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32화 (3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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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토르가 의원을 데려오려 서둘러 대련장을 나갔다.

그사이, 칼립소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날 이후, 정확히 말하자면 가이아의 성에서 깨어난 이후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 같지 않은 느낌이 종종 들었다.

칼립소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검이 박혀있던 그곳은 이미 말끔하게 아문 지 오래였다.

‘이상해.’

꽤 커다란 상처였는데, 예상보다 지나치게 빨리 상처가 아물었다.

아무리 칼립소의 체력이 좋다고 하지만 이상한 일은 이상한 일이었다.

“폐하.”

헥토르가 급하게 데려온 의원, 베르나르가 칼립소 곁으로 뛰어왔다.

“인사드립니다. 그럼, 먼저 상처를 보겠습니다.”

“그저 스친 정도다.”

칼립소는 손을 들어 의원의 치료를 막았다.

이미 피는 멈춰 있었고, 특별히 치료를 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큰 부상을 입은 지도 얼마 안 되셨지 않습니까.”

칼립소는 의원의 말에 팔을 내려봤다.

아까 검에 베인 자국은 피를 닦아내니, 거의 생채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물어 있었다.

“봐라. 별로 스치지도 않았지 않는가?”

“다행입니다.”

“그래.”

칼립소가 팔을 움직여보았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렇대도.”

“폐하,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커다란 상처를 입으신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워낙 강건하시다고 해도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이상해.”

“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자네 말대로 분명 크게 다쳤던 거 같은데.”

칼립소가 복부에 손을 댔다.

“그때 다치신 부분이 안 좋으십니까?”

그러자 칼립소가 짧게 웃었다.

“천만에. 오히려 이전보다 몸 상태는 나아졌어.”

날뛰던 피가 조금 진정되었지만 무언가 분출하고 싶은 욕구는 여전했다.

마치 사춘기 때, 날 선 감성에 휘말릴 때처럼 기분이 들쑥날쑥했다.

“그런데 가끔 내 몸 같지 않다고나 할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야, 기분의 문제인가. 온몸이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어. 피를 보고 싶을 만큼.”

‘그건 뭐 이전에도……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오죽하면 전쟁의 신이라 불렸을까요?’ 하지만 베르나르는 현명하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삼켰다.

그때 헥토르가 끼어들었다.

“맞아요! 오늘도 폐하께서 절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니까요! 제가 오죽하면 그랬겠냐고요.”

헥토르가 억울함을 피력하듯 베르나르에게 말했다.

“또 전쟁을 하고 싶어서 그러십니까?”

“전쟁 중독 뭐, 그런 건가?”

자조하던 칼립소의 입매가 잔인하게 일그러졌다.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는 거지?”

칼립소의 붉은 눈이 번들번들 빛났다.

그의 눈빛을 본 베르나르는 절로 고개를 숙였다. 가이아 제국을 정벌한 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결국 또 전쟁을 나갈 셈이신가.

“이번에 남쪽으로 더 내려가 볼까?”

칼립소의 눈이 탐욕스럽게 번뜩였다.

날뛰는 혈관이 어서 일어나라고, 피를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벌이야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칼립소 못지않게 전쟁을 좋아하는 헥토르가 반색을 했다.

“데릭은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지. 한번 검토해 보라고 해야겠군.”

칼립소는 얘기는 끝났다는 듯 가뿐하게 일어났다. 땀을 흘려서인지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이것은 잠깐의 효과일 뿐이라는 것을 칼립소는 알았다. 잠잠한 혈관이 언제 날뛸지는 칼립소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 *

아니나 다를까.

남쪽으로 다시 정벌을 떠나자는 칼립소의 계획에 데릭은 조심스럽게 반대의사를 표했다.

“폐하, 전쟁이 끝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또 전쟁을 하시겠다니요.”

“영토를 넓히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지금 정복한 곳을 잘 다스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거야 그거대로 하는 거고.”

칼립소는 근질거리는 몸을 풀 곳이 필요했다.

“그럼, 또 황궁을 비우시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그러겠지.”

그러다 칼립소가 멈칫했다. 황궁을 비운다는 생각에 갑자기 온몸의 피가 차가워졌다.

날뛰던 흥분만 생각했지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엘레나도 못 보게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니 갑자기 전쟁에 대한 흥미가 뚝 사그라들었다.

‘데려갈까?’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로하스관으로 갔다고 좋아했는데 또 금방 전쟁터로 끌고 다니면 어떻게 나올지 안 봐도 뻔했다.

그렇다고 장수로 임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신 옆에만 있으라고 하면 또다시 정부 취급한다며 겨우 열린 문도 닫아 버릴 것이다.

물론 자신이 없는 본성에 엘레나를 두고 갈 생각도 없었다.

분명 자신 따위는 잊고 신전 건축에만 매달릴 생각일 텐데 그 모습은 원하지 않았다.

“자네 말이 맞아. 당분간 궁에 있으면서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어.”

갑작스러운 칼립소의 수긍에 이번에는 데릭이 깜짝 놀랐다.

자신의 의견이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여질 줄은 몰랐기 때문에 어리둥절해지기까지 했다.

“역시 경의 생각은 현명하군.”

“감……사합니다.”

데릭은 애써 당황한 낯빛을 감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칼립소가 데릭의 어깨를 칭찬하듯이 두드려주었다.

“제국의 기틀을 갖추는 게 먼저야. 그래서 가이아에서 사람들도 데려온 것이고.”

“사실, 그 문제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좀 전에 신전 건축을 맡고 있던 요하스 자작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신전 건축에 관한 이야기에 칼립소가 흥미를 보였다.

“그래? 무슨 일로 왔지?”

“폐하, 그게……. 폐하께서 엘레나 님께 신전 건축을 맡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엘레나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칼립소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데릭은 잠시 망설였다.

황녀에 대해서는 유난히 예민해지시는 분이다. 말을 해도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 것이다.

“……아닙니다. 사소한 일이니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감히 누구 마음대로? 어서 말해.”

“아니, 그게.”

데릭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문제가 생겼다고?”

칼립소의 입가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뭔가 자신이 끼어들 거리가 생긴 것을 직감으로 알아챘다.

“말해봐. 어떤 문제인지.”

“그동안 신전 건축은 요하스 자작이 맡고 있었습니다. 가이아에서 온 건축가와 예술가들은 원래 그 분야를 담당하던 귀족들에게 일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래서 자작이 나름대로 가이아에서 온 건축가를 적당한 곳에 배치했는데, 엘레나 님이 거기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 같습니다.”

“그래? 어떤 점에서?”

“아마도 가이아 제국의 건축가를 더 대우해 달라는 것이겠지요. 그 일로 요하스 자작과 부딪힌 모양입니다.”

칼립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폐하, 아무래도 이대로는 계속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언가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서열 정리를 명확히 해달라는 것이었다.

엘레나의 권한을 정리하던지, 아니면 요하스 자작을 이 일에서 제명하던지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칼립소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조용히 웃었다.

“어떻게 할까요?”

“글쎄.”

칼립소는 말을 흘렸다.

“좀 놔둬 봐.”

“네? 그럼 현장에서는 더 큰 혼란이 올 겁니다. 가뜩이나 지금 예정 일자까지 시일도 촉박한데 공사도 더 늦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고.”

데릭의 당황하는 얼굴과 달리 칼립소의 눈은 재밌다는 듯 빛났다.

‘엘레나. 그러게 일주일에 한 번은 너무 적잖아. 안 그래?’

칼립소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그려졌다.

* * *

엘레나는 화가 나서 거친 발걸음으로 로하스관을 돌아다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최고의 건축가를 고작 인부로 부리다니.

그러고도 뻔뻔스러운 요하스 자작의 태도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상관 말라니. 도대체가 말이 안 통하는 자가 아닌가.’

이건 제대로 된 대우가 아니었다.

‘역시 처음에 정부로 온 게 문제인가.’

엘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작 정부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지 못하겠다는 거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아무리 칼립소가 임무를 맡겼다고 하나 세간의 시선이 바뀌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인식을 바꿀 사람은 당신이야. 당신이 제대로 일을 시작하면 사람들도 달리 볼 거야. 난 그 판을 깔아주는 거고.」

그럼 뭔가 보여줄 수 있게 판을 깔아주든지. 실무자가 저리 대해서야 일을 하려고 해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엘레나가 불퉁거리며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사이에 비비안이 들어왔다.

“엘레나 님, 저녁 드세요. 어머!”

비비안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엘레나 님, 다치셨어요? 팔에 피가 흐르고 있어요.”

“아.”

엘레나는 무심하게 팔을 들었다.

“나을 때가 되었는데.”

이 정도 가벼운 상처쯤이야 예전이라면 금방 치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아물지 않고 계속 피가 흐르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잠시만요, 의원을 불러올게요.”

비비안이 황급히 나가자 엘레나는 자신의 팔을 유심히 바라봤다.

‘이상하다. 정말 몸이 약해졌나?’

한동안 탑에 갇혀서 기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먹는 것도 부실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몸의 상태가 꽤 좋았다.

로하스 관으로 옮긴 후, 잠도 잘 잤으며, 먹을 것도 충분했고, 땅의 기운으로 받았다.

그래서 꽤 회복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엘레나가 상처를 살짝 건드리자, 제법 따끔한 통증이 팔을 타고 전달됐다.

‘으, 이 정도에 이렇게 아프다고?’

이전에 지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할 때는 이보다 훨씬 더 가혹한 상처를 입었다. 칼날이 박힌 채찍으로 등짝을 맞았을 때도 있었는데, 고작 이 정도의 상처에 신음이 나올 정도로 아픔을 느끼는 것이 낯설었다.

“엘레나 님, 의원을 데려왔어요.”

베르나르는 엘레나에게 인사했다.

본디 황족만 담당하는 그에게 황제의 정부를 치료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어디서 다치셨습니까?”

“좀 전에 건축 현장에서 돌에 좀 긁혔어요.”

“좀 전에 말씀이십니까? 상처가 오래되어 보이는데요.”

“점심 때쯤이에요.”

“예? 그럼, 바로 절 부르셨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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