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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로 따라오세요.”
비비안이 아몬을 데리고 가자, 엘레나는 방으로 돌아가 팔을 자세히 살펴봤다.
며칠 전 건축 현장에서 다쳤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통증이 심했다.
예전에 상처가 나면 몸 안에 있는 오라와 같은 기운이 흩어져서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처가 낫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통증도 아까보다 심해졌다.
-엘레나 님, 들어갈게요. 아몬 님은 방으로 안내해드렸어요. 괜찮으세요?
비비안은 엘레나에게 가까이 가서 그녀의 팔을 확인했다.
여전히 피는 멈추지 않았고, 살갗은 아까보다 더 벌어져 있었다.
“엘레나 님, 도저히 안 되겠어요. 의원을 부를게요.”
“그래……. 그리고 깨끗한 천 좀 가져와 줘.”
상처가 안 좋아지고 있는 이상, 더 이상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것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네.”
비비안은 전언을 보낸 뒤, 하얀색 천과 베르나르 의원이 준 연고를 가지고 왔다.
“일단, 이거라도 발라야겠어요. 베르나르 의원님께 전언을 띄웠으니 곧 오실 거예요. 우선 팔 좀 내밀어 주세요.”
엘레나가 팔을 내밀자, 비비안이 연고를 듬뿍 올렸다.
따끔한 감각이 전신에 돌았다.
비비안이 상처 부위를 천으로 꼭 동여매자, 천 사이로 금세 피가 스며들었다.
“잘 멈추지 않는 것 같아요.”
비비안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이어 베르나르 의원이 왕진 가방을 들고 서둘러 로하스관으로 들어왔다.
“이리 오세요.”
비비안의 안내에 따라 베르나르 의원은 엘레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이전 상처가 벌어진 거 같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베르나르 의원이 엘레나의 앞에 앉아 팔을 바라봤다.
“상처가 심한데요.”
“…….”
베르나르 의원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때 드린 연고는 계속 바르셨습니까?”
“네.”
“오늘은 어디에 부딪히셨습니까? 이건 칼에 베인 상처 같은데요.”
베르나르 의원이 상처를 살피며 연고를 덧발랐다.
“상처가 덧나게 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치료를 끝낸 의원이 간 이후, 엘레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정말 능력이 사라진 걸까?’
그날, 칼립소에게 피를 줬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신녀님께 물어봐야 하는데, 방법이 없으니…….’
엘레나는 피로감을 느끼고, 정원을 나와 걸었다. 신발을 벗고, 정원의 흙에 발을 올리자, 좀 편해졌다.
보드라운 흙이 발가락 사이로 느껴졌다.
편안함을 느끼며 엘레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 * *
칼립소는 며칠째 심기가 불편했다.
덕분에 회의를 하던 대신들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몇 번의 안건에 트집을 잡았다.
결국 보다 못한 데릭이 회의를 종료시켰다.
대신들이 물러가고 칼립소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 곳을 응시했다.
‘지금쯤이면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정말 가이아에서는 남녀 간의 데이트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하는 건가?’
칼립소는 답답함과 짜증이 치솟았다.
구애를 하겠다고 하고 리드까지 맡긴 상황에서 매달리며 재촉하는 것은 모양 빠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기다리자니 속이 타다 못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물론 신전 건축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비공식적으로 자세히 보고 받고 있었다.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모조리 요하스 자작이 데려갔다는 사실 역시 진작에 그의 귀에 들어와 있었다. 그럼에도 그대로 둔 것은 엘레나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엘레나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답답해.’
아무리 무도장에서 수련을 해도 칼립소는 날뛰는 마음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오늘 정무 회의 역시 하나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다른 구실은 없을까?’
「가이아 제국에서 신녀를 한 명 데려와도 될까요? 신전을 짓는데 자문을 얻을까 해서요.」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언젠가 들었던 엘레나의 부탁이 떠올랐다.
하지만 신녀를 데려온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무슨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가이아의 신녀를 케이타로 데려오면 어떤 요사술을 부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 번의 만남의 핑계로 삼기엔 위험 요소가 많았다.
국무 회의가 끝나고 대신들이 돌아갈 때도 칼립소의 얼굴에는 구름이 가시질 않았다.
“폐하, 요 며칠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데릭.”
“예, 폐하.”
“으……음.”
말을 꺼내놓고 칼립소는 또 망설였다.
“가이아의…….”
‘젠장!’
“폐하, 하명하소서.”
“아니다.”
결국 칼립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마른 자가 물을 마시게 되어 있다. 그쪽에서 연락이 없으면 찾아가면 그만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찾아가면 어떻겠는가.
자신은 이 나라의 황제가 아닌가.
칼립소는 직접 로하스 관으로 가기로 했다.
이 나라에 자신이 못 갈 곳은 없었다.
* * *
로하스관 서재에서는 엘레나와 아몬이 한창 신전 설계 도면에 대한 이야기로 분주했다.
엘레나는 벌써 며칠째 밤을 새우다시피 작업에 매달렸다. 피로가 몸을 짓눌렀지만, 이 정도쯤은 견뎌야 했다.
팔의 상처도 피로 때문인지 여전히 더디 낫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상할 바가 없는 속도였으나, 엘레나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정말 능력이 사라진 걸까?’
하지만 고민을 한들 지금으로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해결하지 못할 것을 고민하느니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는 게 최선이었다.
일단 공모에 선정이 되면 칼립소에게 다시 신녀를 데려오는 문제에 대해 언급해 볼 생각이었다.
“황녀님, 우린 열주들은 밖으로 꺼내는 게 어떨까요?”
피곤에 지친 것은 아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열정이 가득했다.
이 사업 공모가 실패한다면, 그는 다시 요하스 자작 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대우가 기다리고 있는지 말 안 해도 뻔했기에 아몬 역시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열주를 신전 밖으로 꺼낸다고?”
다소 파격적인 제안에 엘레나가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열주는 신전을 구성하는 커다란 기둥이었다.
보통 신전 안에 있어서 그 개수로 그 위세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가이아 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신전에는 열주가 적었지만, 큰 신전일수록 화려하고 많은 열주들이 신전 안에 배치되었다.
“열주를 밖으로 꺼내고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시선을 끌 겁니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신전 건축 공모는 평범한 설계로는 가망이 없었다. 처음부터 눈에 띄어야 했다.
“마치 케이타 제국의 힘을 과시하는 느낌으로 말이지?”
“네, 열주를 사방으로 가득 늘어놓으면, 그 위세를 보자마자 느낄 수 있으니까요.”
엘레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분명 이번 신전은 가장 화려하고, 눈에 띄는 설계안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한창 설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비비안이 방 안으로 뛰어왔다.
“엘레나 님!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아몬과 엘레나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밖에서 들리는 칼립소의 기척에 아몬과 엘레나는 서둘러 나와 그에게 예를 갖췄다.
자신을 맞이하는 엘레나를 보고 미소 짓던 칼립소의 표정은 뒤따라오는 아몬을 보자 싸늘해졌다.
“폐하를 뵈옵니다.”
아몬이 칼립소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를 보는 칼립소의 눈빛은 매서웠다.
그 눈빛을 본 아몬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칼립소는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이곳에 출입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더이상 그녀에게 강압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감히 사내와 함께 나와?’
행색을 살펴보니 가이아인이 분명했다. 게다가 부드러운 인상은 어떤 이를 연상시켰다.
‘빌어먹을 안토니안.’
“이자는 누구지?”
칼립소의 목소리가 매서웠다.
“가이아의 건축가, 아몬이에요.”
고개를 들라는 말이 없었기에 아몬은 여전히 이마를 바닥에 대고 있었다.
“가이아의 건축가라고?”
칼립소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이아의 건축가들은 모두 요하스 자작의 집에 모여 있는 것으로 아는데?”
“폐하께서 어떻게 그걸 아시죠?”
“흐음…….”
칼립소는 조금 찔렸다.
“혹시…….”
엘레나의 의심스러운 눈길에 칼립소는 아까보다 많이 찔렸다. 그녀 주위의 동태에 대해 쭉 보고 받는 것이 들킨 것이 아닌가.
칼립소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폐하께서 명하신 일인가요?”
“뭐라고?”
전혀 엉뚱한 방향의 질문에 칼립소는 당황했다.
허락한 일이라니.
오히려 엘레나가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제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오.”
“그렇군요.”
“가이아의 건축가를 모두 독점하는 것은 정당한 방법이 아니지. 그렇지 않아도 요하스 자작에게 경고를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소.”
칼립소의 말에 엘레나는 생각에 잠겼다.
만약 여기서 칼립소 황제가 또다시 요하스 자작에게 경고를 준다면, 자신이 고자질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하스 자작은 현재 케이타 제국 대부분의 건축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런 자와 어설프게 척을 지면 가이아의 건축가들이 고생하게 될 것은 뻔했다.
지금은 아몬도 데려왔으니, 공모에서 정당하게 우승하는 것이 먼저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아몬도 데려왔으니까요.”
“그게 이상한 점이오. 요하스 자작이 아몬을 순순히 내줬단 말이오?”
“그뿐이 아니에요. 가이아의 건축가들의 처우 개선도 약속했어요.”
“그럴 리가.”
“폐하께서 직접 확인해 봐도 되고요.”
혹시 나중에 칼립소가 확인하게 되면 이 정도는 경고라 여길 것이다.
“과연,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군.”
“그런데 이곳엔 무슨 일로 행차하셨어요?”
칼립소는 시선을 피했다.
“아몬은 여기서 함께 지내는 거요?”
“아무래도 설계 공모를 하려면 함께 있는 것이 편해서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칼립소는 못마땅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뭔가 말하려는데, 엘레나의 입이 먼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