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천천히 내려온 입술은 그녀의 입술이 아닌 이마에 뜨겁게 입맞춤을 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숙면에 방해가 되오.”
한참 동안 낙인처럼 누르던 열기가 겨우 떨어져 나갔다.
“그럼, 다음 만남을 기대하지.”
그 말을 끝으로 칼립소는 뒤를 돌아 성으로 향했다.
칼립소와 헤어진 엘레나는 로하스관의 침실로 들어갔다. 이마에 뜨거운 열감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두 번째 데이트라니.
알현이 이런 식으로 발전할 줄은 몰랐다.
「억지로 뭘 하자는 건 아니야. 다만, 마음을 열어달라고.」
‘정말 진심인가?’ 엘레나는 자신의 입술을 만져봤다.
이렇게 깊은 스킨십은 자신도 처음이었다.
안토니안과도 어릴 때부터 정혼자 사이였지만, 뺨이나 입술에 살짝 스치듯 하는 키스가 전부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정신없이 빠져들었지?
「혹시 알아? 알고 보면 매력이 넘칠지.」
엘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흔들리지 말자.
넘어가 봐야 얻는 것은 고작 정부의 위치뿐이다. 그러니 연인이 된다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칼립소의 연심을 적당히 이용해 외교적 입지를 다져야 했다. 그래야 무사히 가이아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엘레나는 복잡해진 마음을 정리했다.
그 때, 마침 노크 소리가 들리고 침실 문이 열렸다.
“엘레나 님, 알현은 잘 갔다 오셨어요?”
비비안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그래.”
“아까 폐하와 함께 들어오시는 거 같던데, 좋은 시간 보내셨어요?”
“그저 신전 건축 때문에 잠시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야.”
비비안이 수상하다는 듯 엘레나를 바라봤다.
“그런 것 치고는 시간이 좀 많이 걸리신 것 같은데요?”
“그야 알현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으니까.”
‘쑥스러워하시긴.’ 비비안은 흐뭇한 눈길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팔 좀 보여주세요.”
“왜?”
“왜긴요. 연고를 발라야죠. 자기 전에 꼭 바르라고 베르나르 의원님이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어요.”
비비안이 엘레나의 곁으로 가서 손목의 천을 걷어 올렸다.
“많이 아프셨겠어요.”
“괜찮아.”
“그래도 아까보다 훨씬 많이 나으셨네요. 연고가 꽤 효험이 있나 봐요.”
하지만 엘레나의 생각은 비비안과 달랐다.
‘이 정도의 상처면 아무리 늦어도 지금쯤이면 완전히 아물어야 하는데.’
엘레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에 비비안이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낮보다는 나아졌지만, 따끔한 고통은 여전했다.
“며칠은 고생하실 것 같아요. 목욕도 제대로 못 하실 테고.”
엘레나는 팔의 상처가 자꾸 신경 쓰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잠옷으로 갈아입혀 드릴게요.”
“됐어. 혼자 할 수 있어.”
“엘레나 님, 그것도 제 일이랍니다.”
“비비안.”
엘레나가 비비안을 바라봤다.
“난 패전국의 황녀야.”
“굳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넌 내가 이 나라의 황후가 될 사람이 아니라도 괜찮아?”
엘레나는 줄리의 태도를 떠올렸다.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시선이 떠올랐다.
오히려 그게 자신의 처지에 맞을지도 몰랐다.
처음 비비안을 만났을 때와 달리, 지금은 옆에 있다고 해서 그녀에게 돌아갈 이익은 없을 테니.
“음.”
비비안이 잠시 생각하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 엘레나 님이 좋아요.”
“왜지?”
“일단 아름다우시잖아요.”
그 말에 엘레나는 살짝 당황했다.
“그런 이유라니, 좀 의외네.”
“전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해요.”
비비안이 진정으로 감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일단 그게 첫 번째 이유고요. 그리고 전 인연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한답니다. 처음 저랑 인연이 되었으니, 끝까지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걸 아니까 폐하께서도 절 다시 부른 것일 테고요.”
엘레나는 처음 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도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만, 외모가 아름답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섬기게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황제가 믿고 맡긴 일이라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은 수긍할 수 있었다.
“알았어.”
엘레나는 한층 안심한 어조로 말했다.
무엇 하나 마음 둘 곳이 없는 이 땅에서 시녀마저 의심하게 된다면 꽤 고달픈 인생일 것이다.
자신이 좋다고 하니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럼, 잠옷으로 갈아입으시겠어요?”
“비비안, 예전에도 그랬지만 난 혼자 갈아입는 게 편해.”
“아무리 그러셔도…….”
“나와 함께하기로 결정했다면, 내 의사를 따라야지.”
엘레나는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황제의 뜻에 따라 자신의 시녀로 왔겠지만, 자신의 옆에 있으려면 자신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엘레나는 결정하라는 듯이 비비안을 바라봤다.
다행히 비비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따라줘서 고마워.”
비비안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 침실을 나갔다.
엘레나는 조심히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앉았다.
갈아입다 보니 아무래도 낫지 않는 상처가 신경 쓰였다.
「절대 네 피를 아무한테도 나눠주면 안 돼.」
어릴 적 처음으로 치유력이 발현되고, 엘리자베스가 한 말이었다.
‘정말 피를 나눠줘서 생긴 일일까?’
그날, 칼립소가 배에 칼이 박힌 채로 군사를 이끌었다고 들었다.
몽롱해진 정신 탓에 잠들어버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위세가 대단했다고 했다.
‘정말 피의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강한 사람이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어머니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왜 내 피를 아무한테도 나눠주면 안 돼요?」
「네 피에는 치유력이 들어있어.」
「그러면 위급한 사람을 도울 수 있잖아요.」
「얘야. 그러다간, 네가 위험해져.」
엘리자베스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만약에 안토니안이 위급한 상황이면, 그땐 나눠줘도 돼.」
「왜요?」
「그는 네 정혼자니까.」
‘왜 안토니안은 된다고 했을까?’ 엘레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진작 더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린 마음에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해야 된다고 대충 이해하고 넘겼다.
그 후에는 기사 생활을 하고 전쟁터에 나가느라 바빠 자세한 이유에 대해 묻어두고 있었던 것이 이제 와 절실히 후회되었다.
‘신녀님이 필요해.’
아마 칼립소는 쉽사리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말은 안 했지만 칼립소가 자신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엘레나는 답답한 마음을 누르며 침대에 누웠다.
일단 푹 자고 잘 먹으면서 치유력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 * *
다음 날, 요하스 자작은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막 식사를 끝내려는 찰나에 시종이 황급히 달려왔다.
“자작님! 급히 전해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소란이냐?”
“폐하께서 건축현장에 오셨다고 합니다.”
“뭐!”
놀라 일어선 요하스 자작은 전력을 다해 건축현장으로 달려갔다.
사실 요하스 자작은 짚히는 바가 있었다.
엘레나가 다친 일이 밤새 걸렸던 것이다.
‘설마, 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
정부라고는 했지만, 패전국에서 온 여인이다. 게다가 데려오자마자 탑에 가두시지 않았는가.
지금도 별실 대신 로하스관에 두신 것을 보면 그다지 애정이 없으시다고 생각했다.
‘아닌가? 착각이었나?’
가까스레 현장에 도착한 요하스자작은 현장에 있던 관리를 다그쳤다.
“폐하께서 이곳에 오셨다는 것이 사실이냐?”
“네, 자작님.”
“그걸 왜 이제 알리는 것이냐?”
“그게 워낙 갑작스러워서, 저희도 미리 연락받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이미 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뭐?”
요하스 자작은 이마에 식은 땀이 흘렀다
하필이면 자신이 현장에 없었다는 때 오셨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오전에 궁에 가서 알현을 청해 뵈어야 하는지도 헷갈렸다.
“별말씀은 없으셨나?”
“그저 현장을 한 번 둘러보시다 가셨습니다.”
“그래? 특이한 점은 없으셨고?”
“딱히 없으셨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요하스 자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 별일 없는 건가? 괜히 걱정했나?’
요하스 자작이 안심하고 발길을 돌리려고 할 때, 관리가 입을 열었다.
“참, 그런데 폐하께서 돌 수레에 관해 물으셨습니다.”
“뭐?”
‘망했다!’ 우려하던 이야기에 요하스 자작의 인상이 굳었다.
* * *
요하스 자작은 불안한 듯이 집 안에서 왔다 갔다 거리고, 시종은 그 옆에서 초조한 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하스 자작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듣자 하니 어젯밤, 폐하는 그 정부와 같이 산책을 갔다고 들었다.
그리고, 오늘 갑작스러운 새벽 방문이라니.
게다가 돌 수레를 물었다면 엘레나 님이 다쳤다는 것을 알았다는 소리다.
‘정말 폐하께서 아끼시는 건가?’
요하스 자작은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궁전으로 갔다.
알현을 청하기 전 요하스 자작은 데릭부터 만나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이른 시각에 무슨 일입니까?”
“오늘 아침 일찍 폐하께서 신전 건축 현장에 오셨는데, 제가 맞아드리지 못했습니다. 알현을 청하는 게 좋을까요?”
잠시 생각을 하던 데릭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신청한다고 해도 오늘 중에는 뵐 수가 없습니다. 워낙 알현을 신청한 사람이 많아서요. 그보다 전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데릭이 말을 멈추자, 요하스 자작이 긴장했다.
“폐하께서 신전 설계안을 제출하라고 하시더군요.”
“설계안을요?”
요하스 자작이 놀라 반문하자, 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건축공사에 그런 적은 없으셨잖습니까.”
“이번에는 경쟁입찰을 하신다고 합니다.”
“경쟁입찰이라면, 제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요하스 자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신전 건축은 꽤 큰 사업이었다. 이번 신전을 시작으로 몇 년에 걸쳐 계속해서 지어질 사업이었고, 그 공사들은 모두 암묵적으로 요하스 자작이 맡고 있었다.
큰 사업을 맡게 되자 요하스 자작도 배포가 커져 이 일만 믿고 벌써 지출한 금액도 꽤 되었다.
“그럴 수도 있죠. 경쟁 방식이니까요.”
“혹시 엘레나 님 때문입니까?”
요하스의 물음에 데릭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원래 폐하께서는 경쟁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