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29화 (2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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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스는 칼립소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이런 표정의 칼립소는 처음 봤다.

항상 자신만만했던 칼립소가 무언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거 정말 재미있는데?’

바로스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

“왜? 연애가 잘 안 돼? 이 형님이 좀 도와줄까?”

바로스가 능글거리면서 말했다.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야?”

툴툴거리며 말했지만, 답답한 것도 사실이었다.

“문제가 뭔데?”

바로스가 흥미 있는 시선을 던졌다.

그 말에 칼립소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뭘 해봤어야 어떤 점이 문제인지 말을 하지.

방금 전만 해도 그렇다. 사람을 그렇게 흥분시켜 놓고 차게 굳는 여인의 마음이란.

깊게 찌푸린 칼립소를 보고 바로스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혹시 시작도 못 한 거 아니야?”

놀리는 듯한 그 말에 칼립소의 얼굴이 왠지 흉흉하게 변했다.

“됐어. 자네에게 조언을 바라는 내가 미쳤지.”

그러자 껄껄거리며 바로스가 웃었다.

“정말인가 보네.”

“시답잖은 소리 할 거면 가.”

칼립소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칼립소.”

바로스가 칼립소의 어깨를 잡았다.

“그렇게 전투적인 자세로는 아무것도 안 돼.”

“그러면, 어쩌라고.”

칼립소가 내키지 않는 말투로 물었다.

“여인의 마음을 얻으려면, 먼저 원하는 걸 들어줘.”

“그건 절대 안 돼.”

「가이아 제국에 돌려보내 주세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 이곳에 데려왔는데, 그 소원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칼립소의 단단해진 턱을 보던 바로스는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한다면, 다른 걸로라도 호감을 사야지. 예를 들어 보석이나 장신구 같은 거…….”

“보석이라고? 그런 것 따위를 좋아할 리가. 차라리 보석이 박힌 검이라면 모르겠지만.”

“하긴, 보통 여자가 아니긴 하지. 가이아의 황녀라면 자존심도 보통은 아닐 테고. 아마 부러지면 부러지지 꺾이진 않을걸?”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답을 내놓으라는 듯이 칼립소가 추궁했다.

“부러뜨릴 거 아니면, 세워줘. 그게 맞을 테니.”

바로스가 칼립소의 어깨를 툭 쳤다.

“결국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바람이 아니라 햇빛이니까.”

그 말에 칼립소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 * *

엘레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탑에 갇힐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다시 탑으로 돌아가라는 명은 없었다.

단단히 화가 나서 또다시 괴롭힐 줄 알았는데 어쩐지 의외였다.

‘그래봤자 얼마 안 가겠지.’

엘레나는 언제 돌아가게 될지 모르니 그사이에 햇빛이나 마음껏 쬐기로 했다. 동쪽 탑은 음습했고, 땅의 기운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멀리서 기사들이 따라붙었으나 특별히 그녀를 제재하지 않았다.

엘레나는 오랜만에 풀냄새를 맡으며 정원을 거닐었다.

흙과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 살아있는 것 같았다.

‘좀 눕고 싶다.’

엘레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서 누워있는 것은 체통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가이아 제국에서는 그녀만의 비밀정원이 따로 있었다.

오롯이 혼자 있는 그곳에서 태초의 상태로 부드러운 흙에 눕고 나면, 온몸에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 들었다.

엘레나는 앉은 채로 잔디를 쓸어보았다.

꼭 자신을 반기는 것처럼 엘레나의 손에 부드럽게 감싸였다.

‘에라, 모르겠다. 언제 또 갇힐지도 모르는데.’

엘레나는 멀리서 따라오는 기사들의 존재도 잊은 채 잔디밭에 앉았다.

앉고 나니 눕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엘레나는 주변도 상관하지 않은 채 잔디밭에 누웠다.

풍성한 은빛 머리카락이 잔디에 펼쳐지며 햇빛이 반사되었다.

엘레나는 손바닥으로 따뜻한 땅의 기운을 느꼈다.

따사로운 햇살, 향긋한 꽃냄새,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는 벌들 소리가 들리자 몸 안에 무엇인가가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피곤했던 신경이 스멀스멀 풀어졌다. 그렇게 오랜만에 낮잠을 잤다.

‘얼마나 잤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훨씬 가뿐해진 몸으로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를 보니 머리 위에 커다란 양산이 씌워져 있었다.

덕분에 오후의 강렬한 햇살은 피할 수 있었다.

‘누가 한 거지?’

엘레나는 탁탁 드레스에 붙은 풀을 털며 일어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비안이 다가왔다.

“엘레나 님, 오수는 잘 즐기셨어요?”

“개운하네.”

“그럼, 이제 식사를 하셔야죠.”

“양산 고마워.”

“전 그저 폐하의 명에 따랐을 뿐인걸요.”

칼립소가 시켰다는 말에 엘레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칼립소의 명? 그렇다면 날 보고 갔다는 건가?’

그런데도 깨우지도 않고 오히려 양산을 씌워주었다고?

분명 아침에 화를 내고 갔는데 이건, 또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혈색이 더 좋아지셨어요. 진작 이렇게 나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비비안의 안내에 따라 엘레나는 성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에는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햇살도 즐기고, 맛있는 음식까지 먹자 엘레나의 경계심이 다소 느슨해졌다.

‘정말 무슨 생각이지?’

엘레나는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저녁 무렵엔 다시 쫓겨날까 염려되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엘레나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끼니 때마다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이 제공되었고, 따사로운 햇살 속의 산책도 보장되었다.

그날 밤도 그런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매일 하는 산책과 풍요로운 음식 덕분에 점점 기력을 회복한 엘레나가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려고 한 순간이었다.

삐걱하고 그녀의 방문이 열리더니, 칼립소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칼립소의 얼굴을 본 엘레나는 긴장으로 목이 뻣뻣해졌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엘레나는 굳은 표정으로 칼립소를 바라봤다.

“아직도 날 보면 긴장하는군.”

“무슨 일이죠?”

엘레나가 딱딱하게 말했다.

갑자기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왔다.

하필이면 밤이라는 것도 불안했다.

「매일 꽃단장하고 날 기다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매일 밤 날 기다리는 거, 그게 당신이 할 일이야.」

칼립소의 음성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뻣뻣하게 칼립소를 바라봤다.

“와인이나 함께할까?”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분위기를 좋게 하는 거 따위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며칠 동안의 호사로 다소 마음이 여유로워졌으나, 여전히 그의 정부라는 사실은 거부감이 들었다.

다만, 어쩔 수 없으니 견디는 것일 뿐. 그나마도 오늘 밤, 견딜 수 있을까.

엘레나는 애써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었다.

칼립소가 다가오자 엘레나는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용건이 있어.”

“말해요.”

엘레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감췄다.

어차피 계속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칼립소의 흥미가 사라지지 않는 한, 어차피 자신은 잡힌 물고기였으니.

언제 잡아 먹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칼립소의 강렬한 눈빛을 피해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립소가 작게 실소했다.

“당신에게 제안을 하러 왔어.”

뜻밖의 말에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안이라뇨?”

칼립소가 이상하게 머뭇댔다.

와인잔을 쥐며 한참을 뜸 들이더니, 툭 뱉었다.

“나와 제대로 연애를 하는 건 어때?”

“싫어요.”

엘레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칼립소의 표정 역시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던 것처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싫은가?”

“감정 없는 상대와 연애하는 것만큼 피곤한 건 없어요.”

“역시, 그렇군.”

엘레나는 고개를 피했다.

빨리 밤을 보내야 그의 집착이 사라질 것이다.

암담한 현실에 엘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성질을 건드렸으니, 뒷감당은 자신의 몫일 것이다.

긴장한 나머지 온몸의 신경이 다 곤두서 있을 때, 칼립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애를 하려면 구애를 하라고 했지. 그럼 구애를 하도록 하지.”

다소 의외의 발언에 엘레나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구애라니. 그건 또 무슨 꿍꿍이지?’

“당신에게 직책을 내려주지.”

“무슨 소리예요?”

“앞으로 가이아 제국과 관련된 일을 맡아서 처리하도록 해.”

그 말에 엘레나의 눈이 반짝였다.

“아마 보석보다 이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칼립소의 눈이 엘레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 엘레나 역시 흔들렸다.

사실 궁금했던 차였다.

처지가 처지인지라 애써 모른 척했지만 가이아 제국에서 온 사람들이 어떻게 쓰일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가이아 제국에 간섭을 해댈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 일을 맡겨준다니 엘레나는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정부로 왔는데 그런 일을 한다고요?”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하지만 칼립소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말했잖아. 정부 취급 안 한다고.”

칼립소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로하스관에서 지내.”

그 말에 엘레나의 눈이 흔들렸다.

로하스관은 외교 사신이 올 때, 대접하는 별관이었다.

그곳에서 지내라는 것은 정말 사신 대접을 하겠다는 건가?

엘레나는 혼란스러웠다.

“당분간 사람들 시선은 좀 힘들겠지만, 그건 가이아 제국이 패배했으니 어쩔 수 없어.”

칼립소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날 시해하려던 것도 사실이고.”

칼립소의 눈이 엘레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인식을 바꿀 사람은 당신이야. 당신이 제대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사람들도 달리 볼 거야. 난 그 판을 깔아주는 거고.”

“대신, 폐하와 연애를 하는 게 그 조건인가요?”

“이렇게 기회를 마련해주는데 나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 하잖아?”

칼립소의 입술 끝이 살며시 올라갔다.

“억지로 뭘 하자는 게 아니야. 다만, 그냥 마음을 조금 열어달라고.”

칼립소가 엘레나에게 다가가려다 멈췄다.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도 안 건드려. 그러니까 지난 일은 잊자고.”

칼립소가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당신도 날 모르잖아? 혹시 알아? 알고 보면 매력이 넘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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