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엘레나 님. 안녕하십니까.”
요하스 자작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엘레나가 다친 이후, 여러모로 신경쓰이던 차였다.
하필이면 그 이후로 바로 신전 건축 공모가 열리지 않았는가.
칼립소 황제는 전쟁에 미쳐있는 나머지 그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편이었다.
귀족들도 힘든 건축 사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한미한 가문이었던 요하스 자작은 일찍 사업에 뛰어들었고, 그곳에서 노다지를 발견했다.
정복된 땅이 많았기에 지어야 할 건물들은 점점 늘어났고, 요하스 자작은 돈이 돈을 찍어내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한미했던 가문은 돈의 힘으로 일어섰고, 지금 케이타 제국에서는 점점 무시하지 못할 가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특히 신전의 경우에는 칼립소 황제가 금전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화려하게 지어도 된다고 말했기 때문에 최대한 자금을 끌어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복병을 만난 것이다.
요하스 자작은 엘레나는 찬찬히 훑어봤다. 전통 의상인 샤오르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꽤 아름다웠다.
특히 보랏빛 눈동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이러니 폐하께서 홀리셨지.’
그녀가 찾아올 거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물론 이렇게 일찍 찾아올지는 몰랐지만.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모조리 데려갔으니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든 트집은 잡히지 않고 융숭하게 대접하되, 확실하게 기를 눌러놔야 했다.
“안녕하세요. 요하스 자작님.”
“이리 찾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요하스 자작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이리 오시죠.”
요하스 자작은 엘레나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엘레나는 요하스 자작을 따라가면서 저택 내부의 장식을 유심히 살펴봤다.
케이타 제국 대부분의 건축을 한다는 자였지만, 내부의 장식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엘레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요하스 자작을 바라봤다.
“그날 다치신 곳은 어떠십니까?”
“염려해 주신 덕분에 나았습니다.”
“건축 현장은 위험한 곳입니다. 여인의 몸으로는 하기 힘든 부분이 많지요.”
요하스 자작은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요하스 자작.”
엘레나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하자, 요하스 자작이 시선을 맞췄다.
“오늘 이렇게 급하게 찾아온 이유는 신전 건축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서입니다.”
“아, 신전 건축이라면 지금 제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사업이죠.”
“가이아에서 많은 건축가들이 왔습니다.”
엘레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신전 건축을 하는 데 모든 건축가들이 필요치는 않을 겁니다.”
“이런.”
요하스 자작이 얄밉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신전 건축 사업은 특히나 심혈을 기울이는 사업이라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가이아에서 온 모든 건축가가 필요합니다. 공모조건에 건축가의 수에 대한 제한은 없기도 하고요.”
요하스 자작은 씩 웃으며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왕 오신 것, 식사를 대접해드리죠.”
“식사보다는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군요.”
“식사부터 하시죠. 꼭 대접해드리고 싶어서요.”
어쩔 수 없이 요하스 자작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간 엘레나는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엘레나는 요하스 자작을 서늘한 눈길로 바라봤다.
‘굳이 식사를 하자고 한 것이 이런 이유에서 였다니.’
식당에는 가이아의 유명한 건축가들이 모여 있었다.
어떤 이는 광주리를 들고 서 있었으며, 어떤 이는 그릇을 나르느라 바빴다.
그 가운데, 건축가 목록에서 봤던 아몬이 물그릇을 들고, 무릎을 꿇었다.
“눈을 녹인 물입니다. 먼저 손을 씻으시죠.”
요하스 자작이 엘레나를 쳐다보며 오만하게 말했다.
“아까 건축가들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 이런 이유였습니까?”
“이런, 오해하지 마세요. 식당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경험을 해봐야 식당도 잘 짓게 되지 않겠습니까?”
“신전에는 식당이 없을 텐데요.”
“하하. 향후에 말입니다. 신전만 지으라는 법은 없지요.”
요하스 자작은 아몬에게 호통을 쳤다.
“뭐 하고 서 있는 게냐! 어서 새로운 물을 또 가져오지 않고.”
“……네.”
아몬과 엘레나의 눈이 잠시 부딪혔다. 그의 푸른 빛의 눈에는 서러움과 슬픔이 공존했다.
엘레나는 화를 삼키며 식탁을 봤다.
차려진 식탁은 입이 딱 벌어지게 화려했다.
칼립소와 함께 했던 만찬이 오히려 검소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재물을 많이 모았다더니.’
엘레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았다.
금으로 만든 그릇 위에는 올리브가 넘치도록 담겨 있었고, 가운데에는 살짝 익힌 통돼지 구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이아의 건축가가 통돼지의 배를 가르자, 안에서 소시지 구이와 닭 내장 구이, 오리 구이가 끊임없이 나왔다.
마치 케이타 제국이 삼켜버린 나라들이 생각나 엘레나는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사양치 말고, 많이 드세요. 참, 리콘을 드셔야죠.”
요하스의 자작이 손짓하자, 아몬이 밖에 나가 은쟁반을 가지고 돌아왔다.
은쟁반 위에는 커다란 알 모양의 케이크와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마치 달걀노른자를 비벼 놓은 것 같은 겉모양에 거부감이 들었다.
“우리 저택의 요리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요리입니다.”
요하스 자작의 설명과 함께 엘레나의 앞에 정체 모를 케이크가 놓여졌다.
가까이서 보니 케이크의 상태는 더 안 좋아 보였다.
비릿한 냄새가 역겨워, 고개를 돌리니 아몬의 안색이 왠지 창백하게 보였다.
“드시지요.”
엘레나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커다란 알 모양의 케이크를 나이프로 잘랐다.
“앗.”
케이크 안에는 부화 되기 직전의 어린 새가 들어있었다.
“요하스 자작!”
“왜 그러십니까? 혹시 요리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엘레나가 분노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이아에서는 새를 보호하고, 따르는 전통이 있었다.
따라서 새 사냥은 물론 식용으로 쓰이기 위해 길러진 닭을 제외한 새 요리는 먹지 않았다. 하물며 어린 새는 더더욱 요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부화 직전의 어린 새를 넣은 케이크라니.
이것은 가이아 제국에 대한 모독이었다.
“자작. 그대가 잘 모르고 한 결례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가이아 제국에서는 어린 새 요리를 먹지 않습니다.”
“이런, 그랬군요. 그래도 한 번 드셔보세요. 케이타 제국에 왔으면, 케이타의 법을 지켜야 되지 않게습니까? 드시지요.”
“손님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케이타의 법도입니까?”
“아. 그렇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요하스 자작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요리를 어쩐다. 힘들게 한 요리를 버릴 수도 없고 말입니다.”
요하스 자작이 잠시 고민을 하는 척하더니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몬, 자네가 먹지.”
“네?”
갑작스런 명에 아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요하스 자작, 아몬 역시 가이아 제국의 사람입니다.”
“그거야 예전 이야기이지요.”
요하스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몬, 먹어.”
서슬 퍼런 요하스 자작의 명에 아몬의 안색이 파래졌다.
“으…….”
요하스 자작이 잔인하게 어린 새의 목을 잘랐다.
“먹으라니까.”
아몬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거부하는 거야? 감히 케이타 제국의 자작의 말을? 당장 채찍을 가져오거라. 요놈의 버릇을 고쳐놓고 말테니.”
엘레나는 굳은 얼굴로 요하스 자작을 불렀다.
“자작, 이만 하지요.”
“아닙니다. 엘레나 님. 케이타에서 하극상은 용납할 수가 없지요. 목을 베도 할 말이 없답니다.”
곧이어 요하스 자작의 시종이 채찍을 들고 왔다.
검고 굵은 가죽 채찍 끝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달려 있었다.
“먹어.”
요하스 자작이 채찍을 높게 치켜들었다.
하지만 아몬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무언가를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을 놓은 것 같기도 했다.
“감히 내 명령을 거부해?”
요하스 자작은 채찍을 집어 들고 아몬에게 세게 내리쳤다.
쫙!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단 한 번의 채찍질에도 아몬의 살갗에 생채기가 났다.
끝에 달린 날카로운 칼날이 아몬의 피부를 갈라놓았고, 굵은 채찍은 보기에도 흉한 자국을 만들어냈다.
“먹어.”
아몬이 각오한 듯 굳게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이놈이!”
요하스 자작이 씩씩대며 다시 채찍으로 아몬을 세게 내리쳤다.
“자작, 그만두래도!”
“안됩니다.”
요하스 자작은 있는 힘껏 채짹을 내려쳤다.
그러나 이번에 채찍을 맞은 이는 아몬이 아니었다.
아몬 앞에 엘레나가 막아선 것이다.
“황녀님, 괜찮으십니까?”
아몬이 황급히 엘레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채찍이 지나간 그녀의 팔은 아물어가던 지난번 상처가 벌어지면서 붉은 피가 흘렀다.
“아니…….”
당황한 요하스 자작이 뒷걸음질을 쳤다.
설마하니 엘레나가 대신 맞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내가 내리친 게 아니라…….”
요하스 자작의 얼굴이 낭패로 일그러졌다.
전에 다쳤다는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던 황제의 태도가 생각났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서기에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어느새 수십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비…… 비키세요.”
“왜.”
엘레나의 눈이 사납게 요하스 자작을 노려봤다.
“비키시라고 했습니다.”
요하스 자작이 다시 채찍을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확히 아몬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
무릎 꿇은 아몬의 등에 채찍이 내려가는 순간, 강한 힘에 의해 요하스 자작의 몸이 휘청거렸다.
엘레나가 채찍을 잡아 버린 것이다.
“이거 놓으시죠.”
“내가 왜.”
엘레나는 채찍을 휘감아, 요하스 자작의 몸을 확 끌어당겼다.
일찍부터 전장을 누빈 엘레나와 요하스 자작은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케이타의 제국에서는 손님 대접이 참 요란하군. 채찍까지 휘두르다니.”
“이건 제가 엘레나 님에게 한 게 아니라…….”
“자네가 아니면 누가 한 짓이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