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30화 (30/100)

30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연애를 하고 싶으면 구애를 하라며. 그래서 지금 구애하는 중인데.”

‘이건 구애보다는 협상 같은데.’ 하지만 엘레나에겐 손해될 것이 없는 협상이었다.

“정말 무릎 꿇고 세레나데라도 부르길 원하는 거야? 그런 건 성미에 맞지 않는데.”

칼립소가 짐짓 고민하는 듯 보였다.

“뭐 정 원한다면…….”

“됐어요. 하지 마요.”

정말 무릎이라도 꿇을 것 같아서 엘레나가 말렸다. 그런 민망한 일을 견디고 싶지 않았다.

“오늘 당장 로하스관으로 옮길게요.”

“그 말은?”

“제안, 받아들이겠다고요.”

“역시 현명해.”

칼립소의 얼굴이 환해지며, 만족감이 퍼졌다.

그 표정이 신기해 엘레나가 멈칫하는 사이에, 칼립소가 한 걸음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치려는 엘레나의 허리가 칼립소에게 그대로 잡혔다.

“아까, 원하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린다고…….”

칼립소의 부드러운 입술이 스치듯 엘레나에게 닿았다.

“이 정도는 좀 봐줘. 오늘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하는 날이니까.”

그 느낌에 엘레나가 움찔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점점 내려오던 입술이 살짝 닿기만 하고 신사답게 떨어졌다.

“기대가 되지 않아? 엘레나.”

칼립소가 해맑게 웃었다.

“난 무척 기대가 되는데. 당신과의 연애가.”

부드럽고 진중한 목소리가 설렘을 담고 공중에 흩어졌다.

막상 협상을 끝내서 그런지 칼립소는 느긋해 보였다.

칼립소가 이렇게 나오자 초조한 것은 오히려 엘레나 쪽이었다.

‘연애를 시작한다면 뭘 해야 하지?’

엘레나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안토니안과는 무엇을 했지? 그와는 어릴 때부터 정혼자였으니까 자연스럽게 같이 있었지 딱히 무엇을 했던 거 같지 않았다.

그저 같이 연회에 참석했거나, 아니면 부모님들과 함께…….

“무슨 생각해?”

갑자기 들어오는 위협적인 목소리에 엘레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딴생각하는 것 같은데.”

안토니안 생각하는 것을 알았나?

설마…… 그럴 리가.

“아니, 뭘 해야 할지 몰라서요.”

“아. 그건 그렇지. 나도 연애는 처음이라.”

처음이라고? 설마.

엘레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칼립소를 바라봤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말과 달리 칼립소는 꽤 여유 있어 보였다.

“그래서 당신이 좀 리드해줘야 할 것 같아.”

당당하게 요구하는 칼립소를 엘레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원래 그런 건 남자가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고정관념이 있을 줄은 몰랐군.”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은 많이 해봤을 거 아니야.”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눈빛은 사나웠다.

마치…….

“혹시 화내는 거 아니죠?”

“화라니? 전혀 아니야.”

칼립소의 얼굴에는 어느새 그림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저 숙련자가 초보자를 안내해주길 바랄 뿐이지.”

그 말을 하면서 왜 다가오는 건데?

엘레나는 다가오는 칼립소를 지나치며 문 앞에 섰다.

“일단, 나가는 게 좋겠어요.”

“그러지.”

이자와의 밀폐된 공간은 피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엘레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정원이라도 갈까?’

엘레나가 나가자 따라오는 칼립소의 발걸음이 뒤에서 들렸다.

‘아까 보니까 정원이 괜찮던데.’

“산책을 할까요?”

“밤 산책을 즐겼나 보지?”

이번에는 칼립소가 엘레나를 앞질러 먼저 갔다.

성큼성큼 걷는 발자국에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고스란히 읽혔다.

기껏 생각해서 안내를 했더니 왜 저런 반응인 건데!

엘레나는 미간을 좁히다 칼립소를 따라갔다.

꽤 오래 둘은 함께 정원을 거닐었다.

별빛은 아름다웠고, 선선한 밤공기는 상쾌했다.

정원의 꽃냄새는 향기로웠고, 바람은 기분 좋게 스쳐 갔다.

아까는 불퉁거리더니 지금은 칼립소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까 저기서 누워있었던 거 같은데.”

“봤어요?”

“지나가다가.”

엘레나가 잠시 허리를 숙여 잔디를 쓸었다.

“땅에 누워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힘도 생기고.”

“가이아 사람들은 땅의 기운을 받는다던데. 정말 흙에 닿으면 힘이 생기는 건가?”

“그런 셈이죠.”

“신기하군.”

“가이아에서는 아이들은 거의 밖에서 지내요. 흙냄새를 맡으면서 하루 종일 뒹구는 거죠.”

“귀족들은 꽤 고고해 보이던데.”

그 말에 엘레나가 웃었다.

“그래도 다들 개인 정원 하나씩은 있어요.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다 벗은 채 흙바닥에서 뒹굴기도 해요.”

“다 벗고?”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몸으로 뒹구는 거죠. 그럼 기운이 충전되거든요.”

“당신도 그랬나?”

노골적으로 훑는 시선에 엘레나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 뭘 상상하는 거예요?”

“상상한 적 없는데? 먼저 말한 건 당신이고.”

그 말에 엘레나는 왠지 할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뭐라 대답하기에는 저 시선이 거슬렸다.

지금 옷을 갖춰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인 눈길에 마치 벌거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답은 아직 못 들었는데.”

“답할 생각 없어요.”

“그럼, 상상해 볼 수밖에.”

엘레나의 눈이 확 치켜 떠졌다.

“뭘 상상하는 거야? 그저, 당신이 했는지 안 했는지 추측해 본다고.”

칼립소가 능글대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지금이라도 대답해주면 되고.”

생각 같아서는 얼른 답해주고 대화를 끝냈으면 좋겠는데, 대답하기도 난감했다.

사실 엘레나도 몸이 좋지 않은 날이면, 또는 달이 높게 뜬 날이면, 그녀만의 비밀 정원에서 벌거벗은 채 맘껏 뒹굴기도 했다.

그러고 난 다음 날이면 몸이 한결 가뿐해졌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어쩐지 음흉한 시선으로 볼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죠.”

엘레나는 휙 돌아 걸어가며 말했다.

“원한다면.”

마치 봐준다는 듯이 칼립소가 말하며 그녀 옆으로 다가섰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 좋게 선선한 밤이었는데, 엘레나는 마치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손부채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립소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이아에서 데려온 사람들 말이야. 먼저 건축을 맡길 생각이야.”

“건축이요?”

화제가 돌려지자 엘레나가 반가운 듯 답했다.

칼립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아 제국에서 가장 탐났던 분야는 사실 건축이야. 알다시피 케이타에는 우리만의 양식을 가진 건축물이 없으니까.”

“신전이라도 지을 생각인가요?”

가이아의 신전은 그 자태가 아름답기로 대륙에서 유명했다.

“제국의 기틀을 갖추기 위해서라면, 필요하겠지.”

신전에 의지하지는 않지만, 제국을 위해 신전을 짓겠다는 건가.

엘레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이아에서는 신전의 의미는 상당했다.

혼사를 주관하고, 황제의 임명에도 관여했다. 선대 황제의 경우 거의 모든 국가의 정책을 신전에 의탁하여 처리한 경우도 있었다.

베리우스의 경우에도 신전을 절대적으로 의지했고, 따라서 가이아 제국에서 신전이 갖는 의미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하지만 칼립소라면 신전에 흔들려서 일을 결정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전이 황궁의 부속품 격으로 전락해버릴 것 같았다.

칼립소가 원하는 대로 흔들 수 있는 또 다른 신하처럼.

“신전 건축은 누가 주관하나요?”

“글쎄.”

칼립소는 미간을 좁혔다.

“쉽지 않은 일이에요. 가이아의 건축가를 이용할 테지만 책임자는 따로 있겠죠?”

“아마도.”

“나한테 맡겨줘요.”

“…….”

칼립소는 잠시 말이 없었다.

“가이아의 건축가들은 예민해요. 아무리 이곳에 끌려왔다고 해도 함부로 휘두를 수 없을 거예요.”

“생각해보지.”

긍정적인 말에 엘레나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아마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래도 생각해보겠다는 말이 반가웠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립소가 무심하게 말했다.

“한번 해 보든가.”

시원한 대답에 엘레나는 놀란 눈으로 칼립소를 올려다봤다.

그때, 고개를 들자마자 자신을 내려다본 칼립소의 눈빛과 부딪혔다.

날카로웠던 칼립소의 눈에 어느새 감탄 어린 부드러운 빛이 돌고 있었다.

뭘까. 이런 간질거리는 느낌은.

‘바람 때문인가.’

약간 서늘한 바람이 열기를 식히듯 엘레나의 뺨을 스치듯 훑고 달아났다.

어둠 속에서 엘레나의 머리카락이 유난히 빛났다.

천천히 칼립소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그의 커다란 팔이 내려오더니 엘레나의 머리를 살짝 만졌다.

반짝이는 은사 같은 머리가 칼립소의 거친 손에 휘감겼다.

“아름답군.”

칼립소가 손에 휘감긴 머리카락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아……파요.”

“미안.”

하지만 말과는 달리 칼립소는 약간 느슨하게 쥐기만 했지, 온전히 돌려주지는 않았다.

“이제 놔줘요.”

기어이 엘레나가 손을 뻗어 칼립소의 커다란 손에 닿았다.

그러자 뭐에 놀란 듯 칼립소의 손이 확 퍼졌다.

칼립소의 손에 쥐어진 은발이 눈부시게 흩어졌다.

그 머리카락을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으나, 다시 쥐지는 않았다.

밤이 깊어지면서 공기가 부쩍 차가워졌는지 쌀쌀한 바람이 엘레나의 뺨에 스쳤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벌써?”

다소 불만스럽다는 듯이 칼립소가 눈썹을 올렸다.

“원래 첫 데이트는 이렇게 급하게 끝나나?”

칼립소가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듯이.

“그러기엔 아쉬운데.”

하지만 엘레나는 딱 그만큼 더 물러났다.

“원래, 첫 데이트는 그래요.”

단칼에 자른 엘레나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 말에 칼립소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할 수 없군. 내일 아침에 보도록 하지.”

내일 아침에도?

엘레나는 갑자기 부담감이 밀려왔다.

칼립소를 상대하는 것은 생각보다 정신적 소모가 훨씬 컸다. 한 마디로 피곤했다.

“내일은…….”

재촉하는 눈빛에 엘레나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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