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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하게 결정을 내린 엘레나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좋다고. 아몬, 우리 이걸로 승부를 내보자.”
“정말……이신가요?”
“물론이지. 어떻게 이렇게 멋진 생각을 다 했어?”
엘레나의 좋아하는 표정을 보면서 아몬의 심장 역시 쿵쿵 뛰었다.
그동안 귀족들의 일을 받아오면서 아몬은 한 번도 제대로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
마음에 들면 마음에 드는 대로 귀족들은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뽐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심한 표정이 온몸에 드러났다.
하지만 엘레나는 달랐다.
처음부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주었고, 자신의 제안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었다.
‘이분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겠다.
모름지기 사내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겐 목숨을 바친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몬은 이번 공모에 자신의 목숨을 걸기로 했다.
* * *
케이타 제국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왜냐하면 르엘이 쉬지 않고 행군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잘 참았던 캐서린도 점차 힘들어졌다. 가뜩이나 영성술을 억지로 주입받은 터라 속이 안 좋았다.
캐서린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신녀님, 괜찮으신가요?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르엘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조금 쉬어가면 안 될까요?”
아까부터 흔들리는 마차 덕분에 캐서린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또한 배 속에는 이상한 구슬 같은 게 아직 자리 잡지 못한 탓인지 점점 거북해졌다.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속히 모셔오라고 한 터라. 이 언덕만 지나면 잠시 쉴 곳이 있습니다. 그 때까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르엘은 진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알았어요.”
캐서린도 설핏 미소를 보였다.
사실 캐서린은 르엘을 만나기 전에는 케이타 제국의 사람들은 모조리 야만인들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일어날 때 신전에 있으면서 케이타 군인들을 본 적이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커다란 키. 끔찍한 근육들을 자랑하며, 그들은 거침없이 사람을 죽였다.
마치 말과 한 몸인 것처럼 자유자재로 말을 탔으며, 한 손에는 피 묻은 칼을 들고 있었고, 표정은 살벌하여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앞에 앉은 사내를 보니 케이타 제국에는 꼭 그런 자들만 있는 것도 아닌 듯싶었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이 남자는 마치 잘생긴 다비드상 같았다.
‘케이타 제국에는 이런 사내도 있나?’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넋을 놓고라도 한참 동안 쳐다볼 것 같았다.
외모뿐 아니라 말씨도 조용하면서도 우아했다.
‘이런 사람도 있다면, 케이타 제국 생활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캐서린은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가이아 제국을 떠나 국경을 넘으면서부터 이상하게 불안해진 마음이었다. 그 때였다.
덜컹.
바퀴가 돌부리에 걸렸는지 심하게 출렁거리자, 캐서린의 몸이 기울었다.
“신녀님!”
르엘의 손이 쏟아지는 캐서린의 몸을 받쳤다.
덜커덩.
한바탕의 출렁임 끝에 마차는 다시 제 속도를 찾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캐서린은 이상한 감각을 느끼며 서둘러 르엘의 품을 떠나 자리에 앉았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지나면 쉬도록 하겠습니다.”
“……네.”
캐서린은 괜시리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 * *
가이아 제국의 신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칼립소는 로하스관으로 향했다.
칼립소의 행차 소식에 서재에서 엘레나가 내려왔다.
“그간 잘 지냈나?”
“그럼요.”
그간이라고 했지만, 고작해야 사흘만이었다.
“식사는 잘 챙겨 먹었고?”
칼립소의 붉은 눈이 엘레나의 작은 얼굴을 훑었다.
이전보다는 마르지는 않았는지, 까칠한 부분은 없는지, 자세히 오목조목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런 기색은 없어 보였다.
“물론이에요.”
안 그래도 부쩍 늘어버린 비비안의 잔소리에 엘레나는 삼시 세끼뿐 아니라 간식까지 챙겨 먹고 있는 지경이었다.
“이러다가 살이 찔 정도로 많이 먹고 있어요.”
“그거라면, 찬성이야.”
“뭘요?”
“당신은 살이 좀 더 붙는 편이 좋다고.”
하얗고 작은 엘레나의 얼굴에서 생기를 확인한 칼립소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요?”
“그때 말했잖아. 이제부터는 내가 리드한다고.”
“아.”
“오늘도 승마는 별로인가?”
엘레나의 시선이 창가에 머물렀다.
하늘은 맑고 햇빛이 좋았다.
그날 칼립소와의 만남 이후, 팔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그러니 이제 상처를 들킬 염려 따위도 없었다.
신전 설계도도 이제 어느 정도 윤곽이 나왔으니, 잠시의 여유를 즐겨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좋아요. 나가요.”
생각해 보니 승마를 한 지도 오래되었다.
승마뿐이 아니었다. 내내 서재에 박혀서 설계도면을 의논하고 작성하느라 항상 해오던 훈련을 쉬었더니, 몸 전체가 뻐근했다.
오랜만에 밖에 나가니, 기분 좋은 바람이 스쳐 갔다.
칼립소가 손짓하자, 칼이 달려왔다.
검은 갈기를 날리며 달려오는 칼을 보며 엘레나는 미소 지었다.
“칼, 오랜만이야.”
칼이 엘레나를 알아본 것처럼 힝힝거리며,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나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는 거 같은데.”
“그럼요, 국경을 함께 넘었는데.”
“오늘, 칼을 타겠소?”
“그래도 돼요?”
엘레나가 눈을 빛냈다.
“기꺼이, 양보하지.”
칼립소가 엘레나를 에스코트하려고 하자, 엘레나가 날렵하게 스스로 뛰어 칼의 등에 올라탔다.
그것을 보던 칼립소가 슬쩍 웃었다.
“내가 또 잘못 생각했군.”
옷차림이 달라졌다고, 엘레나가 아닐 리가 없었다.
“따라와요.”
먼저 출발하는 엘레나를 칼립소가 뒤이어 출발했다.
검은빛의 칼을 타고,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가는 엘레나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언덕을 한참 오르자, 엘레나도, 칼립소도 잠시 쉬어가려 말을 멈춰 세웠다.
“좀 쉬었다 갈까?”
“좋아요.”
둘 다 나무에 말을 묶어 놓고, 잠시 내려왔다.
“이런 것도 꽤 괜찮군.”
칼립소는 중얼거렸다.
바람이 적당히 불고 햇빛도 따사로운 날에 함께 달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좋았다.
그것도 아주.
“다시 달릴까요?”
엘레나가 잠시 숨을 돌린 후, 말을 꺼냈다.
“글쎄.”
칼립소는 선뜻 답하지 않았다.
같이 달리는 것도 좋지만, 좀 더 여유를 즐기며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뒤이은 엘레나의 말이 흥미를 끌었다.
“이번엔, 내기할래요?”
“뭘 걸고?”
칼립소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음……. 원하는 거 들어주기?”
칼립소가 신나게 웃었다.
“정말이오?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지?”
“그건, 폐하가 이겼을 경우고요.”
“자신 있나 보지?”
“출발할게요. 다음 언덕까지예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레나가 칼을 타고 달렸다.
승마는 엘레나가 자신 있는 종목 중 하나였다.
게다가 타고 있는 말은 칼이었다. 승마에서 기수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의 자질이었다.
엘레나가 있는 힘껏 속력을 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앞서고 있다는 것을.
칼과 한 몸이 된 채 휙휙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엘레나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칼과 한 몸이 된 채 달렸다.
모처럼 맞는 바람이 시원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전속력으로 달리는데, 뒤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어?”
거의 따라잡은 칼립소가 옆을 슬쩍 보자, 엘레나는 몸을 낮추고 더욱 속력을 올렸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그녀를 여유 있게 따라잡으며 칼립소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함께 승마하는 순간이 좋았다.
흘낏 보는 엘레나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입술을 앙다물며 칼을 모는 모습이, 은빛으로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하얀 얼굴에 복숭아빛이 맴도는 모습이 모두 좋았다.
잠시 얼굴에 홀려있는 사이, 엘레나가 또 앞서 나갔다.
찰나에 스친 승리의 미소도 좋았다.
그런 미소를 보려면 이까짓 패배쯤이야, 얼마든지 감당하리라.
칼립소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엘레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내가 이겼죠?”
“맞소.”
칼립소가 화끈하게 인정했다.
“원하는 게 뭐지?”
“딱밤이요.”
“딱밤이라고?”
칼립소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왜 하필 딱밤이지?”
“안되나요?”
“그럴 리가. 다만 이유가 궁금해서. 최소한 그거보단 더 좋은 걸 요구할 줄 알았는데.”
고개를 갸우뚱하는 칼립소에게 엘레나가 미소를 지으며 칼을 타고 가까이 다가왔다.
한 번쯤 오만한 이 자를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엘레나는 의욕적으로 팔을 들어 올리다 멈칫했다.
말들끼리 붙어있자니 아무래도 자세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제대로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엘레나는 칼에서 내렸다.
“폐하, 내리세요.”
“그러지.”
칼립소도 말에서 내리자, 엘레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말 위에서는 흔들림이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높이가 문제였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서야 그의 이마를 볼 수 있으니, 이번에도 자세가 영 아니었다.
“좀 자세를 낮춰봐요.”
“이렇게?”
커다란 키를 굽히며 고개를 숙이자, 그것은 그것대로 이상했다.
마치 입맞춤을 하려는 것 같지 않는가.
엘레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차라리, 좀 앉는 게 낫겠어요.”
그 말에 칼립소가 지체 없이 엘레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치 기사가 여왕을 대하듯.
“좀 아플 거예요.”
엘레나가 천천히 손을 풀었다.
딱밤 내기는 기사로 지낼 때 훈련을 하면서 장난으로 많이 해 본 놀이 중 하나였다.
여자라고 간혹 우습게 보는 기사들도 엘레나와 한 번 해 보고 나면 퉁퉁 부은 이마를 붙잡고 며칠은 고생했다.
“얼마든지.”
엘레나는 천천히 최대한 힘을 주어 손가락에 기를 모았다.
“하나, 둘, 셋 하면 때릴게요.”
“그냥, 빨리 맞는 쪽을 택하겠소.”
붉은 눈이 흔들린다고 느꼈다.
‘역시 사람이었어. 떨리나 보네.’
엘레나의 보랏빛 눈이 천진하게 빛났다.
붉은 입술을 깨물며, 엘레나가 자세를 잡았다.
“잠시만, 머리 좀요.”
엘레나가 칼립소의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올렸다.
“이대로 잡고 있어요.”
칼립소의 손이 위로 올라가서 엘레나의 손을 덮자, 엘레나가 황급히 손을 뺐다.
머리카락을 젖히니, 조각 같은 이목구비가 그대로 드러났다.
‘잘 생기긴 했네.’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빨리 때리지?”
순간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빨개진 이마보다 놀란 그의 눈동자를 더 보고 싶다는.
“하나, 둘…….”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