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33화 (33/100)

33

베르나르는 비비안을 보며 책하듯이 말했다.

칼립소가 그녀를 아끼는 이상, 엘레나의 건강이 이상하다면 그것은 곧 베르나르의 잘못이기도 했다.

“이 정도 상처로 뭘 그렇게까지.”

“이 정도의 상처라니요? 바로 치료하지 않으면 잘못하면 파상풍까지 올 수 있습니다.”

그러자 엘레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난 그런 병에는 안 걸려요.”

“건강에 대한 지나친 자신은 금물입니다.”

그녀의 능력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베르나르는 다소 딱딱하게 말했다.

“그럼, 치료하겠습니다. 아프실 겁니다.”

뭐 얼마나 아프겠냐 싶었지만, 막상 치료가 시작되자 엘레나는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아팠다.

고작 긁힌 상처에 소독약을 붓는 것뿐인데, 꽤 아팠다.

상처를 소독한 베르나르가 노란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이게 바를 때 따갑긴 해도 효과가 좋은 약입니다.”

베르나르는 숙련된 동작으로 재빨리 연고를 바른 후, 붕대를 감았다.

“한동안 물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주십시오. 그리고 다음에 이런 일이 있을 시에는 바로 저를 호출해 주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나르가 몇 가지 주의사항을 더 당부했지만, 엘레나는 건성으로 들었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그래요.”

베르나르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엘레나는 그가 처치한 상처부위를 내려봤다.

연고를 바르자, 더 화끈거리는 것이 확실히 예전에 상처를 입었을 때와 달랐다.

‘그동안 너무 무리해서 그렇겠지.’

엘레나는 애써 불안감을 억눌렀다.

조금 더 휴식을 취하다보면 곧 예전처럼 돌아올 것이다.

지금은 그보다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비비안, 폐하는 지금 어디 계시지?”

“지금 시간이면 아마 궁에서 정무회의 중이실 거예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알현을 청해야 할 것 같아.”

엘레나는 채비를 갖추고, 로하스관에서 나왔다.

하지만 엘레나는 궁정에서 알현을 신청하고도 칼립소를 만나기 위해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아마 두 시간은 더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되돌아온 시종장의 말에 엘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칼립소의 일정은 빡빡했다. 거의 두 시간 이상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엘레나는 겨우, 회의장에서 나오는 칼립소를 만날 수 있었다.

엘레나가 칼립소를 보고 인사하자, 칼립소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두 번째 데이트는 이렇게 빨리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칼립소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스스로 찾아온 엘레나를 바라봤다.

“전 데이트를 하러 온 게 아니랍니다.”

“그럼?”

“업무상 용건 때문에 알현을 신청했습니다.”

엘레나가 칼처럼 자르자, 칼립소가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더 기다려야겠군.”

“뭐라고요?”

“원래 그래. 업무 용건이라면, 만나려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칼립소의 눈매가 오만하게 올라갔다. 둘의 시선이 팽팽하게 부딪혔다.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엘레나였다.

“그럼, 두 번째 데이트라고 치죠.”

칼립소의 눈썹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꿈틀댔다.

아마도 ‘치죠’라는 말이 그의 심기를 거슬린 것 같았다.

“데이트는 원래 일주일에 한 번만 하는 거라면서?”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죠.”

“모든 예외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

“폐하가 보고 싶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말하는 것이 귀여워 아까와는 달리 칼립소가 크게 웃었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왜 저러지?’

엘레나가 그의 너무 큰 웃음소리가 민망해 고개를 돌리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엔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칼립소의 웃음은 아직도 그치질 않았다.

“그만 좀 웃어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엘레나가 눈자위를 굴리며 말했지만, 칼립소는 개의치 않는 듯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간만에 기꺼운 소리를 들어서.”

매서운 엘레나의 눈초리를 보면서 칼립소는 애써 웃음을 억눌렀다.

그럼에도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미소는 막지 못했지만.

“오늘 데이트 코스도 정원이오?”

엘레나는 자신의 귓가를 간질이는 칼립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새삼 얄미웠다.

“아니요. 오늘은 좀 더 멀리 나가죠.”

“얼마든지, 환영이오.”

칼립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와 함께 칼립소가 움직이자, 황급히 데릭이 바로 따라붙었다.

“폐하, 오늘 폐하를 알현하려 기다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패트릭 공작 각하도…….”

“미뤄.”

“네?”

“미루라고.”

“폐하, 한 달 전부터 잡힌 일정입니다.”

“데릭.”

칼립소의 붉은 눈이 사납게 변했다.

“보다시피, 내가 연애 중 아닌가. 그것도 처음.”

‘연……애!?’ 데릭이 멍한 표정으로 칼립소를 바라봤다.

“그러니 그런 것쯤은 이해해 줘야지.”

“연애라면, 엘레나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데릭이 납득되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칼립소를 올려봤다.

그러자 칼립소가 차가운 말투로 싸늘하게 말했다.

“이해가 안 가면 다른 적당한 핑계를 대든지 그건 알아서 하고, 더 이상 귀찮게 하지나 말아.”

칼립소는 성급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엘레나는 벌써 저만큼 앞에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뒤따라올 것을 확신하듯.

칼립소가 데릭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가려 하자 데릭이 다시 칼립소를 붙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언제 돌아오십니까? 한 시진 후로 미뤄놓을까요?”

“오늘은 안 돌아와.”

그 말이 끝이었다.

더 이상 반문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이 칼립소는 성큼성큼 엘레나를 뒤쫓아 갔다.

* * *

둘은 나란히 성 밖으로 나갔다.

“이번엔 어디를 가는 거지?”

“가보면 알아요.”

“뜻대로.”

정말로 엘레나의 뜻대로 하려는지, 그 뒤로 칼립소는 군말 없이 엘레나와 함께 걸었다.

날씨는 좋았고, 걷는 내내 칼립소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한참 동안 걸어 도착한 곳은 신전 건축 장소였다.

“흐음.”

그제야 무슨 일로 왔다는 것이 짐작이 간다는 듯 칼립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현장에는 오늘 작업이 마무리된 듯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여기는 데이트하기 적당한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

엘레나는 아무 말 없이 건축 현장 주위를 돌았다.

“일상을 나누는 것도 데이트의 중요한 요소죠.”

“딴은 그렇군. 역시 숙련자라서 달라.”

칼립소가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럼,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소?”

“오늘, 이곳에 와 봤어요.”

신전 주위를 걷는 동안 엘레나는 더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폐하께서는 가이아의 건축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죠.”

“그랬지.”

“그럼, 가이아 건축가는 건축가로 활용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엘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패전국에서 왔다고 해도 최고의 건축가였던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고작 인부로 쓴다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요하스 자작이 말을 안 듣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칼립소의 말에 엘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알고 있었어요?”

“가이아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케이타에서는 여자들이 직책을 갖는 경우는 거의 없어.”

엘레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내 명이라 해도 당신은 특별한 경우지.”

칼립소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가이아의 황녀 자격으로 온 것도 아니고.”

“그래서요?”

엘레나가 도전적으로 물었다.

“요하스 자작이 말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인정을 하란 말이야. 아무래도 케이타 제국은 승전국이고, 가이아에서 온 사람들은 패전국에서 온 사람들이야. 거기에 가이아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은 각 부처 담당 귀족에게 일임했고. 텃세를 부리는 건 당연하잖아?”

“당연한 게 옳은 건 아니잖아요.”

“누구나 다 옳은 일만 아는 건 아니야. 천천히 해. 처음부터 당신 입맛대로 휘두를 수는 없어.”

“결국 허수아비 노릇을 하란 건가요?”

해갈이 되지 않는 칼립소의 대답에 엘레나의 눈빛이 반항적으로 빛났다.

“그건 아니야. 다만 이쪽도 납득할 만한 것을 제시해야지.”

“뭘…… 말인가요?”

무엇을 생각한 건지 엘레나의 눈빛이 불안해지자, 칼립소가 서둘러 말했다.

“조만간 신전 건축에 대해 제대로 된 설계도를 제출하라고 할 거야. 그동안은 주먹구구식으로 방치해 왔거든. 그때.”

칼립소가 엘레나와 눈을 마주쳤다.

“가이아의 실력을 보여줘. 그런 후에도 요하스가 정신을 못 차리면 그땐 파면해야겠지.”

“……알겠어요.”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도 명분이 필요하다고.”

“그런 것도 생각해요?”

“당신이 오해하는 면이 있는데 난 꽤 합리적인 편이야.”

엘레나의 의심스러운 눈길을 의식한 칼립소가 실소했다.

“물론 당신한텐 예외였지만. 어쨌든 그동안은 이곳에 좀 적응하도록 해.”

“알았어요.”

그제야 엘레나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고민이 해결되었어?”

“어느 정도는요.”

“그럼, 상을 줘야지.”

“상……이라니요?”

갑자기 칼립소가 엘레나의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도대체 가이아에서는 몇 번째 데이트에서 키스를 하는 거지?”

순식간에 엘레나는 칼립소의 품에 안겨 버렸다.

“그건, 좀 더 있다가…….”

그러나 엘레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립소의 입술에 그대로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거친 입술이 겹쳐지는 동안, 칼립소의 손이 엘레나의 부드러운 뺨을 감쌌다.

한참 맛보더니, 잠시 떨어진 칼립소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좀 더 있다가 해야 하는데?”

칼립소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아까보다 부드럽게 아랫입술을 삼키듯 빨아당기고 그대로 입술 안쪽으로 들어왔다. 유혹하듯 밀려 들어오는 혀에 엘레나도 같이 호응했다.

끈적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칼립소의 다리가 엘레나의 몸을 밀었다. 뒤에는 마침 벽이었다.

고개를 돌리려 하자, 칼립소의 손이 그녀를 막았다.

“집중해.”

부드러운 키스는 어느새 격정적으로 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