을 보내면 황녀님께서 다시 능력을 온전히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는 절대 함께 밤을 보내면 안 됩니다.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 번의 밤이라니.
“읏…….”
캐서린의 비명이 엘레나의 귀에 파고들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이만, 끊어야겠어요.”
-하나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죠?”
-밤을 보내기 전에는 꼭 주피터 열매를 드셔야 합니다. 그래야, 후사가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밤을 보내기 전 꼭 세 알을 미리 드십시오.
“알겠어요.”
이야기가 길어지는 동안 캐서린의 비명이 더 심해졌다.
“이만, 끊을게요.”
희미해진 거울에서 엘레나는 자신의 손을 뗐다.
곧이어 거울은 사라졌다.
“괜찮아요?”
“…….”
캐서린은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매번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한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자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방금만 하더라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신녀가 연락을 시도한 것이니 말이다.
멍해 있는 캐서린의 눈에 엘레나의 시선이 비쳤다.
황녀님 역시 충격을 받은 상태로 보였다.
‘아까 대신녀님이 무슨 말을 했었지?’
고통 속이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밤, 치유력…….’ 어쩌고 한 것 같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엘레나였다.
“캐서린, 괜찮아요?”
캐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의 경험으로 보아 침대 속에서 며칠 웅크리며 고통을 감내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네, 황녀님.”
“고생이 많아요. 나중에 가이아 제국에 돌아가면 잊지 않을게요.”
아직 고통이 온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나 캐서린은 가슴이 벅찼다.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
캐서린은 열광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니 마음껏 사용하세요.”
엘레나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캐서린의 손을 잡았다.
“그럼, 푹 쉬어요. 보약을 보내라고 할 테니 몸 관리 잘하고요.”
“네, 황녀님. 감사합니다.”
엘레나는 캐서린을 다독거린 후, 로하스 관으로 돌아갔다.
* * *
로하스 관으로 돌아간 엘레나는 심란했다.
‘칼립소와 밤을 보내라니…….’
대신녀가 한 뜻밖의 말에 마음이 번잡스러웠다.
「그 사람과 가장 가까워지는 방법으로 다시 가져와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돌 수레에 다쳤을 때에도, 상처가 갑자기 나은 것은 칼립소와 만난 후였다.
그와 키스할 때, 혈관이 팔딱 뛰는 생생한 느낌이 들었고, 그 이후에 상처는 빠르게 나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요하스 자작의 집에서 받았던 상처 역시 그와 함께 입맞춤을 하고 나서 급격하게 빨리 치유됐다.
‘정말로 칼립소가 내 치유력을 가져간 걸까? 그럼, 칼립소에게 치유력이 나타나야 하잖아?’
말도 안 돼.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까지 잠잠할 리가 없다.
어쨌든 중요한 건 치유력을 되찾는 일이다.
‘세 번의 밤을 보내면, 능력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