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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44화 (4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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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긴 적국이잖아.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라.”

“그건 각오해야지. 에이미, 이따 이야기하자.”

“응…….”

울먹이는 에이미를 뒤로 하고 캐서린은 서둘러 대신녀의 뒤를 따랐다.

대신녀의 방은 오랜만에 와 봤다.

처음 신녀가 되었을 때와 특별한 신제가 있을 때를 제외하곤 이곳에 올 일이 없었다.

“캐서린.”

대신녀가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네, 대신녀님.”

“케이타 제국으로 가면 어떤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목숨까지도?”

“그렇습니다.”

대신녀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캐서린은 움찔하면서도, 그 눈빛을 고스란히 받았다.

속까지 헤집는 강렬한 눈빛에 쓰러질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한참의 시험이 끝난 듯 대신녀가 은은하게 미소를 띠었다.

“혹시 네가 잘못되더라도, 네 식구들은 돌봐주마.”

그 말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단순히 빈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캐서린은 아까보다 진중한 어조로 답했다.

“시일이 촉박해. 당장 내일 떠나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대신녀는 가만히 캐서린을 훑어봤다.

사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후보는 두 명이었다.

캐서린과 에이미, 둘 중 한 명을 보내려고 했었다.

두 명 모두영성술을 하기에 뛰어난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그 중 좀 더 마음이 기우는 쪽은 에이미였다.

대대로 신녀 집안 출신인 에이미가 통로가 된다면, 영성술을 하기가 좀 더 쉬울 거라 생각 했다. 또한 엘레나와의 상성도 잘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미는 지원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런 작은 담으로는 일을 그르칠지 몰라 캐서린에게 맡기는 편이 옳았다.

그리고 급하게 영성술을 써야 하는데 그걸 감당하기엔 에이미의 체력은 너무 약했다.

더구나 그런 용도로 쓰기엔 에이미의 집안도 걸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캐서린.”

“네, 대신녀님.”

“시일이 촉박하기에 너에게 내 능력을 부을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네 신력이 부족한 건 알고 있겠지? 케이타 제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가서는 영성술로 소통하게 될 거다. 즉, 네가 통로가 될 거란 이야기야.”

그제야 캐서린은 자신의 몸이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적국에 가니 목숨을 걸라는 말인 줄 알았지, 편안하게 단순한 신녀 역할만 하면 될 거라는 예상은 오판이었다.

“잠시, 힘을 빼거라.”

대신녀가 캐서린의 손목을 잡았다.

“대……, 대신녀……님.”

“힘을 빼래두.”

그러더니 갑자기 능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릿한 기운이 스쳐 가면서 캐서린의 몸이 벌벌 떨렸다.

온몸으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대……신녀……님. 이거, 이, 이상해요.”

“가만히 있어.”

온몸의 말초신경이 일어나고 특히, 배 안의 고통이 심해졌다. 마치 불덩이라도 삼킨 양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제발……. 그……, 그만.”

입에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으로 눈이 까뒤집어지고 침이 절절 흘렀다.

배 속 가운데에 있는 불덩이는 이제 오른손으로 옮겨갔다.

“뜨…… 뜨거워요.”

“거울을 만들어 봐.”

“……네?”

“못 알아들어? 오른손 위로 거울을 만들라고.”

대신녀의 말에 캐서린은 뜨거워진 오른손 위로 기를 모았다.

잠시 후, 오른손 위에 기로 이루어진 커다란 둥근 모양의 거울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캐서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바로 그게 통로야.”

신기한 나머지 캐서린은 잠시 고통도 잊고 거울을 봤다.

하지만 곧 다시 몰려오는 고통에 정신이 흐트러지자, 거울의 문이 닫히고 그대로 사라졌다.

“정신 차리고 집중해.”

“너무 아파요.”

대신녀는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능력을 억지로 쏟아부은 탓에 캐서린의 몸은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다.

이런 급한 영성술의 경우에는 캐서린의 생명력을 담보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즉, 자주 하면 할수록 캐서린의 몸은 점점 망가질 것이다.

‘대의를 위해선 어쩔 수 없지.’

대신녀는 캐서린에게는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영성술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 좀 더 채근했다.

“한 번 더 해 봐.”

“네, 대신녀님.”

한 번 더 거울을 만든 캐서린은 이번엔 꽤 오랜 시간을 버텼다.

“그래, 바로 그거야.”

“으…….”

하지만 캐서린은 급격한 기의 소모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 * *

캐서린이 눈을 뜬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살았구나.’

캐서린은 황급히 배를 만져봤다.

어젯밤 일이 거짓말인 양 그대로였지만, 단전 부위에 이상하리만큼 뜨거웠던 감각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캐서린은 가만히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뭐지?’

배 속에 작고 동그란 구슬 같은 것이 만져졌다.

‘이상해…….’

마치 그 부위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때 눈앞에 대신녀의 발이 보였다.

“정신이 드니?”

“대신녀님.”

캐서린이 화들짝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시간이 없어. 빨리 채비를 준비해야겠구나.”

“저기……. 이대로 떠나면 되는 건가요?”

“그래.”

“대신녀님, 그런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어젯밤 이후 배 속에 이상한 게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단전 안에 구슬 같은 것이 진동을 했다.

“네 수행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알고 있겠지.”

“네…….”

대신녀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지금 느끼고 있는 그게 신호야. 내 신력을 쏟아부어 너와 연결통로를 만든 것이야.”

대신녀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케이타 제국으로 가고 나선 그곳으로 소통하게 될 거야. 구슬이 울리면, 아까처럼 거울을 만들거라.”

대신녀는 그녀가 떠나는 당일까지도 이런 영성술이 기를 갉아 먹는다는 이야기는 쏙 뺐다.

젊고 건강한 아이니, 잘 견딜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가서 황녀 전하를 잘 보필해라. 어서, 일어나. 서둘러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캐서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 * *

엘레나는 아몬과 함께 서재에 틀어박혀 설계도 작업에 몰두하는 매일을 보냈다.

“여기에선 왜 높이를 같게 하지 않는 거지?”

엘레나가 설계도의 한 부분에 의문을 품었다.

“똑같은 높이로 쌓으면 멀리서 볼 때 오히려 같아 보이지 않아요.”

“왜?”

“눈이 거짓말을 하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 보세요.”

아몬은 작은 나뭇조각 모형들을 한곳에 배치했다.

그의 말대로 모두 똑같은 높이의 모형이 늘어져 있는 것보다 미세하게 가운데의 모형 조각이 살짝 높은 것이 더 평평해 보였다.

“신기하네.”

“그리고 전체적으로 미세한 각도를 차이 나게 하여서 볼록하게 만들 겁니다.”

“왜지?”

“자연에는 직선이 없거든요.”

“정말 그렇네.”

엘레나가 환하게 웃었다.

자연에 직선이 없다는 말이 엘레나의 가슴을 쳤다. 사실 자연만큼 완벽한 조형물이 있을까.

엘레나는 아몬의 생각에 새삼 감탄했다.

“멋지네. 그 생각이.”

“아, 제가 아니라…….”

“그럼 누구?”

“제가 스승으로 여기는 분의 생각이세요.”

“그렇구나. 그래도 대단해.”

“황녀님도 대단하세요.”

“내가 왜?”

아몬이 진갈색의 곱슬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었다.

“요하스 자작의 손아귀에서도 구해주시고. 이렇게 이끌어주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아몬은 가이아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건축과 예술을 중시하는 가이아 제국이지만, 신분제도는 엄격했다.

후원을 빙자해서 귀족이 고용하는 형태였고, 귀족들은 예술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관심이 없는 경우는 다행이었다. 자신들의 취향이라면서 끼어들어 간섭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엘레나의 경우에는 달랐다.

충분히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사실, 황녀님을 예전부터 동경했었어요. 아니, 저뿐 아니라 누구나 그랬을 거예요. 황녀님은 저희의 희망이니까요.”

아몬이 서둘러 말했다.

“고마워.”

엘레나는 아몬의 진심 어린 말에 똑같이 진심으로 답했다.

“날 원망할 수도 있을 텐데.”

“원망이라뇨?”

“나라를 지키지 못했잖아. 너도 그래서 여기 온 거고.”

“그게 어디 황녀님 잘못인가요? 황녀님은 그래도 저희를 위해 싸워주셨잖아요. 손 놓고, 구경만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몬, 모두 최선을 다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아몬은 뭔가 이야기를 하려다 말을 삼켰다.

더 이야기하면 결국 베리우스 황제를 욕보이는 수밖에 없다.

“아몬, 이번 공모에는 반드시 우리가 선정되어야 해.”

아몬은 ‘우리’라고 말해주는 것에 또 한 번 감동받았다.

다른 귀족들이 엘레나처럼 자신들을 위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베리우스 황제의 생각만 바뀐다면, 많은 부분이 달라질 거다.

“아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니에요.”

“내가 너무 부담을 주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저도 이번 공모는 꼭 선정되고 싶어요. 동료들을 위해서라도요.”

지금 요하스 자작 밑에 있는 건축가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이번 공모에서 우승하면 다른 건축가들도 함께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엘레나와 함께라면 믿음이 갔다.

“그래서 말인데요. 황녀님. 신전에 직선을 완전히 없애면 어떨까요?”

“직선 없이 어떻게 신전을 짓는다는 거야?”

아몬은 자신이 상상한 신전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옮겼다.

사실, 이 설계안은 아몬이 건축 아카데미를 다니면서부터 꿈꿨던 것이었다.

순식간에 그려낸 유려한 곡선이 담긴 신전의 설계안을 엘레나에게 내밀었다.

흔히 보던 신전과는 달리 마치 파도의 물결처럼, 기둥은 하나의 나무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웅장한 느낌이 색달랐다.

아몬은 설계안을 보는 엘레나의 모습을 보며 긴장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꿈꿨지만 파격적인 디자인과 공사 비용 때문에 한 번도 실행해보지 못한 안이었다.

그동안 몇몇 귀족들에게 보여줬다가 비웃음만 당한 설계안이었다.

설계안을 보는 엘레나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히지 않았다.

‘괜한 말을 꺼낸 건가.’

가뜩이나 시일도 촉박한데 엘레나의 심기만 어지럽힌 것 같아 아몬은 후회가 됐다.

“저기……. 죄송합니다, 황녀님. 제가 주제넘게…….”

“이걸로 하자.”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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