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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39화 (3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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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설득은 필요없었다.

요하스 자작에게는 힘에 의한 굴복이 차라리 자연스러웠다.

“폐하께 말씀드릴 겁니까?”

요하스 자작의 말소리가 작아졌다.

“만약 침묵한다면?”

“이자를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건축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 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앞으로 가이아 건축가들에게 이처럼 함부로 대할 땐, 나 역시 오늘의 사건을 문제 삼겠네.”

“아…… 알겠습니다.”

그제야 엘레나는 채찍에 힘을 풀었다.

“식사는…… 한 것으로 치지. 나가자, 아몬.”

엘레나는 아몬을 잡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황녀님.”

엘레나는 아몬을 데리고 요하스 자작의 저택에서 벗어났다.

* * *

케이타 제국과 조약이 체결된 후, 가이아 제국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엘리자베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밤이 되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정원을 나와 달을 보며 자주 한숨을 쉬곤 했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렇게 환한 보름이 되면 엘레나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사무쳤다.

“아가, 지금 어찌 지내고 있니.”

케이타 제국이 철수한 후, 가이아 제국은 나름 안정을 찾았다.

비록 앞으로 수많은 공물들을 케이타 제국으로 보내야 하지만, 그건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황실의 경우에는 빠르게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내 아가.”

엘리자베스는 땅에 기운을 받으려고 손바닥을 댔다.

요즘 유난히 기운이 없는 것이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려는 생각이었다.

부드러운 흙은 엘리자베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반면 엘레나는 이것조차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또 한 번 울컥했다.

잠깐 봤지만, 칼립소 황제는 무시무시해 보였다. 그런 자의 정부로 끌려갔으니, 그 고생이 오죽할까.

그 생각만 하면 엘리자베스는 잠도 오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데 누군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잡았다.

“엘리자베스.”

“폐하.”

“또 여기 나와 있는 게요?”

“…….”

말은 안 해도 두 사람의 마음은 같았다.

“아무래도 정부로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

엘리자베스의 말에 베리우스는 침묵했다.

누가 자신의 딸을 정부로 보내고 싶을까. 다만 그때의 상황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떠올리니 또 자신의 비겁함이 드러나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렸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자신의 딸 하나를 구하자고, 전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으니까.

베리우스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자베스, 그 뒤로 병력을 훈련시키고 있소. 조만간 케이타 제국으로 가서 엘레나를 데려오는 작전도 실행해볼 생각이오.”

“정말이에요?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말을 삼켰다.

“그러다 다시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러지 않게 해야지.”

“차라리…… 처음부터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아리엘이 있으니까, 아리엘에게 뒤를 잇게 해도 되었을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신탁의 계시가 있었는데 어찌…….”

“신탁의 계시가 있었는데, 정부로 끌려간다는 것은 말이 되고요?”

“검은 구름…….”

「가장 밝은 달로 태어나 붉은 태양을 만나 제국의 번영을 이룰 것이니.

검은 구름의 방해를 이기고 언약의 피를 나눌 반려를 맞아,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리.」

신탁의 계시에는 ‘검은 구름’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게 이렇게 될 줄이야.

칼립소의 정벌이 시작했을 때, 그의 행태를 보고 백성들은 암암리에 ‘검은 구름’이 나타났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은 말을 타고 검은 망토를 휘날린 채 사방을 휩쓰는 그의 군대는 흡사 검은 구름을 연상케 했다.

“진작 더 경계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신탁의 계시대로라면, 엘레나는 돌아올 거요. 쿨럭.”

“괜찮으세요?”

엘리자베스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베리우스 황제를 살폈다.

조약이 체결된 이후, 제국은 안정되어 갔지만 베리우스 황제의 건강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기침은 잦아졌으며, 밤에 심장을 부여잡으며 웅크리고 있는 일도 잦아졌다.

“쿨럭. 쿨럭.”

베리우스 황제는 찌르는듯한 통증에 가슴 부근을 잡았다.

“폐하, 의원을 부를까요?”

“됐소.”

베리우스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기침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밤바람이 차요. 이만 들어가세요.”

“아니오. 이 정도는 타국에서 고통을 겪고 있을 엘레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베리우스 황제는 착잡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봤다.

진작 국경 방비를 튼실히 하고, 주변국들을 도와주자는 엘레나의 말을 좀 더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그때라도 국방의 수비를 정비하고 주변국들과 연합체제를 구축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안토니안은 아직도 못 찾았나요?”

“어딘가엔 살아있겠지.”

“전, 안토니안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머뭇거리던 엘리자베스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정말 그 일을 엘레나가 했을까요?”

“드하야 즙을 먹인 일 말이오?”

“네.”

“그건 엘레나도 시인한 일이었소. 게다가 칼립소 황제가 본인이 직접 엘레나에게 따른 와인을 먹고 쓰러졌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긴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말을 삼켰다.

“왠지 우리 아이가 그런 짓을 한 거 같지 않아서요. 비겁한 짓을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아이인데 그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을까 싶어요.”

“아마 가이아 제국을 위해서 한 일일 거요. 만약 계획대로 칼립소 황제를 처단하고, 군대를 물리쳤다면, 우리의 승리가 될 수도 있었고.”

“엘레나가 케이타 제국의 군력을 몰랐을까요? 전쟁에 참여했는데요. 엘레나는 누구보다 냉정한 아이예요.”

“전시 중이니, 생각이 흐트러질 수도 있지. 아니면 엘레나가 누구의 사주를 받기라도 했다는 소리요?”

“혹시, 안토니안이 멋대로 한 짓이 아닐까요?”

베리우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도 수상하고요.”

그 점은 베리우스도 불만이었다.

만약 도망치려면, 무엇보다 엘레나를 데리고 도망쳤어야 하지 않는가.

굴욕적인 항복 조약을 맺은 후, 하를 공작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하를 공작도 안토니안의 소재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엘리자베스, 그런 생각은 말아. 지금 우리끼리 의심하는 건 좋지 않아.”

“왜요? 사건의 진상은 정확하게 밝혀야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혹시 알아요? 칼립소 황제가 엘레나를 풀어줄지 모르잖아요.”

베리우스 황제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소. 그리고 엘레나가 돌아오면 안토니안하고 혼인해야 하오.”

베리우스 황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신탁의 계시도 있지 않았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잠자코만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엘리자베스는 다소 불만스럽게 말했다.

어쨌거나 정혼자가 아닌가.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안토니안과 하를 공작 가문이 확실하게 나서주지 않은 것이 못내 서운했다.

“엘리자베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전시 중이라 행방불명이 되었을 뿐이오. 그리고 향후에 엘레나를 구출할 사람도 안토니안뿐이오.”

베리우스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황녀라고는 하지만 정부로 끌려갔던 전력이 있는 셈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정혼한 안토니안이 그나마 그런 흠을 품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신탁의 계시를 받은 황녀를 두고, 아리엘을 제1황녀로 올릴 수도 없었다. 결국 안토니안이야말로 유일한 대안이었다.

“신녀님께 가 볼까요? 답답한 마음을 신녀님께서는 알아주실 거예요.”

베리우스 황제는 침통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굴욕적인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나서 베리우스는 신전에 가서 또다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가이아 제국을 지키지 못한 죄와 무엇보다 제1황녀인 엘레나를 정부로 넘겨준 것에 대해 신전은 분노했다.

대신녀는 당분간 베리우스 황제가 신전에는 발걸음도 하지 못하게 했다.

몇 번을 신전 문 앞에서 거절당한 베리우스 황제는 난감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봤다.

엘리자베스는 속이 타는 듯 베리우스 황제의 팔을 흔들었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이젠 신녀님도 용서해주실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베리우스 황제의 말에 엘리자베스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레나가 요하스 자작의 식당에서 다쳐서 나오자, 비비안이 비명을 질렀다.

“엘레나 님!”

비비안은 서둘러 엘레나의 앞으로 왔다.

“무슨 일이세요?”

엘레나의 팔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세상에, 이 팔 좀 봐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식당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조용히 해. 괜찮으니까. 그보다 이제 로하스관으로 돌아가자.”

“엘레나 님…….”

“괜찮으니까 소란 떨지 마. 금방 나을 테니.”

엘레나의 말에 비비안은 입을 다물었다.

아몬은 조용히 엘레나의 뒤를 따랐다.

“이자는 누구예요?”

“가이아의 건축가야. 나와 같이 갈 거야.”

엘레나는 마차에 올라 등받이에 피곤한 몸을 기댔다. 팔에는 뜨거운 통증이 점점 타고 올랐다.

로하스 관에 도착하자, 마차에서 엘레나가 내렸다.

비비안이 비틀거리는 엘레나의 팔을 잡자, 그녀가 살짝 신음을 흘렸다.

“으읏.”

“엘레나 님? 많이 아프세요?”

이상한 일이었다.

금방 아물 줄 알았던 상처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벌어져 피가 많이 나고 있었다.

엘레나는 한쪽 팔로 다른 쪽 팔을 눌렀다.

“안 되겠어요, 엘레나 님. 의원을 부르겠어요.”

“아니야. 조금 후면 나을 거야. 먼저 아몬부터 방으로 안내해 줘.”

“하지만…….”

“비비안.”

할 수 없이 비비안은 아몬을 향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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