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47화 (4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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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렇대?”

칼립소가 펄쩍 뛰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흐음.”

칼립소는 자리에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꾸 짐승처럼 그 생각만 하는 자신이 영 마뜩잖았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이런 적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잘 진행이 안 되나 봐.”

바로스가 빙글거리며 칼립소를 살폈다.

여자 보기를 돌처럼 하더니, 막 연애를 시작한 친구의 모습이 반가웠다. 그때 자신이 조언해주었더니, 바로 로하스관으로 옮겨주지 않았는가.

그 소식을 듣고 바로스 자신도 꽤 놀랐다.

원래 늦바람이 무섭다고, 칼립소가 꽤 순정파가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생각 이상이었다.

“로하스관으로 옮겨줬는데도 변화가 별로 없나?”

“그건 아니야.”

“그래?”

“확실히 달라졌어.”

바로스 왕자의 조언은 꽤 도움이 됐다.

로하스관으로 옮긴 후에 엘레나의 태도는 바뀌었으니.

그렇기에 칼립소는 지금도 은근히 바로스 왕자의 조언을 바랐다.

“그런데 뭐가 문제야?”

“너무 느려.”

“아.”

바로스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얼마나.”

칼립소는 못 마땅하다는 듯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럼,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까?”

“빨리 말해.”

“오랜 친우로서 알려주는 거야.”

칼립소는 뜸 들이는 바로스 왕자를 노려봤다.

“알았어. 알았어.”

바로스 왕자는 칼립소의 그 솔직한 반응에 기꺼워하며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이건 뭐야?”

“빠르게 가까워지고 싶다며. 우리 왕국 마법사들이 특별히 만든 거야. ‘로즈’라고 불리지. 여인의 마음을 말랑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지.”

“음……. 이게 자네의 비법이야?”

“나야, 별 필요가 없지. 하지만 간간히 쓰기도 해. 서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거든. 여인을 달아오르게 하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어. 아마 자네에겐 꼭 필요해 보이는데?”

칼립소는 붉은빛 약병을 바라봤다.

“와인에 살짝 넣어봐. 그럼 그 이후는 술술 진행될 테니. 이거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니야. 일 년에 한 병씩만 생산하는 귀한 거라고. 아무리 얼음장 같은 여인도 이 로즈 한 병이면 스스로 달려들 테니. 남자를 간절히 원하는 몸으로 만들어 주거든.”

“줘 봐.”

칼립소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바로스 왕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붉은 약병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이후 칼립소의 행동은 뜻밖이었다.

붉은 약병을 던져서 부수어버린 것이었다.

쨍그랑.

벽에 부딪힌 병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얼마짜리인데…….”

바닥에 흩어진 깨어진 유리 조각을 보며 바로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약병은 깨졌고, 카페트 사이로 붉은빛 로즈가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아까운 것을…….”

“바로스, 당장 자네를 추방하지 않은 건, 지난 조언이 꽤 쓸만했기 때문이야.”

“뭐야?”

“감히 약으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려 들어?”

칼립소는 무시무시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이 직접 드하야 즙으로 당했다.

온전한 정신이 아닌 채 무기력하게 다른 이에게 조종당하는 것이 얼마나 거지 같은 일인지 몸소 느꼈다.

그런 자신에게 이런 것 따위를 권하다니!

“이 땅에서 이런 약물을 쓰다간 대가를 각오해야 할 거야.”

“칼립소, 난 자네를 도우려고 한 거야.”

이런 식이라면, 바로스의 도움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강압적으로 그녀를 얻으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가능했을 테니.

“꺼져.”

칼처럼 자르는 칼립소의 말에 바로스는 뒷걸음질 쳤다.

이런 때의 칼립소는 건드리면 위험했다.

“자……, 잠깐만.”

“왜?”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제대로 된 도움이라면.”

“그러니까. 다른 조언을 해줄게.”

바로스는 조심스럽게 다시 칼립소의 앞에 왔다.

칼립소는 적으로 두기엔 너무 위험한 남자였다. 쫓겨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만회를 해야 했다.

“어필을, 좀 해봐.”

“어필은 이미 차고 넘치게 했어.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하라고.”

“그런 거 말고.”

“그럼?”

“남성적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쪽으로. 은근하게 말이야.”

“무슨 소리야?”

“원래 짝짓기 기간에는 수컷이 유혹해야 하는 법이야. 공작새 알지? 화려하게 깃털을 펴는 쪽은 바로 수컷이야. 수컷 공작새가 긴 꼬리털을 활짝 펴고 암컷 주위를 빙빙 돌지. 꼬리를 흔들어대기도 하고. 암컷의 관심을 최대한 끄는 거지.”

“나더러 아양이라도 떨라는 거야?”

“원한다며.”

바로스가 급하게 말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잖아. 전투라고 생각하면 말이야.”

딴은, 그랬다.

바로스의 말에 칼립소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그럼, 난 간다.”

칼립소가 화를 누그러뜨리고 생각에 잠기는 것을 본 바로스는 때를 놓칠까 싶어 황급히 빠져나갔다.

바로스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칼립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립소가 연회장을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데릭이 따라왔다.

“폐하, 손에서 피가 납니다.”

“신경 쓰지 마.”

아까 약병을 깨지면서 긁힌 모양이었다.

“베르나르를 부르겠습니다.”

“됐대도.”

“폐하.”

“그냥 스친 것뿐이야.”

칼립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하지만 침실에 들어가자, 언제 불렀는지 베르나르 의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데릭.”

“유리에 베인 것은 그대로 방치하면 병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쟁터가 아닙니다. 폐하의 건강에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귀찮게 구는군.”

칼립소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밀었다.

이모저모 칼립소의 손을 살피던 베르나르가 이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 상처가 있었던 것이 맞습니까?”

베르나르가 깨끗한 물로 상처 부위를 닦아내자, 손은 조금의 흉도 없이 멀쩡했다.

칼립소는 손을 내려봤다.

아까 분명 손가락에 스친 상처를 보았는데, 지금은 깨끗했다. 베인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칼립소는 고개를 갸웃했다.

‘로즈 약의 빛깔과 착각했나?’

데릭 역시 믿기 어려운 듯 칼립소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아까 분명 베인 자국을 본 것 같았다.

데릭은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거봐.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 약병에 들어 있던 액체가 붉은색이야.”

“아, 죄송합니다. 폐하.”

데릭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됐어. 데릭.”

칼립소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착각한 거겠지.’

칼립소는 크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좀 더 중요한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 * *

다음 날, 칼립소는 서둘러 의상장을 불렀다.

아침 일찍 칼립소 앞에 불려온 의상장 크리스는 심각한 그의 표정을 보고 달달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크리스.”

제 이름을 듣고 크리스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칼립소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동안 황제의 의복을 담당했지만, 존재감 없이 궁궐에서 일했다.

칼립소가 원하는 의복은 간단했다. 활동하기에 편한 옷이면 뭐든 괜찮았다.

옷의 재질도, 화려한 색이나 무늬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거추장스럽다고, 구박이나 받기 일쑤였다.

하나의 디자인으로 입기 편한 옷만 지어 드리자니, 의상장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절대권력의 칼립소 앞에서는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크리스는 자신이 지은 옷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번과 똑같은 옷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자신을 직접 찾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

“네, 폐하. 하명하시옵소서.”

“자네를 부른 이유는, 새 옷을 짓기 위함이야.”

크리스는 펄쩍 뛸 만큼 놀랐다.

새 옷이라니!

그렇게 간청드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황제의 입에서 새 옷을 짓는다고 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떤 옷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크리스는 애써 흥분을 억누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칼립소의 대답에 크리스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옷 말이야.”

“화…… 화려한 옷 말씀이십니까?”

“그래.”

칼립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식도 좀 많을수록 좋을 것 같고. 무엇보다 매력을 좀 어필해야 할 것 같다고나 할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무슨 행사 때 입을 옷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행사?”

칼립소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건 없는데?”

“행사 때 입으실 옷은 아니십니까?”

“아니. 그냥 평상복으로.”

“아, 네.”

평상복으로 화려한 옷을 지으라고?

크리스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좀 더 필요할 것 같군. 연회용, 행사용 다 필요해.”

칼립소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번 기회에 많이 짓도록 하지.”

“아? 네.”

크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부린 변덕의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의상장으로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시일은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되도록이면 빨리.”

머릿속에 품고만 있었던 다양한 디자인들이 춤을 추었다.

황제는 훌륭한 모델이었다.

옷 짓는 사람으로서 입히고 싶은 디자인이 많았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못 들었어? 바로 당장.”

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실천하는 칼립소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치수부터 다시 재겠습니다.”

“치수?”

“옷을 짓는데 치수는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칼립소는 영 틈을 주지 않았다.

더구나 전쟁터에 살다시피 하는 황제에게 치수를 재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덕분에 어림짐작이나, 그나마 체격이 비슷한 헥토르를 불러와서 치수를 더하곤 했었다.

“그래? 그러지 뭐.”

칼립소는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리스는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까 싶어 날쌔게 줄자를 가져왔다.

“시작하지.”

“여기서요?”

“왜?”

“아무래도 침실로 들어가서 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굳이 그래야 하나?”

“그게 더 편하실 겁니다.”

“귀찮군.”

칼립소가 걸어가자, 크리스는 빠르게 뒤를 따랐다.

황제의 침실에는 크리스도 처음 들어와 봤다. 마음같아서는 샅샅이 둘러보고 싶었으나, 크리스는 호기심을 억누르고 바닥만 내려봤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크리스는 칼립소 앞에 섰다.

“혹시 망토를 벗어주실 수 있습니까?”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

말이 끝나자마자 칼립소의 몸에서 망토가 벗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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