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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는 칼립소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댔다가 물러났다.
붉은 눈동자가 확연히 흔들리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봐준 거예요.”
칼립소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저히, 못 참겠네.”
칼립소의 얼굴이 살짝 올라오면서 시선이 마주쳤다.
옅게 홍조가 어린 그의 얼굴이 보인다 싶더니, 점점 다가왔다.
칼립소는 잠시 숨을 멈추고 엘레나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그것을 보며 엘레나는 어쩐지 긴장이 돼서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칼립소의 손이 올라갔다.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당기자, 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기 직전. 칼립소가 동작을 멈췄다.
“이건, 봐준 값.”
툭.
장난스럽게 이마가 부딪히며, 갑자기 입술이 깊게 겹쳐졌다.
뜨거운 혀가 입술 사이로 밀려 들어왔다. 부드러웠던 키스는 순식간에 거친 물살을 탔다.
목덜미를 부드럽게 잡던 손에는 거친 힘이 들어갔고, 혀가 얽히는 동안 온몸에 스멀스멀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엘레나는 어느새 손을 꼭 쥐었다.
허리가 움찔대고, 숨소리가 가빠졌다.
몸에 열이 가득 차오르는 순간, 칼립소가 떨어졌다.
붉은 눈동자가 엘레나의 흐트러진 얼굴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그러더니 엘레나를 훌쩍 들어 올렸다.
갑자기 바뀐 자세에 허둥대던 엘레나는 칼립소의 허벅지를 잡았다.
“으…….”
순간 칼립소에게 기묘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툭 불거져 나온 곳이 다른 곳과는 달랐다.
“거긴, 잡지 말고.”
당황한 엘레나가 화들짝 일어나려 하자, 칼립소가 다시 그녀를 끌어당겼다.
“후우.”
아직 해결되지 못한 열기가 칼립소를 괴롭혔다.
“너무 자극하지 마.”
칼립소는 욕망에 흐려진 눈빛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원하고 원한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다시 얽혔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 농밀한 키스였다.
아니, 야만적이기까지 했다.
혓바닥이 온통 입 안을 쓸고, 쭉쭉 빨아대기 시작했다. 손은 허리에서 위로 농밀하게 왔다 갔다 했다.
칼립소는 간신히 입술을 뗐다.
‘왜……?’
원망스럽게 보는 엘레나를 보며 칼립소가 씩 웃었다.
“엘레나, 여기서 끝까지 갈 수는 없잖아.”
그제야 정신 차린 엘레나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갈랐다.
“그럼.”
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하라는 듯, 칼립소가 엘레나에게 손짓을 했다.
“로하스관으로 돌아갈래요.”
“그보다 한 번 더 내기하지 않겠소? 이번에도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으로.”
“사양할게요.”
일각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한 엘레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칼의 앞으로 갔다.
“잠깐만.”
칼립소가 앉은 채로 말했다.
“조금만 있다가.”
뭔가 참는 듯, 미간을 찌푸린 칼립소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참,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소.”
“뭔데요?”
“가이아에서 신녀가 오거든.”
“정말요?”
환하게 웃는 엘레나를 보며 칼립소는 마음이 벅차올랐다.
역시 신녀를 데려오길 잘했다.
칼립소는 그녀의 웃음 한 번에 신녀를 데려온 것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겨우 가라앉은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해갈되지 못한 갈증은 여전히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그녀도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칼립소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겨우 진정시켰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래의 열기가 식지 않는 통에 곤란한 지경이다.
엘레나 역시 홍조 띤 얼굴로 반짝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엘레나 역시 기분이 좋으니.’
갈등하던 칼립소는 먼저 욕망에 굴복하기로 했다.
그녀에게 다가서기 위해 일어서려는 순간,
“신녀를 만나고 싶어요. 가요.”
아무런 아쉬움 없이 엘레나가 먼저 칼을 탔다.
“뭐 해요?”
“어?”
칼립소가 미련이 뚝뚝 흐르는 눈으로 엘레나를 봤다.
“빨리 따라와요.”
“휴우.”
칼립소는 고개를 저으며, 그런 엘레나의 뒤를 따라갔다.
* * *
그 날 저녁, 엘레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카트리전을 방문했다.
‘누가 왔을까.’
어릴 때부터 신전을 드나들던 엘레나는 신녀들 대부분을 알았다.
대신녀가 올 리는 없지만, 그래도 영성술을 할 줄 아는 신녀가 온다면 좋을 것 같았다.
아니면 대신녀의 전갈이라도 가져오지 않았을까.
카트리전은 국빈들이 왔을 때, 머무는 곳으로 아직 적당한 신전이 마련되지 않아 신녀가 임시로 묵는 처소라 했다. 케이타 제국에서 신녀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사실 캐서린은 케이타 제국의 환대에 당황할 정도였다.
처음 이곳에 올 때까지의 강행군이 고생의 끝이었다.
아니, 그 정도는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물론 처음 카트리전에 당도했을 때는 수치스러운 일도 있었다.
가이아에서 온 짐들은 철저하게 조사당했으며, 자신은 몸수색까지 당했다.
하지만 수색이 끝나자, 환대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
시종과 시녀도 따로 배치되었으며, 머무는 숙소는 가이아 제국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그리고 도착한 당일인 오늘, 드디어 엘레나 황녀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황녀님.”
캐서린은 처소에 찾아온 엘레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세요. 신녀님.”
엘레나는 캐서린을 보고 살짝 실망했다.
대신녀까지는 아니더라도 내심 자신이 아는 신녀가 오길 바랐던 것이다. 특히, 대신녀의 뒤를 이을 거라는 에이미가 오길 바랐다.
에이미가 왔다면 영성술을 통해, 대신녀와 연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캐서린이라고 합니다. 신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황녀님을 직접 뵐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랬군요.”
엘레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 여기 생활은 어떠신지요?”
“생각보다 편안하게 지내고 있어요.”
캐서린의 걱정 어린 말에 엘레나는 담담히 답했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런 엘레나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캐서린이 작게 속삭였다.
“황녀님, 이리 따라오시죠.”
엘레나는 캐서린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캐서린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대신녀님이 황녀님과 소통 창구를 마련하셨습니다.”
엘레나는 그 말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역시 아무 방비 없이 대신녀가 캐서린을 보냈을 리 없었다.
“그게 뭐죠?”
매개체를 찾기 위해 엘레나가 사방을 살폈다.
“바로 저입니다.”
“뭐라고요?”
“제가 바로 소통 창구입니다.”
사람이 소통 창구라니. 언뜻 이해하기 힘든 대답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캐서린은 단전에 손을 대고, 배 속에 있는 구슬의 진동을 느꼈다. 집중하고 기를 모으자, 오른손이 점점 뜨거워졌다.
그러자 오른손 위로 거울 같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새로운 영성술이군요.”
“네, 이제 여기로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캐서린은 힘든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막 띄웠는데 벌써부터 온몸이 떨리면서 전신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대신녀님과 대화를 나, 누세요.”
엘레나는 고통을 참는 캐서린의 표정이 신경 쓰였으나, 그보다 대신녀와의 대화가 급했다.
“대신녀님?”
-황녀님?
거울을 통해 엘레나는 대신녀를 볼 수 있었다.
“대신녀님.”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황녀님.
“네.”
-별 탈 없이 지내십니까?
“네, 저는 잘 있습니다.”
-우선 너무 걱정 마시고 그곳에서 최대한 버티세요. 앞으로 캐서린을 통해 황녀님이 가이아 제국으로 돌아오실 방안을 전달하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왜 그러시죠?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고통을 감내하는 캐서린의 표정을 보니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제 치유력이 사라지고 있어요.”
-네?
대신녀가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언제부터요?
“이번에 케이타 제국으로 와서부터 현저히 능력이 떨어지고 있어요.”
그 때, 캐서린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거울이 흐릿해지며 대신녀의 얼굴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알아보겠습니다. 일단 기다리세요.
“네.”
그걸 마지막으로 거울은 사라졌다.
“캐서린, 괜찮아요?”
“네, 황녀님.”
캐서린은 뜨거운 손을 만졌다.
화끈거리는 느낌이 고통스러웠다.
“미안해요. 이런 일을 하게 해서.”
엘레나가 캐서린의 손을 잡았다.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아니에요. 황녀님. 제 일인 걸요.”
“그래도 꽤 고통스러워 보이던데…….”
엘레나는 자신 때문에 캐서린이 고통을 겪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괘념치 마세요.”
캐서린은 애써 웃어 보였다.
자신의 몸이 도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황녀에게 인정을 받으면, 앞으로 대신녀가 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조만간 대신녀님에게 연락이 올 수도 있어요.”
“네, 그럼, 그때 연락드릴게요.”
“피곤할 테니 좀 쉬어요.”
“네.”
소통 창구 역할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에너지를 요구했다.
엘레나가 떠난 후, 캐서린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 * *
술잔을 앞에 둔 칼립소는 미간을 찌푸렸다.
엘레나를 그렇게 보내고 칼립소는 영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낮부터 자극받은 욕망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다고 밤에 다짜고짜 찾아가기도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리드하겠다고는 했으나, 연애 경험이 전무한 칼립소는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칼립소는 다시 한번 바로스를 불렀다.
“칼립소.”
“왜, 이제야 와?”
“내가 뭐 그렇게 한가한 줄 아나?”
“성안의 여인들과 죄다 데이트를 한다는 소문만 들리던데.”
“공평해야지. 단, 나는 한 번에 한 여자만 공략하지.”
칼립소는 바로스 왕자의 얼굴을 찬찬히 봤다.
어째서인지 미끈한 인상의 저 얼굴을 여자들은 꽤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하, 딱 보니까 욕구 불만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