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상처는 다 나았소?”
“거의 나았어요.”
“다행이군.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칼립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 치유력이면 벌써 낫고도 남았을 텐데.”
“그러게요. 하도 피곤한 일이 많아서 능력이 좀 떨어졌나 보죠.”
“그럼, 꽤 아팠겠군.”
마치 자신이 아픔을 느끼는 듯이 칼립소의 미간이 좁혀지자, 엘레나가 실소했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아요.”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니?”
그 말이 더 마음에 안 드는지 칼립소의 미간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엘레나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처음에 고문한 건 생각도 안 나나요?”
“그건…….”
“알아요. 포로로 잡혔으니까 당연한 거죠. 비난하는 건 아니에요.”
엘레나가 담담하게 말했으나, 칼립소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다.
“그때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오.”
뜻밖의 사과에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그때 일은…….”
더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칼립소가 입을 열려 하자, 엘레나가 막았다.
“지난 일은 이야기하지 말아요. 사과받으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에요. 갑자기 다정한 척하는 게 안 어울려서 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칼립소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폐하께서도 고문을 당한 것은 마찬가지잖아요.”
그때 일을 언급하자, 조금 가까워졌던 사이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칼립소는 뭔가 생각하는 듯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엘레나.”
칼립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 일은 서로 퉁 치지.”
‘퉁?’
“한 번씩 주고받은 것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는 연애 중이니까.”
칼립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함께 식사한 것으로 만족하지. 열심히 해서 공모에 좋은 성과가 나길 바라겠소. 난 심사에는 관여하지 않아서 도와줄 수 없으니.”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공정하게만 하면 돼요.”
“공정이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지. 그럼, 건투를 빌겠소.”
“그래요.”
엘레나도 흔쾌히 동의했다.
식당을 나온 엘레나는 로하스관 정자에 앉아 고심에 잠겼다.
다시 한번 서류 양식을 살피니, 꽤 자세한 양식으로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시일도 촉박했다.
지금부터 함께 일할 건축가들을 찾아야 했는데 가이아의 건축가들은 모조리 요하스 자작 쪽으로 간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가이아의 건축가가 아닌 다른 건축가를 구할 수는 없었다.
‘휴, 쉬운 일이 없네.’
다행이라면, 케이타 제국의 장점은 공정성에 있었다.
워낙 역사가 짧고, 황제의 절대적 권력에 의지한 탓에 귀족들이 득세하기가 힘들었다.
칼립소 황제는 전쟁에 미쳐있지만, 그만큼 실력에 대해선 엄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실력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장수를 임명했다면 이렇게 승리를 연속으로 가져가지 못했을 것이다.
피에 미쳐있다는 소문이 돌만큼 전쟁을 즐겼지만, 한편으로는 무섭도록 합리적이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데려와야 할 텐데.’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현장에 가보는 것이 빠를 것 같았다.
* * *
현장에 가보니, 가이아의 건축가들은 물론 사람들의 흔적 또한 보이지 않았다.
공모가 시작된 이래 신전 건축 공사는 완전히 멈춰 있었다.
돌이 가득 올려진 수레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으며, 터를 잡는 곳은 그대로 버려둔 형국이었다.
‘요하스 자작에게 직접 가봐야겠어.’
엘레나는 요하스 자작을 만나 담판을 짓기로 했다.
분명 그 역시 가이아에서 온 많은 건축가들이 모두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엘레나는 로하스관으로 돌아가 요하스 자작의 저택으로 방문할 채비를 했다.
“엘레나 님, 어디 가시게요?”
“비비안, 요하스 자작에 대해서 알아?”
엘레나의 질문에 비비안은 수다를 늘어놓았다.
“알다마다요. 장안에서 모르는 바가 없어요. 얼마나 재물을 밝히는 자인데요.”
“혹시 뇌물을 받는 거야?”
만약 뇌물을 받는다면, 다른 길이 있을 것도 같았다.
당장 가이아의 건축가들을 데려간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공정성의 잣대로 뇌물 사건을 문제 삼으면 길이 생길 수 있었다.
“소문은 무성하지만 확실하게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이재에 밝은 사람이에요. 아마 요 몇 년간 재산을 열 배도 넘게 불렸을 거예요.”
“그래?”
엘레나가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복한 나라의 건축들을 죄다 맡고 있거든요.”
“그런 것치곤 솜씨가 별로던데.”
케이타 제국 내의 건물들은 실용적이긴 했으나, 조형적인 미가 부족했다.
그것을 알기에 칼립소 황제도 가장 먼저 건축가들을 달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글쎄요. 전 그런 건 잘 몰라서요. 여튼 뭐든지 엄청 빨리 짓는다고 했어요.”
“그래.”
속도가 빠른 것은 분명 큰 장점이었다.
“건축업으로 재산을 엄청 불린 데다, 이번에 신전을 건축한다고 해서 더 벌었을 거예요.”
“신전 건축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잖아.”
“이번 신전은 폐하께서 예산과 상관없이 무조건 최고로 지으라고 하셔서 요하스 자작이 엄청 신이 났어요. 건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최고급으로 산다고 해서, 저한테까지 소문이 들어올 정도였으니까요.”
‘나를 원망하겠군.’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만 없었다면 ‘공모’는 애초에 열리지도 않았을 테니.
케이타 제국은 어찌나 금전이 넉넉한지 설계안에는 자금 계획 같은 것은 들어있지도 않았다.
가이아 제국에서 건축을 할 때는 예산 작성이 필수였는데, 케이타 제국에서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듯했다.
“옷을 준비해 줘. 요하스 자작을 만나야겠어. 먼저 전언부터 띄워줘.”
“네, 엘레나 님.”
“언제쯤 답변이 올까?”
“일주일 정도 생각하시면 돼요.”
“그렇게 오래?”
공모 기간은 한 달 정도 소요되었다.
그 안에 설계안을 제출해야 하는데 일주일을 소비하는 것은 낭비였다.
“비비안, 외출복을 줘. 내가 직접 찾아가야겠어.”
“직접요?”
“시간이 없으니까.”
“알겠어요. 잠시만요.”
비비안은 한쪽에 있는 옷장을 열었다.
수많은 드레스들이 빼곡하게 들어있었지만, 모두가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매듭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드레스는 하나가 풀리면 나머지도 연결되어 풀리게 만들어 있었다. 전통의상이라고는 하지만, 협상에는 적절치 않았다.
“드레스 종류는 이것밖에 없어?”
“네, 케이타의 귀족 부인들은 모두 샤오르를 입는걸요.”
디자인이 한정되니, 색상과 옷감에 집착하는 것 같았다. 옷장 안의 드레스들의 색은 무지개처럼 조금씩 다르게 여러 빛깔을 빛내고 있었다.
‘가이아에서 옷을 가져오면 좋으련만.’
처음은 정부였지만, 지금은 외교사절 명목으로 로하스관에 왔으니, 가이아에서 의복을 가져와 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다.
엘레나는 차차 진행하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바이올렛으로 부탁해.”
“네.”
비비안이 바이올렛 색상의 샤오르를 엘레나에게 건넸다.
이 옷의 유일한 장점은 입고 벗기가 매우 수월하다는 것이다.
유목민 생활을 했던 케이타족에게 기동성면에서 꼭 필요했던 옷이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정착하면서 살게 되면서 다른 목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어깨에 달린 매듭을 풀고, 허리에 있는 매듭까지 풀자 드레스가 한 번에 내려왔다. 바이올렛 색상의 샤오르로 갈아입고 나니, 보랏빛 눈동자 색이 더욱 빛났다.
“마차는 어떻게 부르지?”
“잠시만 기다리세요.”
비비안이 서둘러 나가서 준비를 하는 동안, 엘레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요하스 자작은 분명 쉽게 가이아 건축가를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움직일 방도는 칼립소의 정책인 ‘공정성’을 언급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다행히 황제는 두려워하는 것 같으니 그 방법이 가장 통할 듯 싶었다.
“엘레나 님! 이제 출발하셔도 돼요.”
“같이 가게?”
“당연하죠.”
비비안은 입술을 꼭 다물고 엘레나를 바라봤다.
“엘레나 님의 첫 외출이시잖아요. 당연히 함께해야죠.”
“그래.”
케이타의 전통이나 예법을 모르는 상황에서 비비안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엘레나는 승낙하고 현관을 나서자,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레나 님.”
두 마리의 백마를 끌고 온 마부는 엘레나를 보자, 깍듯하게 인사했다.
금으로 장식된 마차는 역시 화려했다.
특히 바퀴는 매우 크고, 반짝거려서 눈에 띄었다.
“어서 타세요.”
비비안이 문을 열고, 엘레나를 불렀다.
마차 내부는 붉은 융단으로 깔려 있었으며, 가이아의 마차에 비해 꽤 넓은 편이었다.
‘안도 화려하네.’
엘레나가 자리를 잡자, 비비안이 앞에 앉으며 마부에게 명했다.
“요하스 자작님 댁으로.”
“네, 알겠습니다.”
다행히 로하스관에서 요하스 자작의 저택은 그리 멀지 않았다.
“원래 요하스 자작님 저택은 더 멀리 있는데, 신전 건축 때문에 요 근처의 저택을 매입했어요.”
“다행이네.”
마부는 꽤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
덕분에 마차 안은 흔들림 없이 거리를 지나갈 수 있었다.
넓게 트인 창문 너머로 엘레나는 거리의 건물들을 훑어보았다.
아이들 곳곳이 거리에 나와 뛰어놀고 있었으며, 표정은 비교적 밝았다.
아무래도 물자가 풍부해서 그런지 사람들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고 거리 전체에 생기가 있었다.
특히 시장을 지나칠 때가 인상적이었다.
각종 상인들이 여러 물건들을 내놓고 팔았는데 가이아에서 보던 것보다 양과 수가 많았다.
이대로라면 케이타 제국이 빠르게 성장할 것이 한눈에 보였다.
“엘레나 님, 도착했어요.”
요하스 자작의 저택에 도착하자, 비비안이 입을 열었다.
재물을 많이 모았다는 비비안의 말답게 자작의 저택치고는 매우 크고 화려했다. 잘 가꿔진 정원을 오랫동안 가로질러 가서야 정문이 나왔다.
“잠시만요.”
비비안이 재빨리 마차에 내려 엘레나의 방문을 알렸다.
잠시 후, 비비안이 마차로 돌아왔다.
“엘레나 님, 지금 내리시면 돼요. 다행히 요하스 자작님이 계셔서 방문을 허락했어요.”
헛걸음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엘레나는 마차에서 내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