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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토를 벗은 칼립소의 몸에는 튜닉만 남았다.
넉넉한 품의 튜닉은 오직 활동성만 중시한 투박한 형태였다.
중간에 허리띠만 단출하게 묶은 옷은 별다른 장식이 없었다.
허리띠조차도 밋밋한 가죽끈이었으며, 튜닉은 부드러운 면 소재에 흔한 자수조차도 없었다.
워낙 칼립소 자체가 풍기는 위압감이 대단해서 그렇지 의복 자체는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검은 망토가 약간 화려했기에 황제의 격을 나타내 줄 뿐이었다.
“튜닉도 벗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칼립소는 거친 동작으로 한 번에 튜닉을 벗었다.
그는 원체 몸에 열이 많아 평소 속옷을 간단히만 챙겨 입기에 맨 등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말 넓구나.’
이런 몸을 가지려면 얼마나 운동을 해야 할까. 크리스는 자신의 얄쌍한 팔을 불쌍한 듯 바라봤다.
태어날 때부터 체질이 다른 거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크리스는 감탄해 마지않으며 어깨와 쭉 뻗은 등에 줄자를 대어 치수를 쟀다.
완벽한 골격에 신이 정성 들여 새겨넣은 것처럼 발달된 근육이 흡사 예술품을 연상시켰다.
절대적 균형의 몸.
떡 벌어진 어깨 사이로 이어진 근육들과 두툼한 몸통을 이은 선이 남자인 자신도 반할 만큼 탐스러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등은 물론 앞까지 한 점의 흠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보기 좋은 모양새로 복근이 보였다.
잘 가꿔진 몸을 보니, 여러 가지 디자인이 번뜩이며 상상됐다.
크리스는 하반신으로 시선을 내렸다.
탄탄한 허벅지는 굵은 고목 나무를 연상시킬 정도로 둘레가 넓었다.
게다가 그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물건은 늘 따로 주머니를 만들어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마치 세 번째 다리 같다고나 할까?
크리스는 정신을 차리고 허벅지로부터 종아리까지 굵고 곧게 뻗은 다리를 모두 쟀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알 수 없었다.
크리스는 모든 치수를 꼼꼼하게 기록한 후에야 뒤로 물러났다.
“이제 됐나?”
“네, 폐하.”
칼립소는 휙 하고 튜닉을 뒤집어 썼다.
잘 가꿔진 몸을 고작 저런 천으로 가리다니.
크리스는 마치 자신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예산 아끼지 말고, 맘껏 짓도록 해. 종류별로 골고루.”
“알겠습니다, 폐하.”
크리스는 기록한 치수를 살피며 신난 얼굴로 말했다.
“시간은 얼마나 필요하지?”
“한 달은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오래?”
칼립소의 눈썹이 홱 치켜 올려졌다.
새 단장한 모습으로 엘레나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한 달이라니.
너무 길었다.
“그럼, 일주일 정도 말미를 주시면 한 벌 정도 미리 선보일 수 있을 것 습니다.”
“사흘.”
확연히 낮아진 어조에 크리스가 납작 엎드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도록.”
“네, 폐하.”
크리스는 당장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 * *
캐서린은 그날 밤 대신녀와 엘레나를 만나게 해 준 이후, 앓아누워야 했다.
자신의 몸이 통로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로 했다.
엘레나가 간 후에 열이 끓더니, 지금은 겨우 열이 내렸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내내 침대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의원이 한 번 왔다 갔으나, 특별한 치료가 필요가 필요하지는 않다며 쉬라고 한 후, 곧 돌아갔다.
그렇게 침대에서 요양을 취하고 있는 캐서린을 방문한 사람은 뜻밖에, 사절단으로 가이아에 방문했던 르엘이었다.
“좀 괜찮으십니까?”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창백한 얼굴로 일어난 캐서린이 황급히 르엘을 맞았다.
“그냥 누워 계세요. 몸이 안 좋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약을 좀 챙겨왔습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요.”
캐서린은 괜히 얼굴에 열기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잘생긴 사내가 자신을 걱정하니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걱정이 돼서 그렇습니다.”
은근히 살펴보는 시선에 캐서린은 눈을 피했다.
“괜찮으신 거죠? 몸도 약하신 거 같은데.”
“정말 괜찮습니다.”
“혹여나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배려해 주신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인 캐서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아무 대꾸가 없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견디다 못한 캐서린이 시선을 들자, 르엘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왜……?”
“이제야 저를 봐주시네요.”
캐서린은 볼이 화끈댔다.
“아, 신녀님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은 불경한 겁니까?”
“아니에요. 꼭 그런 건.”
“다행이네요.”
르엘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몸도 불편하신 것 같은데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네.”
돌아간다는 그의 말에 캐서린의 눈이 방황했다.
“저기, 혹시…….”
“네?”
“괜찮으시다면, 종종 들러도 되겠습니까?”
르엘이 설핏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불편한 점도 살펴드리고, 혹시나 외로우시면 말동무도 해드리고요.”
“……그게……. 바쁘신데 폐가 될 거 같은데요.”
“폐라니요? 허락만 해 주시면 영광이지요.”
“아…… 알겠어요.”
캐서린의 답에 르엘이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신녀님.”
르엘이 나가고 캐서린은 한참을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편 카트리전을 나간 르엘의 표정은 무심하게 돌아갔다.
「가이아의 신녀와 잘 지내 놔.」
자신을 가이아로 보낼 때 형인 데릭이 한 말이었다.
데릭이 엘레나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번 가이아의 신녀가 오게 되면서 더욱 신경을 쓰는 것도.
르엘은 캐서린의 순수한 눈동자를 떠올리자, 살짝 죄책감이 밀려왔다.
‘신녀라서 그런가.’
마음이 맑아서 그런지 스며드는 것도 빨랐다.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줬을 뿐인데, 벌써부터 마음이 열리는 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순진하다니까.’
르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대신녀는 엘레나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고심에 빠졌다.
‘치유력이 사라지셨다니…….’
소식을 들었을 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치유력은 가이아 황녀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제국의 발전을 위한 위대한 영성이었다.
대신녀는 황급히 신전의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고문서부터 샅샅이 훑으며 능력의 상실에 관해 파악했다.
본디 치유력은 없어지는 능력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이동했을 가능성이 컸다.
‘누구한테 갔다는 거지?’
갑자기 아무런 까닭 없이 이동했을 리가 없다.
누군가에게 빼앗겼다면 모를까.
대신녀는 신탁의 계시를 다시 살펴봤다.
「가장 밝은 달로 태어나 붉은 태양을 만나 제국의 번영을 이룰 것이니.
검은 구름의 방해를 이기고 언약의 피를 나눌 반려를 맞아,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리.」
‘불길해.’ 검은 구름의 방해가 끝난 게 아니었나.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대신녀의 머리에 번뜩였다.
전쟁이 끝난 것으로 ‘검은 구름’의 방해는 모두 끝난 줄 알았다.
이제 엘레나를 구출해 오고 안토니안과 제대로 혼인을 올리면 검은 구름에도 굴하지 않는 위대한 제국이 건설될 수 있다고 믿었다.
‘끝이 아니었어.’
대신녀는 신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신궁으로 들어갔다.
신궁 안에는 대신녀만이 확인할 수 있는 별자리가 보였다.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별의 상태도 축복받은 대신녀의 눈으로는 볼 수 있었다.
엘레나의 별은 얼마 전 엘리자베스가 찾아왔을 때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기에 엘리자베스에게도 엘레나가 무사히 있다고 알려준 것이다.
이제 점점 보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별과 달리 엘레나의 별은 달이 밝을수록 그 빛을 받아 더욱 빛났다.
지금도 보름이 다가오니 곧 가장 밝게 빛을 발할 것이다.
대신녀는 신궁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기를 모은 후에, 신궁을 통해 엘레나의 별을 확인했다.
‘이런.’
그때도 있었는가. 아니면 보름이라서 새롭게 보이는 것일까.
검은 구름이 다시 그녀의 별을 감싸고 있었다.
덕분에 보름의 기를 받지 못해 별의 빛이 바래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혹시 검은 구름이 엘레나의 능력을 뺏어간 것이 아닐까.
불길한 예감에 대신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다면, 가이아가 위대한 제국이 되는 길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되찾아야 해.’
대신녀는 다시 도서관으로 갔다.
능력이 이동되었으면 다시 찾아오는 방법도 분명히 있을 터. 대신녀는 밤새도록 서고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 * *
다음 날, 대신녀는 아침 일찍 황궁으로 갔다.
“대신녀님. 어쩐 일입니까?”
대신녀가 황궁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자베스가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황후 폐하. 급한 일이 있어서 서둘러 왔습니다.”
밤을 새운 대신녀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상황의 심각함을 느낀 엘리자베스는 대신녀를 은밀한 곳에 숨겨진 회의실로 안내했다.
“이곳에는 제 허락 없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안심하고 말씀하세요.”
“전쟁이 일어났을 때, 황녀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야겠습니다.”
“그건, 대신녀님도 아실 텐데요.”
드하야 즙 사건을 모르는 가이아인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엘레나가 케이타 제국으로 끌려가게 되지 않았는가.
“자세한 사건의 전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을 안토니안의 행방이 묘연해서요.”
“황녀님의 시녀가 있지 않습니까?”
“이자벨 말입니까?”
“네,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시종을 통해 이자벨을 불렀다.
기다리는 동안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대신녀님, 엘레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안심하세요. 얼마 전 케이타 제국으로 보낸 신녀를 통해 엘레나 황녀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요? 엘레나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황후 폐하. 말씀드린 대로 엘레나 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다. 다만…….”
“다만 무엇이죠?”
“무언가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똑똑.
대신녀의 부름을 받은 이자벨이 떨리는 표정으로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