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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엘레나를 노려보던 칼립소가 크게 웃었다.
“그렇군.”
칼립소가 정중한 손길로 어깨의 매듭을 다시 단단히 묶어줬다.
“대신, 앞으로는 내가 리드해야겠어.”
칼립소가 엘레나를 집요하게 노려봤다.
“당신의 리드는 너무 느려.”
고개를 절레 젓더니 씩 웃었다.
“느린 게 꼭 나쁜 건 아니에요.”
“장점이 뭐지?”
“그만큼 나중에 변하지 않죠.”
칼립소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생각지도 못한 큰 장점이군.”
칼리소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도 난 욕심이 많은 편이라. 빠르고 변하지 않은 것을 택하겠소.”
칼립소가 손짓하자, 먼발치에 있던 시종들이 달려왔다.
엘레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종들이 서둘러 파라솔을 정리했다.
“들어가서 열심히 작업하시오.”
“가이아의 신녀는 언제쯤 올까요?”
“난 모든 것이 꽤 빠른 편이니, 기대해도 좋을 거요.”
칼립소가 손을 내밀어 엘레나를 일으켰다.
정중한 에스코트에 칼립소의 시종들도 엘레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너무 무리하진 말고. 틈틈이 쉬시오.”
“알았어요.”
엘레나가 일어나 로하스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칼립소는 본궁으로 떠났다.
* * *
달이 훤히 밝은 밤.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밤이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신전에는 달빛만 고요히 비치고 있었다.
신전 앞에는 한 여인의 모습이 등장했다.
베일을 쓰고 있는 여인은 바로 엘리자베스였다.
똑똑.
엘리자베스가 신전 앞을 두드리자, 신녀 한 명이 나왔다.
“황후 폐하?”
“밤늦게 죄송합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 밤에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시녀들도 데리고 오지 않고요.”
“대신녀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당분간, 대신녀는 황제 부부의 출입을 금지했다.
“엘레나가 걱정이 돼서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잠시만 대신녀님을 뵐 수 없을까요?”
엘리자베스의 간절한 청원에 신녀는 고민하는 듯했다.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어요.”
“잠……시만요.”
조심스럽게 자리를 뜬 신녀가 한참 들어가 있는 동안 엘라자베스는 밝은 달을 보았다.
자신이 혼자 이곳을 찾아온 줄 알면 베리우스 황제는 화를 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두 손을 꼭 모았다.
‘제발.’
사실 대신녀는 엘리자베스와 인연이 깊었다.
원래라면 엘리자베스도 신녀가 될 것이었다. 실제로 신녀 수업을 받은 적도 있었고.
그도 그럴 것이 엘리자베스의 가문은 대대로 신녀를 배출한 집안이었다. 만약 황후로 간택되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 또한 자연스럽게 신녀로 자라났을 것이다.
신녀 수업을 받을 때, 대신녀는 엘리자베스를 특별히 총애했기에 주위에서는 엘리자베스가 대신녀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제 지간의 정을 쌓은 만큼 베리우스 황제는 만나주지 않더라도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온 것이다.
잠시 후, 신녀가 조심스럽지만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다.
“이리 조용히 따라오세요.”
엘리자베스는 신녀를 따라 서둘러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대신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신녀님.”
오랜만에 보는 대신녀 앞에서 엘리자베스는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대신녀의 키는 8척이 넘었고, 마른 체격에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의 깊은 정을 아는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밤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대신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대신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자베스는 용기를 냈다.
“엘레나의 일이 걱정 돼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이런.”
대신녀는 한심한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적국에 보냈으면 그만한 각오는 했어야죠.”
“죄송합니다.”
“당분간 고생이 심할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할 수 없지요. 운명인 것을.”
“대신녀님.”
엘리자베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밤늦게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엘레나의 안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라도 얻기 위해서였다.
“쯧쯧.”
파리해진 엘리자베스의 안색을 보고, 대신녀는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어릴 때부터 영성이 맑았으며 누구보다 재능이 많았으나 지나치게 담이 약했다.
그것이 대신녀가 되기에 부적합했던 이유였고, 결국 황후로 간택되면서 신전과는 멀어졌다.
“이리 담이 약하셔서야.”
엘리자베스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기실 그녀가 밤에 잠에 못 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베리우스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었다.
얼마 전, 엘리자베스는 엘레나가 처형당하는 꿈을 꾸었다.
언뜻 봤던 칼립소의 무시무시한 얼굴과 함께 엘레나의 사지가 찢기는 끔찍한 꿈이었다.
어릴 때부터 신력이 출중했던 엘리자베스는 예지몽을 잘 꾸는 편이었다.
그런데 엘레나가 처형당하는 꿈이라니.
너무 무서워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다.
그 후에는 다시 그 꿈을 꿀까 봐 두려워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엘레나는 무사한가요?”
“엘레나는 강한 아이입니다. 그녀의 별이 아직 환하게 빛나고 있어요.”
엘레나의 별이 환하다는 말에 엘리자베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진정되었다.
“잠시 검은 구름에 갇혀 있지만, 곧 더 환하게 빛날 겁니다.”
다행이다.
아무래도 이번 꿈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앞으로 더 환하게 빛나다니.’
그럼, 처형당할 리가 없지 않는가.
“엘레나는 신탁의 계시를 받은 아이입니다. 가이아 제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 겁니다.”
“대신녀님, 그럼 엘레나를 언제 데려올 수 있을까요?”
“기다리세요. 곧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 겁니다.”
“정말요?”
“그때, 다시 오세요. 아마 요구하는 것이 있을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간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를 지낼 시간입니다. 그만 돌아가세요.”
“알겠습니다.”
대신녀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안심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 * *
엘레나가 로하스관으로 돌아가자마자, 비비안이 마중을 나왔다.
“엘레나 님, 폐하께서는 함께 안 오시나요? 준비를 다 해놨는데요.”
“돌아가셨어.”
“벌써요?”
“그래.”
엘레나가 방으로 들어가자, 비비안도 따라왔다.
“무슨 용건 있어?”
“아니요. 혹시 옷 시중을 들어드릴까 해서요.”
“내가 하는 게 편하다니까. 그보다 비비안, 잠시 나가줄래?”
“네, 엘레나 님.”
비비안이 나가자, 엘레나는 천천히 소매를 걷었다.
‘아!’
아까의 느낌이 맞았다.
상처는 이전과 다르게 확연히 아물어 있었다.
‘이유가 뭘까?’
사실 이런 적이 한 번 더 있었다.
지난번 건축 현장에서 다쳤을 때, 그때도 상처가 낫지 않다가 갑자기 나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능력이 돌아왔는지 알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이었다.
‘지난번과 비슷한 점은…….’
아까 일을 되돌리다 엘레나는 멈칫했다.
칼립소와 입 맞췄던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다시 소매를 내렸다.
‘곧 가이아의 신녀가 온다고 했으니까 그때 물어보면 되겠지.’
지금은 신전 건축 일이 우선이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엘레나는 서재로 발길을 돌렸다.
* * *
날이 밝고 해가 찬란하게 떴다.
대신녀에게 엘레나의 안위에 대해 확인을 받은 엘리자베스는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오.”
베리우스가 엘리자베스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오늘은 잠을 푹 잤어요.”
비록 새벽부터 몇 시간이 고작이었지만 내내 잠을 설치다가 잤기에 더 달콤했다.
“다행이군. 요즘 그렇지 않다고 걱정이 되었는데. 이제야 맘이 좀 놓이는군.”
그간 엘리자베스가 딸의 일로 통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베리우스 황제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엘리자베스의 건강 또한 염려되었다.
베리우스 황제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 국무 회의를 앞두고, 정무를 보고 있는데 급하게 카를로 백작이 들어왔다.
“폐하, 방금 케이타 제국에서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뭐라고? 그런 소식은 없었지 않는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카를로 백작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일단, 모시게.”
“네.”
베리우스 황제는 심각한 낯빛으로 일어났다.
* * *
케이타 제국 사신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가이아에서는 사신을 맞기 위해 분주했다.
화려한 연회가 열렸고, 제1황녀인 엘레나 대신 제2황녀인 아리엘이 사신을 접대하기로 했다.
엘리자베스는 혹시나 사신으로부터 엘레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사신을 맞이하여 저녁에 열린 궁정 연회는 최근래에 보기 드물게 화려했다.
패전 이후, 가이아 제국에서는 일절 연회가 금지되어 있었다. 연회뿐 아니라 연주 및 공연도 거의 없다시피했다.
오랜만에 울려 퍼지는 음악에 간만에 궁정이 들썩였다. 흥분과 긴장이 공존된 분위기에서 연회는 진행되었다.
케이타 제국의 사신은 데릭의 남동생인 르엘이었다.
케이타 제국의 순수 혈통이 큰 키에 거구의 체격을 가진 것에 비해, 르엘은 이민족 출신이었기에 키는 크지만 체격은 마르고 선이 고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금발에 푸른 눈은 인상을 더욱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이게 만들었다.
장군이 아닌 르엘이 외교 사신으로 온 것은 이번 방문은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 외양과 상관없이 가이아 제국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케이타 제국의 황제께서 안부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르엘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곳에 오기 전 칼립소 황제는 르엘에게 특별히 명한 바가 있었다. 이번 요구를 빠르게 관철시키되, 가이아 제국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고 말이다.
그러기에 부드러운 화법을 쓰는 르엘을 선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