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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바쁠 것 같아요. 로하스관으로 방도 옮겨야 하고, 신전 건축 계획도 짜야 하고요.”
“어차피 식사는 해야 하잖아?”
그 말에 엘레나가 폭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말해봐.”
칼립소가 충분히 기다려 주겠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처음 연애할 때는 이렇게 자주 보는 게 아니에요.”
“뭐……?”
예상치 못한 말에 칼립소의 얼굴이 당황스럽게 변했다.
그러자 엘레나가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
“가끔 봐야 한다고요.”
칼립소의 미간이 좁혀졌다.
“얼마나 가끔?”
“음…… 일주일에 한 번 정도요.”
마음 같아서는 한 달에 한 번이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러면 이런 부분에서 둔한 칼립소라도 눈치챌 것 같았다.
‘넘어갈까?’
엘레나는 살짝 눈을 들어 칼립소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그럴 리가.”
“정말이에요.”
엘레나가 더욱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연애는 처음이라면서요.”
그러자 미심쩍은 눈빛으로 칼립소가 엘레나를 살폈다.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리드하라면서요. 원래 처음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엘레나가 못 박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미처 몰랐군.”
“그러니까 내가 가르쳐 드리잖아요. 그럼, 다음 주에 봐요.”
엘레나는 서둘러 인사하고 몸을 돌려 가려 했다.
막 두어 걸음 움직이려던 순간.
“잠깐.”
묵직한 소리에 엘레나의 발이 어쩔 수 없이 묶였다.
“데려다주지.”
칼립소가 엘레나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엘레나가 홱 돌아 다시 한번 말했다.
“폐하, 원래 첫 데이트에는 데려다주는 게 아니랍니다.”
이번엔 칼립소의 답도 기다리지도 않고, 자신의 말만 한 채 엘레나는 뒤돌았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엘레나는 최대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그에게서 달아나듯이.
칼립소는 서둘러 달아나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내가 놓은 덫에 내가 걸렸군.’
칼립소는 씁쓸한 미소를 감췄다.
아까의 흥분감은 어느새 싹 가라앉았다.
‘그래도 일보 전진인가? 아니면 이 보 후퇴인가.’
자신의 팔에 흐르는 피가 마치 쫓아가라는 듯이 팔딱팔딱 뛰었다.
하지만 칼립소의 발은 바닥에 굳게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거절하는데 가까이 가봤자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
못마땅하다는 듯이 칼립소의 입매가 올라갔다.
‘그건 안 되겠는데.’
칼립소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방으로 돌아간 엘레나는 심란했다.
‘잘한 일일까?’
하지만 애초에 자신에겐 선택사항이 없었다.
그의 노리개로 지내면서 하루하루 피 말라 죽어가는 것보다야 이편이 훨씬 현명했다.
‘그런데 왜 현명하다는 생각이 안 들지?’
이제 매일 밤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고, 오히려 그녀가 이끌어 나가는 상황임에도 안전하다는 느낌은 별반 들지 않았다.
‘연애를 한다고 해서 그런가?’
엘레나는 조용히 실소했다.
어차피 목적은 한 가지일 뿐일 것이다. 뻣뻣한 자신을 안기 싫으니 길들이려는 것 아닌가.
‘뜻대로 되지 않을걸?’
뻔히 보이는 수에 놀아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오히려 제가 갖고 놀았으면 놀았지 그 수에 넘어가진 않을 테다.
정혼자였던 안토니안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고 나자, 그나마도 남자라는 종족은 신뢰할 수 없었다.
일단, 연애를 하든 말든 신전 건축을 맡게 된 것은 잘된 일이었다. 이번 일로 어떻게 하든지 그에게 이용 가치를 증명할 것이다.
신전 건축은 빨라도 일 년 정도 걸릴 것이다. 건축이 끝나갈 때쯤에는 자신에게 대한 흥미도 떨어져 나가겠지.
그러면 가이아 제국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무언가 불안했다.
엘레나는 왠지 모를 불길함에 초조해지자,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이 없었으니까.
* * *
다음 날, 엘레나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제 말한 것이 통했는지 다행히 칼립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당분간은 일주일에 한 번도 충분히 부담스러웠다.
엘레나는 가뿐한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로하스관으로 옮길 준비를 했다.
이제부터 할 일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몸 안의 기운이 샘솟았다.
원래부터 자신의 짐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기에 이사는 간단했다.
로하스관은 주로 외교관이 머물기 때문에 별채보다 소박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그 모양새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거처를 옮기는 것을 보고 수군거림이 많이 들렸지만, 엘레나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고, 앞으로 행동으로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로하스관으로 거처를 옮기자마자, 엘레나는 신전 건축을 맡은 아크테전로 향했다.
아크테전에서는 엘레나가 나타날 줄 몰랐는지 경비가 막아섰다.
“여기 책임자를 불러주세요.”
한참 뒤에나 온 그곳의 책임자는 요하스 자작이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타난 요하스 자작은 뚱뚱한 체격에 뱀처럼 가는 눈매를 가진 이였다.
“무슨 일이시죠?”
“당신이 이곳 책임자인가요?”
“그렇습니다만…….”
“난 가이아의 황녀 엘레나입니다.”
엘레나가 일부러 ‘황녀’라는 말을 쓰자, 요하스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신전 건축에 대해 알아보고 싶군요.”
“아. 연락은 받았습니다.”
요하스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정부인 주제에 나서긴. 젠장, 귀찮게 되었군.’
그 생각을 숨기려는 듯 요하스는 자못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으나 그 안에 든 비웃음이 엘레나에게도 보였다.
엘레나는 최대한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지금까지 진행된 일정에 대해 간략히 보고를 받고 싶네요.”
엘레나의 말에 요하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은 오래 머무시기에 적당치 않은 곳입니다. 제가 보고를 올릴 테니, 황궁에서 쉬시면 될 것입니다.”
“내가 지내는 곳은 황궁이 아니라, 로하스관입니다.”
그 말에 요하스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럼, 로하스관에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구체적인 보고는 나중에 받을 테니, 일단 설계도부터 보여주세요.”
“아이참.”
요하스는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보고드리겠습니다.”
“언제요?”
집요하게 묻는 통에 요하스가 엘레나의 시선을 피했다.
“혹시 설계도가 없나요?”
“그게 아직…….”
요하스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흐렸다.
엘레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가이아에서 온 건축가의 명부를 볼 수 있을까요?”
“그거라면야. 잠시 기다리시죠.”
요하스는 느릿느릿 움직이며, 서류를 가져왔다.
서류를 내놓자, 엘레나는 급하게 훑어보았다. 쭉 읽어보던 그녀는 누군가의 이름을 발견하고 동작을 멈췄다.
“아몬이 있군요. 신전 건축 경험이 많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자라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아, 네 뭐.”
도움이 되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건성건성 답하는 모습이 엘레나의 신경을 자극했다.
“이곳까지 왔으니 건축 현장도 살펴보도록 하죠.”
“왜 이렇게 급하십니까?”
요하스가 일어나 엘레나를 막아섰다.
“급한 게 아니라, 이왕 왔으니 둘러보겠단 말이에요.”
“나중에 하시죠.”
“비키세요. 아니면, 현장을 살펴보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날카로운 엘레나의 말에 요하스가 멈칫했다.
그의 어색한 반응에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든 엘레나가 요하스의 곁을 지나갔다.
“현장은 먼지도 많고, 이런 차림으로 가실만한 곳이 못됩니다.”
“안내부터 하세요.”
요하스가 뒤늦게 엘레나를 잡으려 했으나, 이미 엘레나는 신전 건축 현장으로 향했다.
* * *
요하스의 말은 반은 맞았다.
허허벌판 위에 시작된 공사는 아직 시작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요하스가 가지 말라고 말한 이유는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가이아에서 데려온 건축가들이 인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엘레나가 나타나자 그녀를 알아본 건축가들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 가이아에서 보낸 건축가들을 현장 인부로 쓰고 있는 건가요?”
그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엘레나는 간신히 분노를 다스리며 요하스에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아직 땅을 다져야 해서요.”
그때, 엘레나 옆으로 돌 수레가 빠르게 굴러왔다.
일에 익숙치 않은 건축가 중 누군가 놓친 듯한 수레였다.
엘레나가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으나, 수레에서 삐져나온 거친 돌 때문에 팔에 커다란 생채기가 나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이런.”
요하스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길래 왜 현장까지 오신다고 하셔서…….”
그때, 주눅이 든 모습의 가이아인이 다가왔다.
“황녀님, 죄송합니다. 제가 손을 놓쳐서 그만.”
“이봐, 정신 못 차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요하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인부를 꾸짖었다.
“요하스 자작. 당신이야말로 뭐 하는 짓이죠?”
엘레나의 보랏빛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하아, 그러게 제가 로하스관에 있으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내 상처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도대체 가이아 건축가들을 무엇으로 생각하는 겁니까?”
엘레나의 일갈에 현장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가이아 건축가들이 기대감이 번진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못마땅한 듯이 요하스 자작이 말했다.
“일단, 치료부터 받으시죠.”
“됐습니다.”
엘레나는 요하스의 제안을 일축했다.
이까짓 상처야 가만히 놔두어도 얼마 후면 씻은 듯이 나을 것이다.
“먼저, 왜 건축가를 인부로 쓰는지부터 보고받아야겠습니다.”
엘레나는 무서운 눈빛으로 요하스를 노려봤다.
* * *
대련장에서 칼립소의 검이 무섭게 휘둘러졌다.
헥토르가 겁먹을 정도로 칼립소의 검은 예전보다 더 무섭게 춤을 췄다.
이상했다. 아까부터 몸의 피가 팔팔 뛰는 것 같았다.
뭔가 베어버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끓어올랐다.
검끼리 맞붙는 소리가 무섭게 울려 퍼지는 것이, 이대로라면 서로 피를 보자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마치 죽일 듯이 달려드는 칼립소의 기세에 헥토르가 끝내 검을 놓치고 말았다.
놓친 검이 칼립소의 팔을 살짝 스쳐나갔다.
“폐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헥토르가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는 무슨.”
피를 보자 오히려 날뛰던 무언가가 약간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어서 의원에게 보이셔야죠. 제가 불러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