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베리우스 황제도 고개 숙여 화답했다.
“이리 염려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보내주신 인재들 덕분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르엘의 말에 베리우스 황제의 안색도 밝아졌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황녀님도 잘 계십니다.”
엘레나의 안부에 대한 언급에 엘리자베스의 몸이 다가갔다.
“정말입니까?”
“황녀님은 현재 로하스관에서 머물고 계십니다.”
분명 ‘황녀’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존중이었다.
게다가 로하스관이라면 외교관이 머무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엘레나의 희소식에 베리우스와 엘리자베스의 얼굴도 한결 편안해졌다.
“앞으로 양국의 관계에 황녀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실 거로 예상됩니다.”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겨우 막았다.
대신녀에게 이야기를 들어 어느 정도 안심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케이타 제국의 사신에게 확인을 받고 나니 마음이 울컥 차올랐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러 오셨군요.”
베리우스 황제도 경계를 풀고 웃으며 말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럼, 다른 용건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르엘의 말에 잠시 마음을 놓고 있던 베리우스 황제가 긴장했다.
“칼립소 황제 폐하의 명이 있습니다.”
케이타 황제의 명.
이것은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베리우스 황제는 일어나 르엘이 전하는 문서 앞에 예를 갖췄다.
잠시 칼립소 황제의 전언을 읽던 베리우스 황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가이아의 신녀를 보내달라니.’
이미 상당량의 공물과 건축가 등을 보냈는데 이젠 신녀까지 보내달라고 하다니.
정중한 척 사신을 보내며 양국의 발전을 도모한다고 하지만, 탐탁치 않은 제안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신전과의 관계가 좋지 못한 터였다.
“가이아의 신전은 가이아 황제의 명을 받지 않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며 옆에 있던 아리엘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이아에서 신전은 독립된 곳이었다.
상호 존중이라는 개념하에 그들의 영역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건 케이타 제국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요.”
핑계 대지 말고 명을 받들라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베리우스 황제가 무거운 어조로 수락했다.
“시일이 촉박하여, 내일 같이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그건, 무리입니다.”
“황제 폐하의 뜻입니다.”
베리우스 황제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손을 잡았다.
“알겠습니다. 내일 같이 출발하도록 준비하지요.”
엘리자베스가 대신 답하는 것을 보고 베리우스는 걱정스럽게 마주 봤다.
혹여라도 그냥 답했다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면 곤란한 처지에 놓일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자칫 일이 어그러지면, 케이타 제국의 분노를 사는 것은 물론 신전과도 관계도 완전히 틀어질 수 있었다.
“황후, 우선 신전과 대화를 나누어야 하지 않소?”
베리우스의 귀에 엘리자베스가 살며시 속삭였다.
“걱정 말아요. 이번 일은 저한테 맡겨주세요.”
엘리자베스의 확고한 말에 베리우스의 표정도 편하게 풀렸다.
“가이아에서는 큰일은 여자들이 하나 봅니다.”
“허허. 황후와 신전은 오래전부터 인연이 깊은 터라.”
베리우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민망한 기색을 감추었다.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르엘이 웃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 * *
그날 밤, 엘리자베스는 다급히 신전을 찾았다.
“대신녀님. 말씀대로 케이타 제국에서 요청이 왔습니다.”
“무슨 요청입니까?”
“신녀 한 명을 보내달라는 전언입니다.”
대신녀는 각오했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시일이 좀 촉박합니다. 내일 당장 떠나야 해서요.”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일이요?”
대신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좀 급하긴 하군요.”
엘리자베스는 숨을 죽이고 대신녀의 답변을 기다렸다.
케이타 제국의 황제의 명이라 거스르기 힘들다고는 했지만, 엘리자베스의 입장에서 빠른 것이 그렇게 싫지 않았다. 그래서 기한을 연장해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신녀 중에는 영성술을 쓸 수 있는 자들이 있었다.
본디 죽어 떠난 영들을 불러 교류하는 것이지만, 신녀들끼리의 소통 창구로 쓰일 수도 있었다.
만일 신녀가 케이타 제국으로 넘어간다면 엘레나의 안부를 직접 알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차피 갈 것이라면 빨리 갔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내일 떠나게 준비시키죠.”
“대신녀님, 혹시 누구를 염두에 두시고 있나요?”
“황후 폐하, 그건 제 권한입니다.”
“죄송합니다.”
혹여나 대신녀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봐 엘리자베스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염려 마세요. 영성술을 할 수 있는 아이로 고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치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듯 대신녀가 흔쾌히 수락하자, 엘리자베스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돌아가세요. 아침 일찍 보내겠습니다.”
“네, 대신녀님.”
엘리자베스가 돌아가자 대신녀는 신녀들을 불러 모았다.
“너희 중 한 명이 케이타 제국으로 가야 할 것이다.”
대신녀의 말에 신녀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케이타 제국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자, 신녀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케이타 제국의 군사들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얼마나 야만적인지 잘 알기에 더욱 두려웠다.
하나같이 대신녀와 시선을 맞추기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대신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신녀들을 살폈다.
그때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신녀들 무리 끝에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녀 한 명이 고개를 들고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신녀의 이름은 캐서린이었다.
“캐서린.”
“네, 대신녀님.”
“이리 앞으로 오렴.”
캐서린은 대대로 신녀를 배출한 집안이 아니었기에 성인이 된 다음 대신녀에 의해 선택되어 들어왔다. 따라서 신녀 수업을 받은 지는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
“또 지원할 사람은 없는가?”
대신녀의 말에 신녀들은 아까보다 더 고개를 깊이 숙이고, 발밑만 보고 있었다.
“에이미.”
“네?”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며, 대신녀는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네 생각은 어떠니?”
“저, 저는……. 신녀님…… 저는…….”
당장이라도 사형 선고를 받은 듯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며 대신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니?”
“저는, 저는…… 물론 황녀님을 뵙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지만…….”
“됐다.”
대신녀는 손을 내리고, 캐서린을 돌아봤다.
“캐서린, 너는 내일 당장이라도 케이타 제국에 갈 생각이 있니?”
“맡겨만 주신다면 하고 싶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대신녀의 말에 분위기가 싹 얼어붙었다.
모두 캐서린의 답을 기다렸다.
“네, 대신녀님. 가겠습니다.”
캐서린이 맑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캐서린은 시골의 가난한 집 농민 출신이었다. 신분제도가 엄격한 가이아에서 농민들은 땅이 없이는 살기 힘들었다.
처음 캐서린이 태어날 때, 그녀의 집에는 자신들의 땅이 있었다.
가이아는 문화와 예술이 발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귀족들과 일부 예술가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예술이 꽃피우는 대신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계속되었고, 서민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특히 귀족들의 사치를 감당하기 위해 날이 갈수록 세금은 무거워졌다.
캐서린의 집안 역시 결국 세금으로 인해 땅을 빼앗겼다.
땅을 빼앗긴 후, 아버지는 술에 취해 살며 자포자기했고, 집안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 때, 캐서린이 대신녀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그로 인해 집안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본래 신녀가 되면, 그 집안의 가족들은 신전이 관리하는 땅을 이용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생계 걱정 없이 살 수 있고, 신녀는 신전의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캐서린이 신녀로서 신전에 들어가자 막대한 텃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보통 신녀는 대대로 같은 집안에서 신녀를 배출했고, 대대로 신녀를 지낸 집은 막대한 토지와 함께 권력도 세습되었다.
신녀들은 자신들만의 땅에 발을 들인 평범한 서민출신인 캐서린을 눈엣가시처럼 미워했다.
간혹 캐서린처럼 원래 신녀 집안이 아닌 상태에서 대신녀에 의해 발탁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런 경우, 대부분 한 사람의 대에서 끝나게 되었다.
또한 신녀로 일을 하더라도 한미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캐서린은 평생을 그리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왕 신녀가 된 거, 누구보다 잘하고 싶었고, 지금은 감히 품을 수조차 없는 꿈이지만 나중에는 대신녀도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기회는 꼭 필요했다.
게다가 이곳에서 텃세에 시달리며 있는 것보다는 타국의 땅으로 가는 것이 나았다.
케이타 제국은 야만족이라 제대로 된 신전이 없다고 들었다.
그러니 적국이라는 것만 빼면 몸도 마음도 편한 일이 될 것 같았다.
신녀는 귀한 존재였다.
아무리 야만족이라 해도 자신들이 초청해놓고, 목을 베지는 않을 것이다.
캐서린은 담담하게 대신녀의 눈빛을 받았다.
“알겠다. 캐서린, 그럼 날 따라오렴.”
“네, 대신녀님.”
대신녀가 먼저 자리를 떠나자, 캐서린도 뒤따라가려 했다. 그러나 캐서린의 치마를 에이미가 잡았다.
“캐서린, 정말 갈 거야?”
에이미는 대대로 신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녀 수업을 받은 아이였다.
나이는 캐서린과 동갑이지만, 신전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고, 향후 대신녀의 후계자가 될 거라 예견되고 있었다.
게다가 성품이 맑고 착해 캐서린이 처음 신전에 왔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마 에이미가 없었더라면, 캐서린은 기존 신녀들의 텃세에 더욱 서러웠을 것이다.
“어,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