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36화 (3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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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는 요하스도 할 말이 없었다.

칼립소는 실력에 따른 등용으로 유명했다.

명성이 드높은 장수도, 아무리 집안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경쟁을 통해 실력을 입증하지 못하면 등용하지 않았다.

반면에 이방인이라도 뛰어난 재능이 있으면 기꺼이 등용했다.

데릭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미라예스관에서 신청 서류를 받아 가시죠.”

“네. 폐하의 명이라면 따라야지요.”

요하스 자작은 반쯤 울상인 표정으로 미라예스관으로 향했다.

* * *

햇살이 깊숙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엘레나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늦잠을 잤나 보네.’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상처가 난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다행히 팔의 상처는 거의 아물어있었다.

‘돌아온 건가?’

회복 속도가 빨라졌다고 하나 완전히 능력이 돌아왔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예전 같으면 다치고 얼마 안 가서 깨끗하게 나았을 테니.

치유 능력은 엘레나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었다.

처음 엘레나가 태어난 날, 그녀는 울지 않았다. 놀란 시녀들은 깜짝 놀라 아이의 상태를 살펴봤다.

보통 갓 태어난 아이는 우렁찬 울음소리로 건강하다는 것을 알리기 때문이다.

그녀의 출산 과정을 지켜본 의원이 황급히 아이의 엉덩이를 때렸지만, 단지 찡그렸을 뿐이라고 했다.

대신 엘리자베스의 품에 안기자 방긋방긋 웃기까지 했다.

그제야 시녀들이 신녀를 불러왔고, 눈부시게 반짝이는 은발과 아이의 상태를 확인한 신녀가 엘리자베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마마, 경하드립니다. 황녀님께서 달의 축복을 타고 태어나셨습니다.」

「그게, 정녕 사실이냐?」

엘리자베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돌았다.

신녀는 칼을 들어 갓 태어난 아이의 여린 피부에 상처를 냈다.

“악! 대체 무슨……!”

엘리자베스가 비명을 질렀다.

“걱정 마세요. 왕비 전하, 곧 치유되실 겁니다.”

신녀의 말 그대로 빠르게 치유되는 광경을 본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신탁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가장 밝은 달로 태어나 붉은 태양을 만나 제국의 번영을 이룰 것이니.

검은 구름의 방해를 이기고

언약의 피를 나눌 반려를 맞아,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리.」

신녀의 확인을 받은 후에야 엘리자베스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엘레나를 안았다.

엘레나가 자라면서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신탁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했었다.

「엘레나, 넌 축복받은 아이야.」

「축복이라니요?」

「넌 누구보다 가이아 제국을 위대한 제국으로 발전시킬 거야.」

「그럼, 내가 황제가 되는 거예요?」

「큰일 날 소리. 여인이 황제가 되는 일은 없어.」

「그러면요?」

「네 반려자가 위대한 제국을 건설할 거야. 그러니 언약의 피를 나눌 반려를 맞아야지.」

자신이 황제가 되지 못한다는 말에 엘레나는 실망했지만, 애써 감정을 감추고 궁금해했다.

「그럼, 제 반려는 누군데요?」

「대신녀님이 말씀하시길, 하를 공작가의 안토니안이란다.」

엘리자베스는 환한 얼굴로 말했다.

엘레나가 태어나자마자, 가이아 제국에 금혼력을 내리고, 귀족 가문 중 위대한 제국을 건설할 붉은 태양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하를 공작가의 장남 안토니안이 선정된 것이다.

그리고 둘은 엘레나가 열 살이 되던 해, 약혼을 했다.

어느새 과거를 떠올리고 있던 엘레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능력이 줄어든 건 아니겠지?’

예전보다 회복 속도가 더딘 것이 불안했다.

‘이래서야 나중에 가이아 제국을 지킬 수 있을까?’

엘레나는 걱정이 됐다.

‘아니면 가이아 제국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벌을 받는 걸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간청한지 모른다. 전쟁을 대비해 군사를 육성하고,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하지만 베리우스는 문화와 예술에만 집중했지 군사력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에다, 황족이며 귀족들의 타락은 눈에 띄게 심해졌다.

오죽하면 능력 있는 가이아 기사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을 떠나겠는가.

엘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를 나눈 딸인 자신의 말도 들어주지 않는데, 어떤 누구의 말을 들어주겠는가.

베리우스는 좋은 사람이었으나, 우유부단하고, 갈등을 두려워했다. 때문에 고위 귀족들은 저 나름대로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암담한 현실에 인재가 빠져나가는 것을 뻔히 바라보면서도 황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해가 갈수록 백성들에게 세금을 올려 받았으며, 계층 간의 갈등은 심해졌다.

이미 안은 썩을 대로 썩은 상태였다.

혼인식을 올리고, 안토니안이 황제에 오르게 되면 엘레나는 개혁을 시작할 셈이었다.

안토니안은 언제나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엘레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과연 안토니안이 내 말을 들어주었을까?’

「믿고 맡겨줘.」

「엘레나, 알잖아. 이미 돌이킬 수 없는걸.」

자신에게 상의도 하지 않고 드하야 즙을 먹인 것은 지금도 용서할 수 없었다.

‘만약 화친 조약을 제대로 작성했으면 어땠을까?’

쓸데없는 미련이었다.

엘레나는 더 이상 지난 일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우선 이곳에서 신전 건축에 매진하면서 가이아 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하스 자작을 다루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엘레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신전 건축 장소로 향했다.

* * *

엘레나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요하스 자작이 황급히 나왔다.

“엘레나 님, 오셨습니까?”

어제와 달리 살가운 태도에 엘레나가 의아스러운 눈으로 자작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엘레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응했다.

“그때 말씀하신 대로 가이아의 건축가를 인부로 쓰는 것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요? 생각을 바꿨다니 다행이네요.”

엘레나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반색을 했다.

“그래서 설계안부터 작성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황궁에서 신전 설계안을 새롭게 공모한다고 해서요.”

“벌써 황궁에서 공고가 나왔나요?”

엘레나가 놀라 되물었다.

“아직 소식이 늦으신가 봅니다. 신청 서류도 이렇게 받아왔습니다.”

엘레나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어디에서 받아 가야 하나요?”

“황궁에서 받아 가면 됩니다.”

“잘됐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가이아 건축가들은 역시 뛰어난 것 같습니다. 지금은 가이아에서 온 건축가들을 중심으로 설계안 작성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엘레나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가이아에서 온 건축가들을 전부 다 참여시키는 건 아니겠죠?”

“설마라니요. 당연히 전부 다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작은 아이디어라도 소중하니까요.”

요하스 자작의 입매가 올라갔다.

“그럼, 저는 설계안 작성에 바빠서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엘레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는 요하스 자작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참, 치사하군.’

이대로 가다간 가이아에서 온 건축가를 한 명도 사용하지 못하게 생겼다.

엘레나는 발길을 돌려 황궁으로 향했다.

어쨌든 공모는 참여해야 했다.

엘레나가 신청 서류를 받으러 미라예스관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묵직한 목소리가 등 뒤에 들렸다.

“우연히 보게 되는군. 엘레나.”

엘레나가 뒤를 돌아보니, 칼립소가 눈가를 접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우연히 보는 게 맞나요?”

의심하는 듯한 엘레나의 말에 칼립소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좀 늦게 온 거 같군.”

“참가 서류를 받으러 왔어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엘레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미라예스관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서둘러 줄을 서야 할 것 같았다.

한 걸음 옮기려는데 칼립소가 봉투를 내밀었다.

“여기 있소. 시간을 절약해 주었으니, 점심이나 같이하겠소?”

칼립소가 제법 미소까지 띠고 말했다.

엘레나는 칼립소가 내민 봉투를 잡았다. 하지만 답을 듣기 전에는 주지 않겠다는 듯 칼립소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알았어요, 식사를 함께하죠.”

탁.

칼립소가 갑자기 손을 놓는 바람에 엘레나는 잠시 휘청거렸다.

봉투 안의 서류를 확인한 후, 엘레나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앞으로 걸어갔다.

* * *

점심 식탁은 화려했다.

흡사 저녁 만찬과 같이 각종 음식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거 한번 먹어보겠소?”

칼립소는 아까부터 귀찮을 정도로 엘레나에게 요리를 권하고 있었다. 덕분에 엘레나가 먹는 동안 칼립소의 접시는 거의 비어있지 않았다.

“이것도 먹을 만할 거요.”

칼립소는 엘레나가 음식을 넘기기가 무섭게 고깃덩어리를 또 앞에 놔두었다.

“먹고 있어요.”

이제 숫제 칼립소는 턱을 받치고 엘레나가 먹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폐하, 폐하께서도 식사를 드시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엘레나가 차갑게 말했다.

“별로, 그보다 당신이 먹는 거 보는 게 더 좋은데.”

엘레나는 참지 못하고 칼립소를 노려봤다.

“체하겠어요.”

“왜? 물 줄까?”

칼립소가 화들짝 놀라 물잔을 건넸다.

그러자 엘레나가 예법도 무시한 채 나이프를 쨍그랑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니까 시선 때문에 못 먹겠잖아요.”

“아. 그렇다면야.”

그제야 칼립소는 시선을 내렸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 들릴 뿐, 식탁은 고요했다. 한동안 둘은 조용하게 식사만 했다.

쳐다보는 시선도, 대화도 없으니 엘레나는 식사하기 편했으나 계속 침묵만 이어지니 그 또한 은근히 불편했다.

하지만 뭔가 가벼운 대화를 꺼내려다가도 왠지 그러길 기다리고 있는 저 눈빛을 보니, 귀찮아질 게 뻔해 말을 삼켰다.

이왕 입을 다물려 놓았으니, 이참에 식사에 집중하는 게 옳았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자 요리사가 디저트를 준비했다.

“이젠 말해도 괜찮아요.”

차를 마시고 쿠키를 먹으며 엘레나가 허락하듯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칼립소가 살짝 웃었다.

“그래?”

흠흠.

목까지 가다듬으며 칼립소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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